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문산천 따라 걷기

문산천 따라 걷기1(턱골통일사격장-마장호수-광탄교)

시인마뇽 2020. 11. 15. 18:51

*탐방구간 : 턱골통일사격장-마장호수-광탄교

*탐방일자 : 2020. 10. 31()

*탐방코스 : 텃골통일사격장-기산저수지-마장저수지-보광천합수점

                -마장교-창만3리사거리-비암천합수점-광탄교

*탐방시간 : 112-1657(5시간55)

*동행      : 나 홀로

 

 

 

  제가 중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에는 반공영화가 많이 상영되었습니다. 영화 두고 온 산하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아카시아 꽃이 질 때등과 함께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그 제목이 기억날 정도로 인기리에 상영된 반공영화였습니다. 당시 스크린을 누비던 허장강, 김승호, 김지미, 김진규와 이예춘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 두고 온 산하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한 19623월에 개봉된 전쟁영화입니다. “한국전쟁 중 흥남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고문관의 딸과 한국반공청년간의 국경을 초월한 로맨스를 통하여 소련군의 비인도적 만행과 자유를 갈구하는 북한 동포들의 처절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반공군사물로 인터넷에 소개된 이 영화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가족을 남겨두고 남한으로 월남한 이산가족들이 북한에 두고 온 산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이 영화제목이 잘 함축하고 있어서입니다.

 

  제 고향 경기도 파주는 지금 살고 있는 군포와 멀지 않은 데다 선산이 있고 형님이 살고 계셔 한 해에 여섯 일곱 번은 찾아가곤 합니다. 고향 땅 파주는 북한에서 넘어온 월남가족들이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두고 온 산하는 아닙니다. 생각나면 언제고 찾아갈 수 있어 고향 땅 파주의 산하에 대한 저의 그리움이 북한 땅에 두고 온 산하를 돌아보고 싶은 이산가족들의 간절함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간 파주의 웬만한 산들은 거의 다 올랐습니다. 한북정맥과 여기서 분기된 오두지맥, 감악지맥, 그리고 이 지맥들에서 갈라진 단맥들을 종주하면서 감악산, 고령산, 파평산, 비학산, 월롱산, 박달산, 금병산, 봉서산 등 파주의 명산들을 두루 올랐습니다. 파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임진강도 한강과의 합수점인 오두산통일전망대 앞에서 연천의 군남댐에 이르는 남한 땅의 임진강 강줄기를 다 따라 걸어 파주의 산하는 곳곳을 찾아 걸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파주의 산하를 마저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작년에 임진강 천변에 낸 평화누리길을 걷고 나서입니다. 아직도 걸어보지 못한 파주의 산하는 하천입니다. 임진강의 제1지류인 문산천과 한강의 제1지류인 곡릉천, 그리고 제1지류에 합류하는 비암천, 감곡천, 설마천, 만우천, 신천, 탄포천 등 여러 하천의 천변길입니다. 제가 자란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하천은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문산천의 제1지류인 비암천이고, 그 다음은 20분가량 더 걸어가면 다다를 수 있는 문산천의 본류입니다. 문산천(汶山川)이란 경기도의 파주 광탄과 양주 백석을 가르는 꾀꼬리봉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임진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유로연장은 30Km에 달합니다. 광탄천, 문산개, 너분여울로도 불리는 문산천은 동쪽으로 신천유역, 서남쪽으로 탄포천과 곡릉천유역, 북쪽으로 임진강 유역과 접해 있습니다.

 

  어제는 큰 맘 먹고 문산천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 두 해전 세상을 뜨신 작은형수님의 기제사에 참석하기위해 고향의 형님댁으로 가는 길에 문산천을 따라 걷고자 발원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오전 1010분 지축역을 출발하는 양주역 행 15-1번 공영버스를 타고가다 기산저수지 초입의 군부대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한강오두지맥이 지나는 해발425m의 꾀꼬리봉 아래 발원지를 찾고자 턱골로 들어선지 4-5분이 지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군부대의 통일사격장 앞에 이르렀습니다. 발원지를 찾아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문산천의 최상류인 바로 옆 계곡을 사진 찍은 후 이 지점에서 문산천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오전 112분 턱골 통일사격장을 출발했습니다. 통일사격장에서 버스에서 내린 군부대 앞으로 되돌아가 39번 도로를 따라 십 수분 간 북진했습니다. 기산저수지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98번 도로로 접어든 후 기산저수지를 왼쪽에 끼고 마장저수지를 향해 서진했습니다. 도로 변에 자리한 나무들은 단풍이 들어 왼쪽 아래 기산저수지의 정경과 잘 어울렸습니다. 왼쪽으로 산림청 국립아세안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 직진해 문산천1호교를 건너자 양주마장호수둘레길을 안내하는 지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마장호수는 핵심시설인 댐과 출렁다리가 파주 땅에 자리한 광탄의 관광명소로 이 호수의 일부만이 양주 땅에 속해 있습니다. 문산천1호교를 건너 천변에 세워진 데크길을 걸었습니다. 문산천을 가득 덮은 잡초들도 가을 색이 물들기 시작해 전체적으로 녹황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기산요양원등 7개소의 요양원들이 98번 도로에서 왼쪽 안으로 조금 떨어진 안골에 모여 있는 것은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청정지역이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1219분 제 고향 파주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안골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공사 중인 다리를 건넜습니다. 곧 바로 데크 길을 따라 걸어 파주의 광탄읍에 발을 들이자 파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안내판이 저를 반겼습니다. 천변 길을 따라 걷다가 출렁다리와 팔일봉이 한눈에 잡히는 벤치에 앉아 점심을 들면서 마장호수의 풍광을 완상했습니다. 해발602m의 앵무봉, 559m의 계명산, 409m의 팔일봉, 369m의 박달산, 293m의 금병산 등 파주 광탄의 명산 중에서 1983년에 양주시에서 파주시로 편입된 산은 바로 앞에 보이는 팔일봉과 뒤편의 고령산 및 계명산입니다. 2010년에야 비로소 팔일봉의 정상에 오른 것은 그 전에는 이 산의 이름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팔일봉의 산자락을 울긋불긋 물들인 단풍들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바로 아래 잔잔하게 물결이 이는 마장호수가 이 산을 받쳐주는 덕분입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출렁다리로 마장호수를 건너면서 간간히 이 호수의 그림 같은 풍광을 눈에 담아 왔습니다. 다리를 건너 팔일봉 산 아랫길인 데크로드를 걸었습니다. 댐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내려가 감사교육원입구 삼거리에서 98번 도로에 합류한 시각이 1332분이었습니다.

 

  1421분 보광천이 합류하는 영장교를 건넜습니다. 출렁다리를 건너려는 관광객들로 차들이 몰려 감사교육원 입구 삼거리에서 가산리로 이어지는 98번 도로가 혼잡했습니다. 제가 진행하는 98번 도로는 마장저수지와는 반대쪽으로 이어져 이내 정체가 풀리고 한가해졌습니다. 길가 밭에 버려진 여러 포기의 배추들은 밭 한 구석에 자리한 슬레이트 지붕의 폐가와 누가 더 쓸쓸한 가를 내기하는 것 같았는데, 이들을 바라다보는 제 마음도 쓸쓸하기는 한가지였습니다. 오른 쪽으로 송추CC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직진해 영장2교를 건넜습니다. 하천 건너 텐트촌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것은 성수기인 지난여름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려움은 겪지 않았는 가였습니다. 남쪽으로 367번 도로가 갈리는 영장보건지료소 앞 삼거리에 이르러 오른 쪽 13번 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몇 십m를 지나 보광사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보광천과의 합수점에 놓인 영장교를 건넜습니다. 1987년 이전에는 이 다리를 건너서부터가 광탄 땅이었습니다. 이 다리에서 조선의 21대 국왕인 영조의 친모 최숙빈이 묻혀 있는 소령원까지는 걸어서 십 수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소령원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여러 번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169분 창만3리사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영장교를 건너자마자 13번 도로를 걷는 대신 문산천의 제방에 낸 천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고향 땅인데도 영장교에서 마장교에 이르는 2Km 남짓한 천변길을 걸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성노인요양센터를 지나 거목의 느티나무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카페 산내들 앞에 이르자 박달산이 바로 눈앞에 보였습니다. 해발369m의 박달산이 남동쪽으로 높이 보이는 해발 622m의 앵무봉에 높이로야 비할 수 없지만, 자연학습을 겸할 수 있도록 등산로를 정비하고 쉼터도 만들어 놓는 등 쾌적한 산림욕장으로 조성한데다 산세가 완만해 가족과 함께 등산하기에는 앵무봉보다 훨씬 적합한 산입니다. 이 산의 이름 박달산은 조선조 숙종 때 권대련이 중국어학습서인 박통사언해를 이 산에서 숙달하였다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유일전자 공장을 지나 유일2교를 건너 가보았지만 유일레저타운은 높게 친 펜스가 가로막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산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진위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광탄읍내로 길이 갈리는 마장교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진행해 복월교를 지난 후 20여분을 더 걸어 창만3리사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10분을 채 못 걸어 다다른 창만협동교에서  20분가량 직진하면 제가 태어난 창만4리의 형님 댁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1657분 광탄교에 도착해 문산천의 1구간 탐방을 마쳤습니다. 25분가량 걸리는 창만협동교에서 만장교까지의 천변 길도 이번에 처음 걸었습니다. 창만협동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 쪽으로 꺾어 펜스를 높게 쳐 안이 보이지 않는 태승토건의 하적장(?)을 지나자마자 창만협동교의 전신을 사진을 찍은 것은 이 다리에 얽힌 옛 일이 생각나서였습니다. 북동쪽의 우뚝 솟은 봉우리는 해발293m의 금병산으로, 저의 첫 모교인 도마산초교의 뒷산입니다. 하나엔지리어링의 오른 쪽 아래 보()는 처음 축조된 것이 1961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보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비암천과의 합수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합수점에서 세를 불린 문산천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흘러내려갑니다. 만장교에서 이번 탐방의 끝점인 광탄교까지는 지난2월 구정 때 한 번 걸은 길이어서 물 한가운데서 쉬고 있는 백로와 청둥오리도 눈에 익은 듯 했습니다. 일직선의 제방 길을 걸어 다다다른 광탄교 앞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리 건너 정류장에서 20분 가까이 기다려 창만4리 형님댁으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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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천 1구간에는 이런저런 추억이 깃 들여 있는 곳이 여럿 있습니다. 이 참에 기록해두고 싶은 추억은 56년 전 창만협동교 아래 문산천을 건넌 일입니다. 당시에는 물론 다리가 놓여있지 않아 신을 벗고 건너야 했습니다. 196412월 이른 새벽에 캄캄한 밤에 서울의 경동고교로 입학시험을 보러 가고자 창만4리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광탄 시내는 집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고, 가는 길 중간에 문산천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날따라 살얼음이 살짝 얼고 얼음판 위에 싸락눈이 조금 내려 살얼음을 깨고 맨발로 문산천을 건넜습니다. 광탄에서 서울 가는 첫 시외버스를 타고 가 종점인 서울역에서 하차했습니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가다 대광고교 앞에서 내려 시험장인 경동고교까지 1.5Km 가량을 정신없이 내달렸습니다. 제가 시계를 찬 것은 대학교 3학년 때부터로 당시에는 시계가 없어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래서 들입다 내달리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수험장인 경동고교에 도착해 자리를 찾아 앉아 숨을 고르고 나자 바로 감독관 선생님이 들어와 시험지를 배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것은 5분만 늦었어도 시험을 못 치렀을 것이고, 그랬다면 고교진학은 못했을 것이며,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생활하기에 바빠 오늘처럼 지식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해서였습니다.

 

  1960대 초반의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얼마나 작았는가를 알려주는 일화가 새삼 생각난 것도 고향 길을 걸어서였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1961년 장면총리는 하나엔지리어링 아래 설치된 보의 준공식에 참석했었습니다. 한 나라의 총리가 저런 작은 보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는 우리나라 경제수준이 형편없어 그리했을 것입니다. 앞서 지나온 마장교 인근에 마분지공장이 세워진 것은 1962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박정희 의장도 이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치사를 했습니다.

 

  탐방 길의 현장은 기억을 이끌고, 기억은 아름다운 모습의 추억으로 쌓여갑니다. 더 이상 쌓아갈 수 없을 때, 소중한 추억은 덜어내어 탐방기로 남기고자 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