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걷기13
*종주구간: 구례구역-사성암-섬진강어류생태관
*종주일자: 2020. 6. 17일(수)
*종주코스: 구례구역-사성암-노고단전망대쉼터-오봉정사
-섬진강어류생태관
*종주시간: 11시10분-16시56분(5시간46분)
*동행 : 서울사대 원영환/이상훈 동문
여행이 주는 특별한 기쁨은 새로운 명승지를 둘러보거나 새로운 인물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섬진강 강줄기를 따라 걷는 나들이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13번째 나들이에 들른 구례의 사성암(四聖庵)은 백제의 성왕22년인 544년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한 화엄사의 말사로 경관이 수려한데다 세기를 달리한 네 분의 고승이 수도를 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천년고찰 사성암은 조선의 인조8년인 1630년 중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이용산이 중창하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기에 이릅니다. 사성암은 해발고도가 513m인 오산의 어깨 높이에 위치한 천애의 절벽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구석구석’이 “바위를 뚫고 나온 듯한 '약사전'과 바위 위에 살짝 얹어 놓은 듯 단아한 ‘대웅전’ 등 모든 구조물이 산과 하나 되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고 찬하는 것입니다. 사성암에서 멀지 않은 오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섬진강의 물 흐름과 지리산의 산줄기가 한 눈에 조망되어 기쁨이 배가됩니다.
원래 오산사였던 절을 네 분의 고승이 도를 닦은 곳이라 하여 사성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사성암에서 수도한 네 분의 고승은 신라의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道詵)국사, 고려의 진각(眞覺)국사입니다. 신라 고승 세 분은 명성을 익히 들어온 바이지만, 고려의 진각국사는 생소한 분이어서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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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10분 구례구역을 출발했습니다. 새벽5시경 아침 식사를 한 후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가량 달려와서인지 시장기가 느껴져 역전의 한 음식점을 들러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구례구역에서 17번 도로를 따라 5-6분간 동진하다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섬진강자전거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민들이 세운 '잔수진도고적비(潺水津渡古跡碑)'에 따르면 잔수진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순천, 구례, 한양으로 통하는 나룻길이라 합니다. 동행한 친구들이 한자 ‘잔(潺)’의 훈을 물어와 관련 앱을 찾아 ‘졸졸 흐를 잔’자 임을 확인했습니다. 얼핏 보아 어린 자식 셋을 품고 물에 빠져 죽은 주검을 이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이 한자의 훈이 참으로 정감 가는 ‘졸졸 흐를 잔’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를 며칠 앞둔 한 여름에 시멘트 길을 따라 걷는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은 둑길 아래 주렁주렁 열린 매실이 반겨서였습니다. 황전천 위 용문교를 건너자마자 다시 왼쪽으로 섬진강 위 구례교를 건너 아름드리 벚꽃나무들이 그늘을 만든 데크 길로 들어섰습니다.
구레구역 출발 1시간이 지나 도착한 현수교의 두꺼비다리 앞에서 섬진강의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 글을 읽었습니다. 고려 우왕11년인 1385년경 왜구가 이 강 하구를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 갔다 하여 두꺼비 ‘섬(蟾)’자를 붙어 섬진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인 줄 알았는데, 조선시대의 어떤 기록에도 섬진강이 보이지 않았으며, 지역에 따라 적성강, 순자강, 섬강, 두치강 등으로 강 이름이 달랐다고 합니다. 구례의 잔수진(潺水津)에서 광양만까지 물 흐름을 지칭한 섬강(蟾江)이 19세기 중반 이후 섬진강 본류의 전 유역에서 널리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 섬진강(蟾津江)으로 고쳐 불렸다는 것이 안내문의 주 요지였습니다. 오로지 도보용으로 건설된 두꺼비다리를 현수교로 놓느라 돈이 꽤 들었을 것 같습니다. 예부터 민간에서 제복을 상징하거나 수호신 등 신비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두꺼비의 기운이 전해지기를 바라서 놓은 다리라면 강원도 철원을 흐르는 화강에 놓인 거석의 징검다리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시1분 오산의 사성암(四聖庵)에 이르렀습니다. 동행한 이교수의 강력한 추천으로 섬진강의 곁불 격인 사성암을 택시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해발 531m의 오산 정상을 몇 십 미터 남겨둔 산 중턱에 세워진 사성암이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아래 섬진강의과 북쪽 먼발치로 지리산의 노고단이 조망되어서만은 아니고, 소원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천애절벽에 세워진 유리광전(琉璃光殿)을 사진 찍었으나, 전각 안의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는 마애여래입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장전과 신왕전을 지나 소원바위 앞에 다다랐으나, 제가 아니더라도 코로나를 물리쳐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급경사 게단 길을 걸어 정상석이 세워진 이 산 꼭대기의 전망대에 올라서자 발 아래로 섬진강과 강 건너로 노고단이 잘 보였습니다. 도선굴을 거쳐 내려가 사성암을 두루 둘러본 셈인데, 정작 사성은 어느 한 분도 뵙지 못한 채 그냥 내려가 못내 아쉬웠습니다.
14시7분 섬진강 둑길로 복귀했습니다. 사성암에서 내려와 자전거길을 따라 북진을 계속하다 강변에 세워진 문진정(文津亭)에서 잠시 쉬어 갔습니다. 1972년 문척교를 놓기까지 나루터였던 이 곳에 여기 문척 사람들이 정자를 세운 것은 이내 사라질 나루터의 기억을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번 따라 걷기의 끝점이 될 섬진강어류생태관을 7.6Km 남겨 놓은 자전거도로쉼터에서 조망한 섬진강이 잔잔해 보이는 것은 바로 아래 보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를 지나 서시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자전거길은 오른쪽으로 휘어 이어졌습니다. 강 가운데 넓게 형성된 습지를 내려다보면서 저 안으로 들어가 어떤 동식물이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기도 했습니다. 강둑 아래 자리한 4기의 묘가 하도 가지런해 사진을 찍으면서 큰물이 갔을 때 강물이 넘쳐흘러 잠긴 적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금계국 꽃들이 떼 지어 피어있어 소실점이 보일 만큼 긴 직선의 자전거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지겹지 않았습니다. 준공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백색의 아담한 다리를 건너 잔디로 덮여진 둑길을 걸었습니다.
15시42분 '섬진강수달서식지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총 길이 5.4Km의 생태탐방로로 들어섰습니다. 강변에서 벗어나 도로변에 탐방로를 데크 길로 새로 만든 것은 수달이 사람들을 보고 놀랠까보아 그리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섬진강에서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 수달(水獺)은 전 세계적으로 보호가치가 높은 멸종위기에 놓인 종으로 야생동물 1급 및 천연기념물 제33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차도로 복귀해 경당(警堂) 임현주(林顯周, 1858-1934)선생이 후학들에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애써 가르쳤던 강학소 오봉정사(五鳳精舍)를 길 건너서 사진만 찍어 왔습니다. 면암 최익현선생이 순국하자 시신을 맞아 충남 청양에 장례를 치러내는 등 항일운동에 힘쓴 임현주 선생에 훗날 대통령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강학소로는 조금 좁다 싶은 오봉정사는 문이 닫혀 정사 반쪽 밖에 보이지 않았고, 정사 위에 자리한 사당은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16시53분 섬진강어류생태관에 다다라 13번째 섬진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오봉정사를 지나 오른 쪽으로 중산/토금 길이 갈리는 화정마을 앞 삼거리에서 861번 도로를 따라 간전 쪽으로 향해 걸어가다 이내 왼쪽으로 꺾어 강둑길로 들어섰습니다. 간전교에 조금 못 미친 곳에 세워진 하얀 조형물이 준공을 얼마 앞둔 수달을 상징하는 다리인 것을 안 것은 강둑길을 따라 한참 걷고 난 후입니다. 녹색 습지가 뿜어내는 건강한 에너지는 강둑길을 걷는 저희에 가감 없이 전해져 싱그럽기가 그지없다 했는데, 이 늪지의 최상위 포식자랄 수 있는 수달은 저보다 훨씬 강하게 그런 느낌을 가질 것 같습니다. 여기 섬진강이 수달의 서식지로 최고라 할 만한 것은 어족이 풍부하고, 하천주변 환경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데다 강변에 돌출한 바위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서라 합니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일직선의 잔디밭 강둑길을 걸으며 만난 분홍꽃이 반 쯤 핀 자귀나무를 가까이서 사진 찍었습니다. 십 분여 더 걸어 다다른 수달교(?)는 간문천을 건너는 현수교로 그 외관이 수달보다(?) 훨씬 날렵해 보였습니다. 물이 깊어 위험하니 물놀이를 하지 말라는 안내판이 간전초등학교장 명의로 세워진 것으로 보아 혹시 물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층이 주로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섬진강어류센터 안을 들어갔으나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관람을 포기하고 그냥 나와 간전교를 건너 동방천버스정류장에서 십 수분을 기다렸다가 구례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타 구례구역에 도착한 시각이 18시 반이 채 안되어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19시13분에 구례구역을 출발하는 용산행 기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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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에서 네 분의 고승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원효(元曉, 617-686) 대사와 의상(義湘, 625-702) 대사는 통합(統合)과 화쟁(和諍)을 몸소 실천한 신라의 고승입니다. 신라 불교이론의 특징은 통합(統合)과 화쟁(和諍)에 있다고 합니다. 육두품출신의 원효와 진골출신의 의상은 7세기에 이르러 분열적 시대상인 신분제 골품제와 신라, 고구려, 백제 사이에 전개된 삼국전쟁을 목격하면서 불교 사상 속에서 확보한 해법을 통합과 화쟁으로 압축하여 온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신라불교의 정점에 원효와 의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효는 일심사상에 입각한 화쟁사상으로 언어분열을 수습하고자 한데 비해, 의상은 화엄일승의 언어관에 의해 그 화쟁을 시도했다고 박태원교수는 그의 글 「신라의 화엄학」에서 밝혔는데, 아마도 이 점이 두 고승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선(道詵, 827-898) 국사는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나말여초의 고승입니다. 15세 때 화엄경의 대의를 통달한 도선은 5년 후인 846년에 화엄종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성격의 한계를 인식하고 선종으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도선은 옥룡사에 자리 잡기 전 지리산의 구령에 머물며 이인을 만나 구례현의 경계인 남해변에서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선대사의 풍수지리설이 유명해진 데는 고려 태조 왕건과 가깝게 지낸 것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백두대간의 개념이 최초로 사용된 문헌이 다름 아닌 도선국사의 「옥룡기」라는 것입니다.
진각(眞覺, 1178-1274) 국사는 고려 중반에 청정한 승풍회복과 본분이탈 출가자의 원위치 복귀를 위해 정혜결사운동을 벌인 지눌(知訥)의 제자 혜심(慧諶)입니다. 중심사상이 무심(無心)으로 알려진 혜심은 무심이라함은 마음을 허공처럼 비운 상태이지만 마음을 비우려는 생각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무심의 상태는 선도 악도 없는 백지와 같은 것이며, 사람의 성질도 그 밑바닥은 여기에 있으니, 무심이 곧 부처라는 것이 그의 저서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에 실려 있는 중심사상이라고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무심을 호로 삼아 쓰고 있는 이 교수의 혜안이 새삼 돋보입니다.
네 분의 고승을 만나 뵙도록 사성암 탐방을 안내한 이상훈 동문과 지질에 대한 궁금증을 그때마다 풀어준 원영환 동문에 감사의 뜻을 표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종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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