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평화누리길 탐방기

평화누리길 탐방기28(원통교차로-합강정-살구미마을)

시인마뇽 2021. 3. 17. 17:15

*탐방구간:원통교차로-합강정-살구미마을

*탐방일자:2021. 2. 28()

*탐방코스:원통버스터미널-원통교차로-서호교-리빙스턴교-합강정

              -살구미마을-박인환문학관-인제버스터미널

*탐방시간:107-1627(6시간20)

*동행      :나홀로

 

 

  결혼 후에도 줄담배를 피워온 제게 애들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발 담배를 끊으라고 집사람은 집요하게 금연을 강권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식후불연(食後不燃)이면 우연득병(偶然得病)하여 졸지객사(猝地客死) 한다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면서 객설은 몇 마디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우연히 병을 얻어 갑자기 객지에서 죽게 된다는 뜻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집 밖에서 죽음을 맞는 객사(客死)야 말로 부모님에는 천에 없는 불효요, 자식들에는 한을 남겨주는 것이어서 우리 선조들께서 극력 피해왔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한 신문보도에 따르면, 작년 봄 미국에서 입국해 자가격리를 통보받고도 병원으로 달려가 위독하신 아버지를 뵙고 닷새 뒤 죽음을 지켜본 한 여성이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자가격리 조치를 위반한 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담당판사는 이 여성이 자가격리 명령을 어겼지만 임종(臨終)한 것은 효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인정해, 500만원의 벌금을 150만원으로 감해주었다고 합니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는 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임종을 자식들이 지켜야 할 으뜸 된 도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인식이 식후불연/우연득병/졸지객사(食後不燃/偶然得病/猝地客死)”라는 우스개 말을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집단적으로 객사를 불러오는 것은 전쟁입니다. 이번에 원통-합강정-인제 구간의 평화누리길을 걸으면서 6.25전쟁 때 인제지구전투에서 전사한 수많은 장병들을 잠시 떠올린 것은 이 나라를 위해 객사를 마다하지 않은 장병들의 고귀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19516월에 격전을 벌인 인제지구전투에 이르기 까지 전개된 과정은 대략 이러합니다. 유엔군은 전쟁 발발 며칠 후인195077일에 참전합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리다가,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기를 잡아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14일 서울을 다시 내준 유엔군과 한국군은 314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3일 작전을 개시해 문산-임진강상류-동두천-춘천-현리-영양 북쪽을 잇는 캔자스 선을 확보합니다. 그 후 중공군의 저항과 공세가 만만치 않아 캔자스 선에서 밀고 밀리는 지리한 공방전이 1년 넘게 계속됩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14월과 5월 두 달에 걸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63일부터 반격을 개시해 617일까지 새로운 전선을 확보합니다. 전쟁수행 일 년 만에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확보한 한강하류-문산-전곡-연천-철원-김화-산양리-펀치볼-서화리-거진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경계선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커다란 변화 없이 유지되어 휴전선으로 바뀝니다. 인제지구전투는 19514월과 5월의 중공군 공세와 6월의 유엔군 및 한국군의 공세 기간 중 인제지역에서 치러진 전투를 이릅니다.

 

 

  이번에 인제 땅의 리빙스턴교와 살구미교에 조성된 소공원(?)에서 60년 전 인제지구전투에서 희생된 장병과 주민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분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전 세계 앞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싶어 가슴 속에서 추모의 염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희생한 분들 거의 다가 집이 아닌 객지에서 객사를 한 것인데다, 부모님들께 자식을 잃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안겨주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더욱 그러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제대를 며칠 앞두고 군에서 돌아가신 큰형님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어머니를 지켜본 적이 있어 참척의 고통이 어떠한 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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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1020분 원통버스터미널을 출발했습니다. 원통버스터미널에서 십 수 분 걸어 도착한 원통교차로에서 28번 째 평화누리길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원통교차로에서 북천을 따라 내려가 서호교에 이르는 450도로변의 제방 길은 작년 11월 두 동창들과 함께 걸어본 길이어서 눈에 많이 익었습니다. 원통교차로에서 바로 위쪽의 보를 사진 찍고 나서 남쪽으로 진행하는 중 잠시 간이 쉼터에 앉아 이 길을 함께 걸은 중학교 동창들을 떠올린 것은 멀리 가려면 함께 걷고 빨리 가려면 혼자 걸으라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생각나서였습니다. 원통교차로를 출발한지 반시간이 다 되어 서호교에 이르러서야 방금 지나온 큰 다리 아래가 북천/인북천의 합수점임을 알았습니다. 서호교 아래의 보()는 얼음이 반쯤 녹아 있었습니다. 제방 길로 들어선 것은 북천/인북천의 합수점을 보다 가까이에서 사진 찍고 인북천을 내려다보며 걷고 싶어서였는데, 중간에 군부대가 들어앉아 길을 막고 있어 합수점만 사진 찍고 인제 가는 구도로로 되돌아갔습니다.

 

 

  1137분 합강3리 마을회관을 지났습니다. 인제로 가는 구도로 양쪽에 들어선 군부대를 지나 이내 합강3리 마을회관 앞에 다다랐습니다. 문이 닫혀 있고 안에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코로나19로 폐쇄된 것 같습니다. 회관에 나가 마을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을 시골노인들이 코로나19로 말상대를 잃은 데서 오는 고독감이 상당히 클 것 같아 사회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을회관을 지나 하늘채 마을에 이르자 강렬한 직선의 구조미를 뽐내는 서구식 주택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늘채 마을에서 반시간을 채 못 걸어 길가 간이 쉼터에서 준비해간 햄버그를 꺼내들면서 길 건너 무인호텔 여행의 길에 눈길을 준 것은 무인호텔의 이용방법이 자못 궁금해서였습니다. 남중한 태양이 머리 위를 내려쬐어 3월 첫날 강원도 땅의 길을 걸으며 맞는 봄이 따사로웠습니다.

 

 

 

  1258분 리빙스턴다리를 건넜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다시 따라 걸은 구 도로와는 삼거리에서 헤어져 왼쪽의 경사진 초록색 아스콘 길로 들어섰습니다. 녹색의 아스콘 길이 끝나는 리빙스턴교 앞에서 장총 두 개를 비스듬히 세운 모양을 형상화한 기념비를 사진 찍은 후 이 다리를 건넜습니다.

 

 

  리빙스턴교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순직한 미국의 리빙스턴 소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놓은 다리입니다. 미국의 청년 리빙스턴 소위는 1951611일 인제지구전투에 참가합니다. 합강정에서 매복 중인 적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작전상 후퇴하려고 인북천을 도하하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대부분의 부하들을 잃습니다. 이때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끝내 순직한 리빙스턴은 죽기 전 고국의 부인에게 다리가 없어 부하들이 희생되었다며 여기에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유언이 되고만 이 부탁을 들은 부인은 1957124일 길이150m, 3.6m의 목제난간 다리를 놓았다고 다리 옆의 기념비에 적혀 있습니다.

 

 

  리빙스턴을 건너 합강정으로 이어지는 제방 길은 적갈색의 아스콘 길로 걷기에 편안했습니다. 인제전원교회를 지나 다다른 사거리에서 오른쪽의 인제합강대교를 건넜습니다.

 

 

  1349분 합강정에 올랐습니다. 합강대교를 건너 언덕 위로 올라가자 인북천과 소양강이 만나는 합수점의 풍광이 빼어나 보였습니다. 언덕 위의 작은 공원에는 합강정, 중앙단, 사직단, 그리고 박인환의 시비와 군민의 종과 휴게소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소공원을 대표하는 건물은 단연 정면3칸과 측면2칸의 목조2층 누각에 팔작지붕을 한 누정(樓亭) 합강정(合江亭)입니다. 합수점 용소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합강정은 숙종2(1676)에 지어진 정자로 인제군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고 있는 합강정은 1998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조선의 문인들이 한시를 지어 남겼을 법한 편액(扁額)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아 유서 깊은 정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언덕에서 내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설치되었다는 합수점 위의 번지점프장을 사진 찍고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뚝방길인 인제천리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느낀 것은 지금 걷고 있는 소양강은 요즘 걷고 있는 영산강에 비해 강폭이 좁고 천변에 갈대밭이 별로 없는 대신 모래밭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방에서 천변으로 내려가 걷다가 다시 제방으로 올라가 걷기를 반복하면서 소양강의 물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1522분 사구미다리를 건넜습니다. 합강정에서 사구미다리까지 이어지는 인제천리길은 자전거도로를 겸하고 있어 생각보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합강정 출발 40분이 지나 다다른 굴다리는 인제시내로 들어가는 길로 여기서부터 사구미다리 건너 살구미마을까지 거리는 1.8Km로 나와 있습니다. 강변의 모래가 하도 고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바짝 다가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소월의 시 강변 살자가 떠오른 것은 김광수님이 곡을 붙이고 국민가수 이미자님이 노래 부른 이 시가 뇌리에 박혀 있어서였습니다. 사구미다리에 이르러서는 다리 옆 살구미소공원에 세워진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과 참전유공자기념탑을 모두 들러  6.25전쟁 때 향토방위를 위해 민족자결동지회, 청년향토방위대와 매봉산결사대 등을 조직해 싸우다 희생된 민간인들과 인제지역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사구미 다리 아래 천변 공원에 치마가 날리는 모습을 형상화해 세운 조각상의 주인공은 미국의 여배우 마를린 먼로였습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36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뜬 마를린 먼로는 영원한 섹스 심볼이자 백치미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스타였습니다. 이런 여배우 마를린 먼로가 여기 인제를 방문한 것은 한창 젊음이 무르익은 28세 때인 1954년의 일이었으니 이 배우를 맞는 미군들의 환호가 어떠했을까는 충분히 상상되었습니다.

 

  사구미다리로 소양강을 건넌 것은 살구미마을을 직접 가보고 싶어서였는데 막상 건너고 보니 딱히 찾아갈 곳도 없어 마을 입구에서 동리분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다리를 되 건넜습니다.

 

 

  1627분 인제버스터미널에 도착해 28번째 구간의 평화누리길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살구미공원에서 육교를 건너 인제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인제산촌민속박물관과 같이 붙어 있는 박인환문학관을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  시인이자 번역가이자 영화평론가였던 박인환의 생생한 살아생전 모습들을 담은 전시물들을 찬찬히 둘러본 박인환문학관은 한 동안 휴관 중이었다가 바로 전날 다시 문을 열어 문학관을 둘러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인제가 낳은 시인 박인환님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는 전번의 평화누리길탐방기에서 언급한 바 있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몇 분 기다리지 않고 동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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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역사에서 객사(客死)를 불러온 것은 전쟁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집 밖에서 떼로 죽게 만든 것은 전염병과 기근이었습니다. 합강정 공원에서 제 눈을 끈 것은 중앙단(中央壇)이었습니다. 중앙단이란 조선시대 각도의 중앙에서 전염병이나 가뭄을 막아내고자 억울하게 죽거나 제사를 받지 못하는 신을 모시고 별여제(別厲祭)를 지냈던 제단(祭壇)을 이릅니다. 강원도의 동서 수령들이 모두 모여 여기 중앙단에서 별여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연3회 제사를 지내는 여제(厲祭) 만으로는 모자라, 별도로 별여제((別厲祭)를 올려야 할 만큼 역병과 가뭄에 희생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티푸스로 알려진 염병(染病)조선왕조실록에 총736회나 실릴 만큼 자주 발생했던 전염병이었습니다. 1684(숙종10) 629일자 실록에는 전라도는 염병에 걸린 자가 600여명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고, 14년인 1688(숙종14) 52일자 실록에는 전라도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거의 800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김서형교수는 그의 저서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에 적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근은 현종임금이 재위 중에 일어난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입니다.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 두 해 동안 조선8도 전체의 흉작으로 일어난 이 대기근에서 사망한 사람이 무려 약90만에서 15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조선인구가 1,200만명-1,400만명임을 감안하면 그 사회적 충격은 엄청 커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서형교수는 이 책에 숙종 때의 기근 사례를 실어놓았습니다. 조선에서는 1695(숙종21)부터 4년 동안 심각한 기근이 발생합니다. 8월에 눈이 내리는 이상저온 상태가 지속되어 곡물을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곡물가격이 4-6배 이상 급등하고 식량부족 현상이 심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는데 1696년 한 해에 서울로 유입된 난민들이 약1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는 수십만명이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하니 수많은 백성들이 객사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조선의 조정에서 각 도에 중앙단을 설치하고 별여제를 지낸 것은 제사를 받지 못하거나 억울하게 죽어 원한이 맺힌 신들 때문에 역병이 창궐하고 기근이 들었다고 진단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조정이 이러하니 병이 나면 역귀를 물리쳐야 나을 수 있다며 굿을 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백성들을 힐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의 명의 허준선생은 1613(광해군5)에 간행된 자신의 저서 동의보감잡병편에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장티푸스에 해당되는 온역에 대해 질병의 원인, 증상과 치료법을 자세히 기록해놓았습니다.  허준선생은 과연 선각자였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