섬진강 따라걷기12(압록유원지)
*종주구간:고달교-압록유원지-구례구역
*종주일자:2020. 5. 27일(수)
*따라걷기:고달교-도깨비마을입구-곡성천문대-압록유원지
-유점마을-하늘공원입구-구례구역
*종주시간:11시정각-18시정각((7시간)
*동행 :나 홀로
이번에 섬진강 따라 걷기를 진행하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지났던 길을 저도 몇 십리 걸었습니다. 그 길을 밟으며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릴 수 있었던 것은 전라남도에서 이 길을 ‘남도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로 조성한 덕분입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조선수군재건로(朝鮮水軍再建路)란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당하여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재건로’로 명명하여 조성한 역사스토리 테마길”을 이릅니다. 구례 석주관에서 시작하여 곡성, 순창, 보성, 장흥, 강진을 차례로 경유한 후 진도의 울돌목에 이르는 이 길은 전장이 무려5백Km에 달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44일에 걸쳐 이 길을 거치면서 확보한 인적 물적 자원으로 조선의 수군을 재건해 명량전투를 대첩으로 이끌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는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는 그의 치세가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릴 만큼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은 것 같습니다. 전쟁발발 한 해전에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 장군을 정3품의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것은 선조의 용단으로 그 덕분에 조선수군은 바다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선조의 무능함이 드러난 것은 임진왜란 발발 후로 생각됩니다. 선조가 중용한 용맹했지만 전략에 무지한 신립의 조령 포기로 조선군이 참패해 한양이 왜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했고, 백성들을 버리고 아예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으로 피신할 것을 고집하기도 했습니다. 남해바다를 굳건하게 지켜내 왜군의 해상수송로를 차단한 이순신 장군을 적군의 기만작전에 속아 투옥시켰던 선조는 종전 후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일부 측근들은 후대했으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의병장들은 홀대해, 김덕령장군이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국왕 자신과 왕실의 안위를 먼저 신경 쓴 선조가 전쟁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거나 폐위되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제대로 평가하고 전쟁에 대비하여 병자호란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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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11시 정각 고달교를 출발했습니다. 곡성역에서 하차해 기차마을 입구를 잠깐 둘러본 후 시내로 나갔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택시로 고달교로 옮겨 12번째 섬진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올라가는 것은 일 년 중 태양이 북회귀선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하지가 한 달도 남지 않아서입니다. 강둑길로 들어서 10수분을 걷자 공사 중으로 길이 끊겨 둑 아래로 내려가 걷다가 다시 올라가 자전거길을 이어갔습니다. 강 건너 곡성시내 쪽으로 이어지는 강둑길을 향해 오른 쪽으로 내려가 철제의 퐁퐁다리를 건너려다 강물이 반대편을 흐르는 것을 보고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알았습니다. 내친 김에 이 다리를 건너 확인해보니 곡성역쪽에서 흘러내려와 섬진강에 합류되는 묘천천을 그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섬진강본류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되돌아간 자전거길을 따라 남동쪽으로 진행해 부엉이네 팬션 앞을 지난 시각은 12시7분이었습니다.
길을 잘 못 든 덕분에 퐁퐁다리 한가운데에서 섬진강침실습지를 온전하게 카메라에 옮겨 담을 수 있었습니다. 침실습지는 안정적인 수변생태계와 서식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멸종위기인 수달, 흰꼬리수리, 남생이 등을 비롯하여 약665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합니다. 환경부는 국내 하천 습지 중 가장 많은 한국 고유어종이 서식하고 있는 2,037Km²의 이 습지 일대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습지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한 안내 글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이 또한 섬진강 본류가 굽이져 흐르는 구배부분에서 합수되는 오곡천과 묘천천이 실어 나른 토사가 쌓였다가 홍수로 범람한 강물이 빠져 여기 저기 좁은 유로가 만들어지면서 습지가 생성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면 여기 침실습지의 생성도 앞서 본 제월습지나 강선습지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습니다.
13시8분 도깨비마을 입구를 지났습니다. 부엉이네팬션에서 도깨비마을에 아르는 강변 길은 그늘 진 곳이 여러 군데 있어 걸을 만했습니다. 길 가의 숲을 이루는 수종은 다양해 한창 돋아나고 있는 대나무 순도 볼 수 있었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 건너 철로 위에 기적을 울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가 눈에 띄어 요즘도 증기기관차가 운행되고 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이 기차는 곡성섬진강기차마을에서 10Km거리의 가정역을 오가는 관광용 증기기관차였습니다. 장대와 도끼를 들고 서 있는 도깨비 상이 무섭다기보다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였습니다. 도깨비마을 입구에서 반시간 가까이 걸어 다다른 두목교 바로 위 두가헌은 2012년 한옥건축대상을 수상한 한옥 팬션으로 카페를 같이 하고 있어 쉬어가고 싶었으나 땀 냄새로 다른 손님들에 누를 끼칠 것 같아 들르지 못했습니다. 압록에서 섬진강기차마을을 잇는 14Km 거리의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가 지나는 두목교를 출발해 압록 쪽으로 남진했습니다.
여기 호곡리에 도깨비 마을이 형성된 데는 마천목(馬天牧, 1358-1431)장군이 등장하는 전설이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입니다. 섬진강 양안의 호곡리와 송정리에 전하는 마장군의 전설내용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두 전설 모두 어려운 여건에서 물고기를 잡아 음식을 해드리려는 마장군의 효심에 초점을 맞춘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효심이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는 차이를 보여, 호곡리의 전설에서는 하늘나라의 신이 도와주어 뜻을 이루지만, 송정리의 전설에서는 100명의 도깨비 중에서 메밀죽을 얻어먹지 못한 도깨비 한 명이 어살 한쪽을 헐어버리고 도망가는 것으로 끝맺는 것으로 보아 물고기를 잡는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도깨비마을이 들어선 곳은 도깨비가 훼방 놓은 송정리가 아니고, 하늘나라 신이 내려와 도와준 호곡리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하늘나라 신의 도움 없이도, 또 도깨비가 훼방을 놓아도 한 겨울에 부모님께 생선을 대접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교역 덕분입니다. 그 덕분에 이런 유의 전설이 더 이상 만들어어질 수 없게 되었기에, 이런 벽촌에 도깨비마을이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15시 정각 섬진강 본류에 가장 긴 제1지류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에 이르렀습니다. 두목교를 출발해 두가세월교와 구름다리를 차례로 지나 다다른 곡성섬진강천문대가 산이 아닌 강가 평지에 세워진 것을 보고 뜻밖이다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구례구역까지는 구도로를 자전거길로 같이 쓰고 있어 걷기에 딱 좋았습니다. 오래된 가로수들이 터널을 만들어 햇빛을 가려주는 구도로는 강변에 새로 낸 길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논곡과 진변을 차례로 지나 예성교 쉼터에서 쵸코렛을 꺼내 들며 10분여 쉬었습니다. 바로 앞이 보성강물이 섬진강물에 합수되는 압록유원지로 섬진강을 건너는 예성교와 보성강을 가로지른 압록교 등 꽤 큰 두 다리가 거의 붙어 있어 그 아래 압록유원지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017년 호남정맥이 섬진강 본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이 왜일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보성군의 사자산에서 발원한 보성강을 감싸서라는 것을 이번에 비로소 알았습니다. 압록을 지나 ‘화엄사 20.6Km’의 교통표지판을 보고서 지리산이 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시6분 유곡마을회관 하누지카페에서 냉커피를 사들었습니다. 쉬지 않고 흐르는 섬진강을따라 걸으면서 수시로 바로 아래 강물을 바라보고,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에 눈길을 자주 준 것은 긴 시간을 혼자 걸어서입니다. 길가 담벽에 외롭게 홀로 핀 진적색의 장미꽃 한 송이와 흐드러지게 핀 분홍달맞이꽃을 사진 찍는 것도 이 꽃들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서입니다. 오랜 시간 홀로 걸어 누군가에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면 동네 분들이 앉아 쉬는 정자나 길가의 카페를 들르고 싶은 마음이 동합니다. 이제껏 걸어온 자전거 길은 강변에 새로 낸 길이어서 그늘진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유곡마을에 다다르자 빙 둘러 미닫이문을 해달은 정자 유곡정(楡谷亭)의 문이 닫혀 있어 길 건너 카페 하누지를 들렀습니다. 냉커피를 마시며 10분 남짓 쉰 후 구례구 역을 향해 남동쪽으로 진행했습니다.
18시정각 구례구역에서 1`2구간 걷기를 끝냈습니다. 유점마을 출발 17분이 지나 도착한 정자의 이름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팔각정의 이름을 독자정(讀字亭)으로 지은 것은 면학을 독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마을 이름이 독자마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정이 책읽기와 무관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서 지나온 유곡정처럼 문을 해단 것이 아니어서 길손들이 마음 편히 들러 책을 읽다 가도 좋겠다 싶은 데,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도 시원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외관이 돋보이는 구례섬진강교회를 지나 하늘공원 입구에 이르자 과수원 너머로 하얀 교각이 받쳐주는 섬진대교가 잘 보였습니다. 수중에 드러난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섬진강의 저녁 풍경이 더욱 정감어려 보였습니다. 섬진대교와 월암양수장을 지나 신월치안센터에 이르렀습니다. 거목 아래 자리한 잔수정(潺水亭)을 사진 찍은 후 구례교를 건너 순천시의 구례구역에 도착, 12번째 섬진강 따라 걷기를 매듭지었습니다. 인근 슈퍼에서 맥주를 사들어 자축한 후 19시13분 열차로 귀가 길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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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이 나라를 구한 것은 국왕이 무능해도 유능한 충신이 있으면 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임금이 무능하고 신하도 무능하면 국가는 위태로워집니다. 여기에 임금도 부패하고 신하도 부패하면 그 나라는 멸망에 이를 것이 확실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과 유성룡 같은 충신이 있어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고, 병자호란 때는 주화파 최명길의 간언을 인조가 받아들여 조선이 청에 나라 전체를 뺏기는 것만은 면했습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고종 임금의 무능과 왕실 및 집권세력의 부패 때문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신하들의 반역적인 행위입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은 궁예 신하들의 반역에 힘입어서이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공양왕의 신하들의 고려를 버려서 가능했었습니다. 대한민국도 집권세력이 무능하고 부패해지면 오늘의 국부와 안보를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현대전은 총력전이어서 이순신 장군 한 분으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조선수군재건로를 복원한 것은 이순신장군의 애국과 충정을 오늘에 되살려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의 수호와 번영에 기여하자는데 그 뜻이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새겨봅니다.
<종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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