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평화누리길 탐방기

평화누리길 탐방기27(서흥1리정류장-원통체육관-원통버스터미널)

시인마뇽 2020. 12. 20. 14:39

*탐방구간 : 서흥1리정류장-원통체육관-원통버스터미널

*탐방일자 : 2020. 11. 13()

*탐방구간 : 서흥1리정류장-풍전교-대터교-원통체육관-서호아파트-원통버스터미널

*탐방시간 : 945-1710(7시간25)

*동행      : 문산중 황홍기/황규직 동문

 

 

  인제(麟蹄)하면 떠오르는 문인은 시인 박인환(朴寅煥, 1926-1956)입니다. 한 때 이 시인의 작품 목마와 숙녀에 매료되어 일기장에 적어 넣기도 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언제라도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읽었습니다.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태어난 박인환은 1936년 서울로 이사를 갑니다. 1939년 전국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후 자퇴하고 3년 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합니다. 박인환이 서울로 상경한 것은 8.15 광복 후로, 다니던 평양의전을 자퇴하고 나서입니다. 서울에서 김광균(金光均), 김수영(金洙暎), 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은 박인환은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며, 1950년에는 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모임인 후반기(後半紀)’를 만들어 모더니즘운동을 벌입니다. 박인환의 시작(詩作)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그의 대표작은 1950년 후반기에 발표한 목마와 숙녀라는 것이 변함없는 제 생각입니다. 1949년 김수영 등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내는데, 이는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만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박인환의 시가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창작한 시 세월이 가면1970년 포크송(?) 가수 박인희님이 노래 불러 히트를 치고 나서입니다. 이 노래는 명동의 신사 박인환이 즉석에서 지은 시를 받아 이진섭이 작곡한 후 가수 나애심에게 곡을 주어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 널리 불린 것은 14년이 지난 1970년이 되어서니 시인 박인환의 호흡이 참으로 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음유가객 박인희님에 감사하는 것은 대표작 목마와 숙녀를 음악을 곁들여 낭송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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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945분 서흥1리정류장 인근의 서흥1리 용늪마을의 논장교에서 평화누리길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910분에 원통을 출발하는 서화행 버스를 타고가 논장교를 막 건너 서흥1리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논장교를 다시 건너 '원통18.8Km/양구17.8Km'의 표지목과 용늪마을의 표지석이 함께 서 있는 뒷골로도 불리는 서흥1리 용늪마을을 출발해 산 밑으로 흐르는 인북천을 따라 낸 제방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길가의 새빨간 산수유 열매가 쭈글쭈글해진 것을 보고 풍찬노숙(風餐露宿)이 힘들기는 열매들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천건너 산 밑에 물 흐름과 나란한 방향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하천 물을 논밭에 끌어올리는데 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아취형의 섶다리를 건너 난간이 떨어져나가 차량의 진입을 막은 무쇠점교를 건너갔다 되돌아 온 것은 시멘트 수로에 과연 물이 흐르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빠른 속도로 많은 물이 콸콸 흘러내려가 인근 마을에서는 이 물만으로도 농사를 짓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무잠점교를 지난 지 십 수분 후에 산자락의 절벽에 낸 시멘트블록의 잔교(棧橋)를 지나면서 아슬아슬한 느낌이 든 것은 난간이 없어 혹시라도 발을 잘못 내딛다가는 저 아래 인북천으로 추락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자전거 통행이 금지된 잔교를 무사히 통과한 후 새로 놓은 무쇠점교를 밑으로 지나자 산 아래 암벽에 바짝 붙어 흐르는 진초록의 인북천이 냉랭해 보였습니다. 바람이 그려놓은 천변의 잔잔한 모래물결을 사진 찍으면서 저 정도의 작품을 빚어내려면 바람도 엄청 성질을 죽였겠다 했습니다. 사천교 인근의 파란 양철지붕이 이 외딴 집을 지키는 견공 흰둥이의 털 색깔과 절묘하게 대비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천교를 건너 원통 전방 16.1Km 지점의 천변 길로 들어선 시각은 1038분입니다.

 

 

  1113분 풍전교를 건넜습니다. 사천교를 건너 걸은 제방 길은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정부에서 설치한 철조망펜스가 나란히 쳐져 있어 인북천의 풍광을 사진 찍기가 참으로 불편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정 간격으로 해달은 출입문을 자물쇠로 잠가 놓지 않아 잠시 열어 사진을 찍고 다시 닫아둘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산 밑으로 낸 평화누리길은 물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습니다. 반가운 것은 평화누리길 조성공사 현장을 만나 본 것입니다. 월학리풍전교-백마천 구간의 인제군접경권평화누리길 조성공사가 지난930일에 시작해 내년 630일에 끝내는 것으로 일정이 공고된 것으로 보아 지난여름 홍수로 기존의 길이 떨어져나가 이참에 제대로 된 평화누리길을 조성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공사현장을 지나 다다른 풍전교에도 앞서 본 것과 같은 평화누리길조성 안내판이 서 있었습니다. 풍전교를 지난 후 얼마간 더 걸어 데크길로 들어섰습니다. 보를 막아 모인 물이 바람에 물결치는 것을 보고 바람이 일궈내는 파상(波狀)은 그 매질이 모래냐 물이냐에 따라서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원통 전방 13km 지점을 지나 구미교를 십 수m 남긴 지점에 세워진 정자에서 점심식사를 시작한 시각은 1141분입니다.

 

 

  139분 대터교를 지났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바로 옆 구미교를 건너 오른 쪽 천변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전파 차단용 철조망펜스가 높이 쳐 있어 시멘트로 포장된 천변 길을 걷는 동안 내내 답답했습니다. 453번 도로변의 현대식 3층 건물은 언뜻 보면 학교인 것 같은데 군부대 막사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70년간 이룩한 경제적 부가 우리 국군이 군 생활을 저토록 쾌적한 시설에서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싶어 가슴 뿌듯했습니다. 을지신병교육대를 지나 원통11Km전방 지점에서 폭이 좁은 자전거 전용(?) 다리로 이 지역에서는 냇강으로 불리는 인북천을 건넜습니다. 길가에 열린 주황색의 열매가 오디의 일종인 구찌뽕이라는 것은 일행이 가르쳐줘 처음 알았습니다. 대터교를 지나자 뭍에 매어놓은 작은 배 성상3가 눈에 띄었는데, 이 배는 수심이 얕은 그 아래 보에 띄우기에 알맞아 보일만큼 작았습니다. 대터교에서 인북천을 따라 남진하는 중 하천 건너로 대상레미콘공장이 보였습니다. 도리촌을 지나 익살스러운 모습의 장승을 만나 사진을 찍은 후 월학1리 냇강마을의 안내판을 지나 소재교를 건넌 시각은 1350분입니다.

 

 

  1523분 원통체육관을 지났습니다. 소재교를 건너 평화누리길 자전거도로는 453번도로로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오른 쪽의 천변길로 들어섰습니다. 몇 분을 안 걸어 다다른 냇강체험관 마당에서 잠시 쉬면서 땅 바닥에 전시된 뗏목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전시된 뗏목은 길이 3-4m 가량의 통나무 9개를 평평하게 묶어 놓았고, 이 묶음 다섯 개를 한 줄로 이어 땅바닥에 놓은 것으로, 특이한 것은 세 번째 묶음에 짚으로 움막을 지어 놓은 것인데 이곳이 숙소이자 부엌으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냇강체험관에서 천변 길을 따라 얼마간 걷자 다리를 놓는 공사가 진행 중으로, 산 밑으로 길이 이어지지 않고 인북천을 건너는 다리도 없어 별수 없이 왼쪽 위로 올라가 453번 도로에 합류했습니다. 고갯마루에 이르기 얼마 전 오른 아래로 나있는 길에 표지리본이 걸려 있어 그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길가에 놓은 벌통 주위를 벌들이 윙윙대며 날아다녀 신경이 쓰였는데 더 이상 아래 쪽으로 길이 나 있지 않고 표지리본은 길이 나 있지 않은 산속으로 길을 안내해 포기하고 되올라가느라 반시간 가까이 지체됐습니다. 453번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 원통체육관 앞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왼쪽 아래로 이어가는 453번도로 대신 오른 쪽 길로 내려가 고미재팬션 앞에 이르러 인북천과 다시 만났습니다. 팬션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인북천을 따라 남진했습니다. 고미사리마을(?)을 지나며 만난 거목의 소나무에 눈길을 준 것은 저만한 크기의 소나무라면 능히 이 마을을 지켜줄 것 같아서였습니다. 인북천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흘러내려가 평화누리길은 다시 산길로 이어졌습니다. 군부대우체국을 지나 서호아파트를 지난 시각은 1615분입니다.

 

 

  1710분 원통버스터미널에 도착해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서호아파트에서 왼쪽으로 꺾어 천변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서호교를 지나 넓은 차도를 따라 걸으면서 오른 쪽 아래 하천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제가 물 흐름에 역행해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천이 인북천이라면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마땅한데 표지목과 리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제대로 걷고 있는데도 여전히 물 흐름을 거슬러 진행하는 상황이 납득되지 않아 내내 답답했습니다. 오른 쪽으로 갈말 길이 가리는 사거리에서 육교를 건너 왼쪽 원통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두 번의 알바에도 어둡기 전에 이번 탐방의 끝점인 원통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길을 잘 모르는 외지에서 밤길을 걷는 무리한 일을 피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원통지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다수 발생해 예정했던 저녁식사를 취소하고 곧 바로 1720분 발 동서울터미널 행 버스에 올라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5만분의 1의 종이지도와 카카오맵으로 이번에 걸은 길을 꼼꼼히 보았습니다. 용대리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이 서호아파트 인근에서 인북천에 합류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서호아파트에서 원통버스터미널까지 물 흐름을 거슬러 걷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하천은 바로 제가 따라 걸은 하천이 인북천이 아니고 북천이었습니다.

 

 

  대간이나 정맥을 종주할 때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산줄기를 혼자서 종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사전에 산행계획을 철저히 세워 충분히 익힌 다음에 지도와 나침판, 그리고 먼저 다녀온 분의 산행기를 복사해 길을 떠납니다. 산에 들어선 후에는 갈림길에서 반드시 방향을 점검한 후 진행해 제가 걷는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강이나 하천을 따라 걷는 길은 산길이 아니고 대부분 평지 길이어서 대체로 안전합니다. 이 때문에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해 이번에 제가 걷고 있는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에서 한참동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산길을 이어가는 것보다 천변 길을 이어가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싶은 것은 산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강 길은 산을 만나면 대부분 끊어지고 건너편에 길이 나 있습니다. 다행히 다리가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 길을 되돌아가 다리 건너 맞은 편 길로 걸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 실수를 막을 수 있다는 자명한 이치를 몸소 깨달은 것이 이번 탐방의 작은 소득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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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박인환이 인제에서 살았던 기간은 1926년에서 1936년까지로 어린 시절의 10년간입니다. 그가 어려서 구비 구비 흐르는 인북천에서 놀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에서 뱀 모양을 그리며 굽이져 흐르는 인북천의 물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박인환은 인제가 낳은 시인으로 불려 마땅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인북천을 따라 걸은 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제껏 제가 이 시를 좋아했던 것은 이 시 특유의 퇴영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서였습니다. 또 하나 추가한다면 시인 박인환이 구사한 멋들어진 시어들이 마음에 들어 반복해 이 시를 낭송하곤 했습니다. 이번에 이 시를 다시 읽고 나서 느낀 것은 박인환이 그의 시 목마와 숙녀를 통해 노래하는 인생이 인북천의 물 흐름과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정면 돌파를 해보고 그리해서 안 되면 방향을 틀어 굽이져 흘러가는 인북천의 물 흐름을 바라보노라면,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가는 것일까라는 시인의 절규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물도 마냥 곧게만 흐르지 않고 때때로 방향을 틀어 돌아 흐르면서 물 흐름을 이어가듯이, 우리도 가끔은  정도에서 벗어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게 살면서 삶을 이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 저기 부딪히며 흘러내려가는 물이 물 흐름을 이어가 끝점인 바다에 이를 수 있듯이, 우리도 이 사람 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외롭지 않은 인생을 이어갈 수 있고, 제 명이 다해 인생의 끝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제읍의 박인환문학관은 코로나19가 진정된 후라야 문을 열 것 같습니다. 문학관을 찾아가 선생을 기리는 일은 아무래도 늦어질 것 같아 이 짧은 글을 탐방기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