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애룡교-연풍3교-갈곡천/문산천 합류점
*탐방일자: 2023. 9. 29일(목)
*탐방코스: 삼방교-애룡저수지-파주제일교회-연풍3교-부곡교-봉암교
-갈곡천/문산천 합류점-봉암교-파주역
*탐방시간: 11시11분-14시53분(3시간42분)
*동행 : 나 홀로
이번에 갈곡천을 따라 걸은 두 번째 구간은 파주읍 연풍리의 애룡교에서 문산천에 합류되는 파주읍 봉암리의 봉암교까지입니다.
제가 고향땅 파주에서 성묘를 끝내고 갈곡천의 2구간을 따라 걸은 것은 인근에 돌아볼만한 경승지나 유적지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 구간 인근에 가볼 만한 경승지라고는 애룡교에서 멀지않은 애룡저수지가 거의 유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구간을 걸은 것은 갈곡천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추억의 공간인 파주 땅을 흘러 그리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3년 봄에 5일장이 열리는 법원리로 장보러 가는 부모님을 따라 걸어서 넘었던 33번지방도의 삼방리 고개를 이번에는 차를 타고 넘었습니다. . 70년 전 이 고개를 넘은 것은 제가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일로, 이 기억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 나이 여섯 살(만나이로는 5세) 때의 일을 76세의 오늘까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몇 번이고 물어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어서입니다. 파주시광탄읍의 창만리 집에서 광탄읍과 법원읍을 경계 짓는 삼방고개를 넘어 5일장이 열리는 법원리까지 거리가 약 8Km 정도 되어 여섯 살에 걸어서 왕복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때 힘들었다는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부모님 손을 잡고 먼 길을 나서 즐거워한 일만 기억나는 것은 그 후 가난했던 부모님께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에도 벅차 두 분이 함께 저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녀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 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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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한테 부탁해 애룡저수지 상류의 삼방교까지 승용차로 이동했습니다. 70년 전 부모님 손을 잡고 걸어 넘은 고개를 이번에는 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와 같이 차를 타고 넘었습니다. 앞으로 70년 후 손자가 이 일을 기억하리라 기대하면서 갈곡천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11시11분 삼방교를 출발했습니다. 삼방천 상류에 놓인 삼방교에서 애룡저수지를 사진 찍은 후 애룡저수지의 우안길로 들어섰습니다. 동서로 뻗은 타원형의 애룡저수지는 규모가 작아 아담해보였습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호반 길을 걸으며 느낀 것은 추석날이어서인지 생각보다 오가는 차량이 적어 호젓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왔다면 커피 테라스 등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쉬어갔을 텐데 혼자여서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애룡저수지는 저도 이번이 초행길로, 2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집사람과는 한 번도 와보지 못했습니다. 길가에 시(詩)를 담은 사진들이 여러 개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야, 이 길이 원송문학회에서 조성한 “애룡저수지 파주문학의 거리”임을 알았습니다.
11시48분 애룡교를 출발해 갈곡천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애룡저수지를 지나 삼방천과 갈곡천의 합류점 위에 놓인 애룡교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부터 따라 걸을 하천은 법원읍 갈곡리의 노고산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흘러내려가 파주읍봉암리에서 문산천으로 합류되는 갈곡천입니다. 삼방천과 갈곡천이 합류되는 여기 애월교는 갈곡천의 중간지점으로, 이번에는 이 하천의 끝점인 문산천 합류점을 향해 걷고, 다음 번에 노고산 발원지에서 여기 애월교까지 걸어볼 생각입니다. 애월교에서 갈곡천 좌안 길을 따라 걸으며 하천에서 백로 한 마리가 여유롭게 노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쪽으로 진행해 에코하임아파트단지를 지나는 갈곡천 좌안에 제 키보다 높게 담벽을 설치해 하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용주골과 대추벌을 이어주는 연풍교를 건너지 않고 다리 앞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대추벌의 집창촌지대를 지났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양공주라 불리는 위안부들은 미군들과 살림을 차려 다리 건너 용주골에서 살았고, 한국인을 상대로 손님을 받는 위안부들은 대추벌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군이 주둔했던 호시절에는 용주골은 흥청망청할 만큼 돈이 잘 도는 도시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재배한 채소를 시오리 가량 떨어진 용주골에다 내다 판 돈으로 대학을 다녔습니다. 저도 시골집에서 방학을 보낼 때는 용주골로 걸어가서 학생들을 가르쳐 등록금을 마련하는데 보태곤 했습니다. 제가 집안형편이 넉넉지 못했는데도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고향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용주골이라는 집창촌이 생긴 덕분이었습니다. 이번에 지난 집창촌은 추석날이어서인지 조용했고, 호객행위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집창촌이다 싶은 용주골(대추벌)에는 미군들이 주둔하지 않아 이제는 양공주라 불린 위안부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집창촌 건물에 “정화위원회”표지가 붙어 있고, 하천 건너 용주골 쪽에 “집, 생계비, 학원비 드립니다. 나오세요.”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 대추벌의 집창촌도 머지않아 철거될 것 같습니다.
12시24분 연풍3교를 건넜습니다. 집창촌을 조금 지나 다다른 연풍3교를 건너 갈곡천 우안길로 접어든 것은 갈곡천 좌안으로 길이 끊겨 있어서였습니다. 어인 일인지 이 다리부터 부곡교까지 다리 이름이 적힌 동판이 모두 제거되어 카카오맵으로 다리 이름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갈곡천 우안길에 조성한 쉼터에서 20분 가까이 쉬면서 생각한 것은 제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야말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규모 하천에도 제방 길을 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 나라를 자유민주국가로 세운 이승만 대통령과 부국으로 키운 박정희 대통령이 고마웠고, 저를 질곡의 북한이 아닌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낳아준 부모님이 새삼 고마웠습니다.
13시25분 부곡교를 건넜습니다. 들판을 가득 채운 고개 숙인 벼들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죽어라고 공부해 고향을 떠나 대처에서 살아온 저이지만, 제 몸속에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피가 흘러 지금도 몹시 가물거나 큰비가 내리면 시골 형님께 전화를 해 괜찮으냐고 묻곤 합니다. 그러기에 쌀값이 비싸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그런 것도 제 세대가 마지막인 듯싶습니다. 4년 전에 올랐던 봉서산을 바라보며 서진하다가 부곡교를 건너 다시 미래산업이 자리한 좌안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제방 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젖소를 기르는 꽤 큰 규모의 목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목장이 갈곡천을 오염시키지 않나 싶어 하천 물을 보았는데 하천이 오염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환경오염이 더해진다고 말하는데 제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은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고향의 축산농가에서 축산폐수를 하천에 바로 방류하는 것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환경오염을 꾸준히 줄여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국민소득이 꾸준히 늘어나 필요한 재원을 어려움 없이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4시36분 문산천/갈곡천 합류점에 다다랐습니다. 부곡교를 지나 자유로가 지나는 봉암교 밑에 이르자 길이 끊겨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갓진 길가에 고추를 널어 말리는 한 노인분과 인사를 나누고 무지개모양을 한 붉은 색의 다리를 건너자 문산천으로 이어지는 갈곡천 우안의 제방길이 보였습니다. 전철 경의선과 자유로에 놓인 두 다리를 밑으로 지나자 저만치에 3년 전 문산천을 따라 걸을 때 지났던 파주에너지서비스건물이 보였습니다. 거의 직선에 가까운 제방길을 걷는 동안 해를 가릴 만한 그늘진 곳이 없어 목덜미가 따가웠습니다. 이번 걷기에서 만난 마지막 다리인 봉암교를 건너 갈곡천/문산천 합류점으로 다가가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약10Km에 달하는 갈곡천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14시53분 파주역에 도착해 이촌행 전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다시 봉암교를 건너 간 길로 되돌아오는 길에 멀지만 뚜렷하게 보이는 북한산의 삼각봉(백운대, 인수봉, 만경봉)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직선거리로 30Km는 족히 떨어진 북한산을 문산 근처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제껏 생각 못했는데, 요 며칠 내린 비로 공기가 맑아져 생각보다 훨씬 가깝게 보였 습니다. 파주역에 도착해 이내 도착한 전철로 귀가하면서 이번에 못 걸은 남은 구간의 탐방계획을 세우느라 머릿속이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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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겨울철이면 미군들이 저희 동네 야산으로 훈련을 나오곤 했습니다. 미군들이 훈련을 나오면 위안부들인 소위 양공주들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훈련 나온 미군들은 동네로 내려와 처녀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군보다 형편이 많이 안 좋은 터키군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위안부들이 따라오지 않아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처녀들을 찾으려고 민가를 뒤지곤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작은 누님을 벽장 속에 숨겨 화를 면한 일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 위안부로 일한 여성들은 대부분이 집안이 가난한 농촌의 처녀들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위안부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위안부들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강제로 끌고 갔다고 얘기하지만, 속사정은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부모들이 한 사람 몫이라도 입을 덜고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동의해 팔려갔을지도 모릅니다. 해방 후 자유로운 국가가 세워졌는데도 미군들에 빌붙어 살아야하는 양공주들이 계속 양산된 것도 그 때는 우리 부모들이 못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 갈곡천을 따라 걸으며 생각을 굳힌 것은 국가가 부유해져야 환경보전과 인권보호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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