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걷기14
*종주구간:섬진강어류생태관-남도대교-항동버스정류장
*종주일자:2020. 6. 20일(토)
*종주코스:섬진강어류생태관-백운촌마을-남도대교-금직정-항동버스정류장
*종주시간:11시44분-17시2분(5시간18분)
*동행 :나 홀로
섬진강을 걸으며 많이 보아온 것은 정자(亭子)입니다. 갈 길이 여유롭지 못해 대다수의 정자는 사진만 찍고 그냥 지나쳤지만, 몇 곳에서는 쉬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길손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리는 곳에 정자를 세워놓은 분들의 안목에 감탄하고 또 고마워했습니다.
정자가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잘 모릅니다. 반상(班常) 구별이 명확한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지은 정자에 일반 상인(常人)들이 드나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상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었다 해도, 먹고 살기 힘든 그들이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명승지에 세워 놓은 정자들은 그림의 떡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정자가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은 아무리 빨라도 반상의 차별이 완전히 없어지고 자기 동네 앞을 지나는 길손들을 괴롭히는 못된 텃새가 사라진 한국전쟁 이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섬진강을 걸으면서 유서 깊은 정자들도 들렀습니다. 곡성과 멀지 않은 강선습지 인근에 세워진 횡탄정(橫灘亭)은 4백여 년 전에 세워진 이름난 정자입니다. 이런 정자들은 보통 사대부들이 지은 한시가 담긴 편액들이 걸려 있고, 정자의 내력을 소개하는 글이 실린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더러는 경북 평해의 월송정처럼 임금께서 손수 지어 내려주신 어시(御詩)가 걸려 있는 정자도 있습니다. 최근에 지어진 것이어서 편액이나 안내판은 없어도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리한 정자들도 꽤 있습니다. 지지체가 지어놓은 것일 수도 있고 그 고장 출신의 독지가가 지어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들른 구례의 금직정(錦織亭)이 그런 정자입니다. 제일 많은 것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지어놓은 수수한 정자들입니다. 이런 정자들을 지나노라면 먼저 와 쉬고 있는 주민들로부터 쉬어가라는 말씀을 듣기가 십상입니다. 모든 정자들이 개방되어 자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오늘에도 신을 벗고 올라가야하는 이름깨나 알려진 정자보다는 동리입구에 반듯하게 세워놓은 정자에서 쉬어가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은 족보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선조들께서 상인(常人)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번에 들른 금직정(錦織亭)은 구릉위에 자리해 바로 아래 섬진강이 잘 조망되고 바람도 살살 불어, 먼저 올라 와 앉아계신 동리 노인 두 분이 참으로 평안해 보였습니다. 잘 지은 육모정의 이 정자는 횡탄정(橫灘亭)처럼 유명하거나 오래된 것이 아니어서 편액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쉬어 가라는 두 분의 말씀에 고마워하면서 나들이 길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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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구례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인근 기사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11시20분에 터미널을 출발하는 효곡리행 군내버스에 올랐습니다. 섬진강하구 41Km전방 지점인 동방천버스정류장에서 하차, 섬진강 위에 놓인 간전교를 건넜습니다.
11시44분 간전교 건너에 자리한 섬진강어류생태관을 출발했습니다. 어류생태관 뒤편의 강둑길을 따라 10여분 동진해 861번도로에 합류했습니다. 오가는 차들이 많지 않은데다 가로수가 울창해 한 낮에 걷는 포장도로에서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전거길 무수내 쉼터를 지나자 강 건너로 정유재란(1597) 때 석주관성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왕득인(王得仁, 1556-1597) 등 7분의 순절열사를 모신 석주관칠의사묘(石柱關七義士墓)(?)가 보였습니다. 어류생태관 출발 1시간이 조금 지나 장수촌인 백운천마을을 지났습니다. 이내 다다른 자전거 길 백운천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차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진행하다가 섬진강을 조망하자, 강 건너로 연곡교가 보였습니다. 백운천 쉼터에서 남도대교로 가는 길에 벚나무(?)에 기생하는 진황색의 버섯과 진황색의 기와만 멀쩡한 폐옥을 사진 찍었습니다. 기생을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해가는 이름 모를 버섯과 터를 잘 못 잡아 주인이 떠나버리자 길가에 버려진 폐가를 생각하면서 버섯도 폐옥도 모두 이 모진 세상을 용케도 잘 견뎌내고 있다 싶었습니다.
백운천 쉼터 건너편의 연곡교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 6년 전 반야봉을 올랐다가 피앗골로 하산해 지났던 연곡사에 이르게 됩니다. 이 절은 조선중기의 문인인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이 1621년에 창작한 한문소설 『최척전』의 주인공 최척과 부인 옥영이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을 피해 일시 머물렀던 곳입니다. 『최척전』은 방송대 국문과 교재에 실린 번역본을 읽은 바 있어 연곡교를 보자 바로 연곡사가 생각났고, 그 생각은 소설 『최척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소설 『최척전』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고발한 보기 드문 포로문학입니다. 갖은 간난 끝에 결혼한 최척과 옥영은 정유재란 중 이별의 아픔을 겪습니다. 왜병의 포로로 일본에 잡혀간 옥영이 죽었다고 믿은 최척은 명장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안남을 내왕하다 우연히 옥영을 만나 아들 몽선을 낳고, 몽선은 장성해 진위경의 딸 홍도를 아내로 맞습니다. 명군으로 출전해 청군의 포로가 된 최척은 역시 청군의 포로가 된 맏아들 아들 몽석을 극적으로 만납니다. 부자는 수용소를 탈출해 고향으로 향하던 중 몽선의 장인인 진위경을 만납니다. 옥영 역시 몽선과 홍도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최척 부자를 다시 만나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대략의 줄거리입니다. 아래 글은 최척 부부가 연곡사에 머무르게 된 사연을 적은 것입니다.
정유년 8월이었다. 왜적이 남원고을로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켰다.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 산속으로 피란했다. 최척의 가족들도 지리산 연곡사 깊숙이 피란했다. 난리통이라 인심이 흉흉했다. 어디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몰랐다. 최척은 옥영더러 남장을 하라고 일렀다. 남복을 입으니 아무도 여자인 줄 짐작도 못했다.
13시49분 화개장터로 이어지는 남도대교에 다다랐습니다. 하동의 화개와 광양의 하천리를 이어주는 남도대교는 다리 양쪽의 아취부분이 각각 연청색과 진황색으로 도색되어 먼 데서도 확 눈에 띄었습니다. 남도대교를 막 지나 섬진강이 지나가는 전라도의 9개 자치단체 중 마지막 광양시에 들어섰습니다. 구례군의 간전면에서 광양시의 다압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는 경계에서 조금 더 가자, 섬진강자전거길이 끝나는 배알도수변공원까지 35km 남았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습니다. 구례에서 광양으로 접어들면서 861번 도로의 가로수가 하늘을 가리지 못해 내리쬐는 땡볕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강 건너 수변은 화개장터가 가까워지면서 모래사장이 넓게 형성되어 볼만 했습니다. 염창마을 지나자마자 자전거 길이 861번 차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 매실 밭 사이로 나 있는 덕분에 잘 익은 노란 매실이 주저리주저리 열려 있는 매화나무를 아주 가까이에서 사진 찍을 수 있었습니다. 14시43분에 도착한 솔밭 쉼터에서 강 한 가운데 사구가 넓게 형성된 것을 보고 하구가 멀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5시18분 금직정에서 섬진강을 조망했습니다. 솔밭 쉼터에서 861번 도로와 합류한 자전거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어 매각버스정류장에 이르렀습니다. 매각마을 안내판에는 매천 황현 선생이 중건문을 썼다는 감호정(鑑湖亭) 정자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으나 차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들르지 못했습니다. 매각마을을 지나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흐린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이 쾌청해 몇 분만 땡볕 길을 걸으면 지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옥녀봉의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에 해당하는 지역이라는 데서 이름 지어진 직금(織錦) 버스정류장을 지나 금직정에 이르렀습니다. 백운산의 4대 계곡 중의 하나인 금천계곡이 섬진강과 만나는 합수점에 조성한 작은 공원쉼터에 자리한 금직정에서 조망되는 지리산은 해발1,115m의 형제봉입니다. 평촌마을 지나 얼마간 땡볕 길을 걷다가 16시가 조금 못되어 다다른 섬진강매화로길 편의점에서 시원한 음료를 사들며 더위를 식혔습니다.
17시2분 항동버스정류장에서 14번째 섬진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편의점에서 남진해 죽천마을을 지나자 강 건너 하동 쪽으로 펼쳐지는 모래사장과 강둑길이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박경리선생의 역작인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를 뒤로 하고 남해로 내닫는 섬진강에 바짝 붙여 낸 자전거 길을 따라가느라 얼마간은 861번도로에서 벗어나 걸었고, 그 덕분에 강 건너 평사리공원의 빼어난 정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861번 도로로 복귀하기 바로 전에 만난 60대의 두 남자 분은 나이 들어 건강이 나빠져 귀향해 요양한 지가 10년 안팎이라며 그새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이 분들에 버스시간을 확인한 후 항동버스정ꥶᅲ장으로 자리를 옮겨 20분 가량 기다렸다가 하동과 화개장터를 오가는 버스에 올라 화개장터로 향했습니다.
화개장터는 버스를 타고 몇 번 지난 적이 있지만 차에서 내려 땅을 밟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악양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에 장이 서는 화개장터는 행정구역상 경남하동군에 속합니다. 광양 쪽에서 바라봤던 악양교는 가까이에서 다시 보니 꽤 커보였습니다. 다리 아래에서 물장난을 하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을 보고 도시에서 감지할 수 없는 풋풋한 건강미가 느껴졌습니다. 구례시외버스터미널을 거쳐 구례구역에 도착해 십수분을 기다렸다가 용산행 기차에 오른 시각이 19시13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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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이다 아스만은 명저 『기억의 공간』에서 ’기술‘로서의 기억은 저장한 만큼 인출해내는 기억으로 시간이 배제되나, ’활력‘에서의 기억은 저장과 인출에 시간이 개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되면 기억의 저장과 인출은 같아질 수 없는데, 회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회상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항상 현재에서 출발합니다. 저장된 기억을 시간이 지난 후 현재의 입장에서 인출하는 회상에는 기억을 보관하거나 운반하는 기억매체가 필요하게 됩니다.
아스만은 기억의 매체로 문자, 그림, 몸과 장소를 들었습니다. 명문가에는 문집이 기억의 매체일 수 있듯이 음풍영월을 즐기는 사대부들에는 정자가 기억의 매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서 깊은 정자들은 위치한 장소부터 달라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개는 한시를 적어놓은 편액(扁額)들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문자와 장소가 기억의 매체로 작동된 것이 정자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편액과 명승지가 조선 시대 정자들의 구성요소였기 때문입니다.
<걷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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