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평화누리길 탐방기

평화누리길 탐방기30(매바위인공폭포-미시령-천진리)

시인마뇽 2021. 5. 8. 10:39

*탐방구간 : 매바위인공폭포-미시령-천진리

*탐방일자 : 2021. 4. 28()

*탐방구간 : 매바위인공폭포-미시령-울산바위전망대-강원도잼버리수련장-천진리

*탐방시간 : 940-1849(9시간9)

*동행 : 문산중 황홍기, 황규직 동문

 

 

  미시령을 넘으며 큰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은 것은 저만이 아닙니다. 시인 황동규는 미시령의 강풍을 맞아 다섯 연으로 된 시() 미시령 큰바람을 지어냈습니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은 이 시에서 바람은 자연적 바람과 세속적 바람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 시에서 자연적 바람을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은 제1연입니다. 시인 황동규가 맞은 미시령의 큰 바람은 나는 나를 놓칠까봐/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고 실토할 만큼 강풍이었다는 것은 제1연의 아래 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시령 큰바람>

 

아 바람!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하나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

경전의 글귀 하나 없이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설악산이 흔들리고

내 등뼈가 흔들리고

나는 나를 놓칠까봐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제가 온몸으로 미시령의 큰바람을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64월 봄날 55회에 걸쳐 진행한 백두대간 의 마지막 구간 종주를  미시령에서 시작해 진부령에서 끝낸 적이 있습니다. 그날도 미시령의 바람은 설악산이 흔들리고 등뼈가 흔들릴 만큼 거셌습니다. 그날의 바람은 앞을 가로막는 강풍이 아니고 뒤에서 밀어주는 큰바람이었다고 느꼈던 것은 백두대간을 완주한다는 설렘 때문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이번에 평화누리길을 종주하는 길에 올라선 미시령에서 맞이한 큰바람은 여전히 거셌습니다. 이 고개 맨 꼭대기에 자리한 彌矢領의 표지석 앞으로 다가서지 못한 것은 혹시라도 제 몸이 미시령의 큰바람에 날라가지 않을 까 두려워서였습니다. 한가지를 더 든다면 나이가 들수록 더해지는 소심함도 한 몫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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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940분 매바위인공폭포를 출발했습니다. 30번째 평화누리길 탐방은 용대삼거리의 황태집 식당에서 조반을 들고난 후 시작했습니다. 아침 햇살에 우람한 자태가 돋보이는 매바위인공폭포를 뒤로하고 평화누리길로 접어든지 10분가량 지나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동행한 한 친구가 용케도 이 문을 열어 곧바로 56번 고가도로 아래 미시령 전방6.4Km 지점에서 미시령옛길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나절 내내 쌀쌀했던 날씨는 그새 기온이 올라가 미시령계곡의 깊은 골짜기에도 봄바람의 훈기가 느껴졌습니다. 미시령농수산물직판장을 지나 56번도로를 그 아래 굴다리로 건넌 후 10분여 더 걸었습니다. 길가에서 가까기에 우뚝 서 있는 인수봉의 오버행 바위를 닮은 깎아지른 꽤 큰 바위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곧추선 큰 바위를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미시령전방3.5Km 지점에 이르자 미시령 옛길을 전면통제한다는 교통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잠시 머뭇거리다, 그 아래 폭설(결빙)’라는 문구를 보고 안심하고 진행했습니다. 설악산 깊숙이에 자리한 미시령계곡에도 봄이 찾아왔음을 실감한 것은 길가에 활짝 핀 개나리와 노란 색의 현호색이 반갑게 인사를 해와서입니다. 차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미시령옛길을 폐쇄하지 않고 자전거 길로 정비해, 이렇게 미시령을 걸어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129분 해발826m의 미시령을 넘었습니다. 미시령옛길을 걸어 오르는 중 제 눈을 끈 것은 북부지방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안내판이었습니다. 이 지역 산림 내 왜습다리, 신갈나무, 개박달나무, 산오이풀 등 40여종에 이르는 식물의 유전자와 종 보존을 위하여 속칭 신선봉 일대의 125ha를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연중 내내 입산을 통제한다는 산림청의 안내문을 읽고서, 우리나라의 출생인구 격감도 같은 유()의 중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산을 통제하지 못하면 산림유전자원의 보호가 쉽지 않듯이 하루 빨리 최적의 정책을 개발해 시행하지 않는다면 계속 인구가 줄어들어 한민족의 종족 보존이 위협받는 것은 아닌가 싶어 섬뜩했습니다. 해발826m의 미시령에 올라서자 고개는 옛 그대로였고 바람 또한 15년 전과 똑 같아 반가웠습니다. 고갯마루에 자리한 국립공원 설악산 미시령탐방지원센터가 닫혀 있는 것으로 보아 미시령을 기점으로 북쪽의 진부령이나 남쪽의 황철령으로 가는 등산로가 열려 있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지는 확인해볼 일입니다. 고개 너머 고성군의 미시령엣길은 인제군의 옛길보다 더 구불구불 했습니다. 바람을 가릴 수 있는 굽이진 곳에서 점심을 꺼내 든 후 동해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내려갔습니다.

 

 

  1415분 울산바위쉼터에서 울산바위를 조망했습니다. 꼬부랑길을 따라 하산하는 중 작년 여름 폭우로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밑으로 흘러내린 현장을 목도하고 이래서 차가 전혀 다니지 않았구나했습니다. 미시령교쉼터를 지나서 얼마간 걸어 내려가 이번 탐방의 끝점인 천진과 인접한 청간정까지 남은 거리가 15Km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고 진행을 서둘렀습니다. 고성군의 미시령옛길이 참으로 명품 코스인 것은 울산바위의 전모가 한눈에 잡혀서입니다. 몇 번이고 멈춰 서서 곳에 따라 면모를 달리하는 울산바위를 한 두 컷 사진 찍다가, 해발 3m대의 울산바위쉼터에 이르러서는 울산바위의 진면목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겠다싶어 여러 커트를 찍었습니다.

 

  명승 제100호로 지정된 울산바위는 동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돌산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바위는 병풍처럼 우뚝 선 6개의 거대한 화강암 연봉이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돌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울산바위는 그 자체로도 명승적 가치를 지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경치도 아주 훌륭한데, 특히 미시령 옛길에서 보는 경치가 웅장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시령옛길을 따라 걸으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1968년 처음으로 울산바위를 올랐을 때는 대청봉, 중청봉, 화채능선, 서북주릉 등의 설악산의 고봉과 능선, 그리고 동해바다를 조망했었습니다. 이번에는 미시령옛길을 걸으면서 바위 높이만 약 200m에 달하는 곧추선 암봉들이 병풍처럼 서 있는 울산바위 그 자체를 조망했습니다.

 

  울산바위는 화강암의 절리면을 따라 발생한 차별침식과 풍화작용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의 풍화물질이 제거되면서 덩어리 형태의 화강암체로 남아 있는 지형을 '보른하르트(bornhart)'라고 부르는데 울산바위가 바로 보른하르트 지형을 하고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설악산이 중생대에 만들어졌음을 감안한다면, 이 산에 자리 잡은 울산바위의 이름에 관련된 몇 개의 전설이 전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울타리 같이 생겼다고 해서 울산(鬱山) 또는 이산(離山)으로 불렀다는 설, 이 바위가 본래 울산에 있었던 데서 연유했다는 설, 바위를 통과하는 바람소리가 마치 우는 소리처럼 들려 불렀다는 우는 산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 3개의 설이 가장 유력하다는데, 세 개의 설을 놓고 어느 설이 더 그럴듯한지를 놓고 여론조사를 하자는 사람들이 없어 울산바위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상처받지 않고 그 우람한 자태를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69분 설악대교차로에 다다랐습니다. 울산바위쉼터를 출발해 첫 삼거리에 이르자 미시령옛길정상 7Km/천진10Km'의 평화누리길 표지목이 세워져 있어 반가웠습니다. 속초로 가는 직진 길인 56번 도로와 헤어져 구릉에 낸 왕복2차선의 왼쪽 차도로 들어섰습니다. 대명콘도를 지나 정북으로 이어지는 평화누리길을 따라 걸어 왼쪽으로 금강산 화암사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화암사(禾巖寺)는 금강산 최남단의 사찰로 서력 769년에 창건된 신라의 천년고찰입니다. 이 절에 산자락을 내준 신선봉은 금강산제1봉이고보면, 범박하게  금강산과 설악산의 경계는 미시령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 수분을 더 걸어 다다른 강원도세계잼버리수련장에 눈길이 간 것은 제가 오래 다녔던 회사의 그룹 총수께서 1991년 제17차 세계잼버리대회를 유치해 이곳 고성에서 성공리에 개최한 일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2023년에 개최되는 제25회 세계잼버리대회를 새만금으로 유치할 수 있었던 것에는 16년 전의 개최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른 쪽으로 속초행 길이 갈리는 통일교차로를 지나 천진을 6Km 앞에 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통일전망대쪽으로 걸어가다 이내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천진천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 하천만 따라가면 하구 북쪽의 청간정과 남쪽의 천진해수욕장 어디에든 다다를 수 있어 신평교를 건너 천진천을 따라 걸었습니다. 설악대교차로에 이르자 자전거 길로 낸 평화누리길이 고성대로와 합쳐져 어느 길로 이어지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카카오맵을 보고 고성대로를 건너 천진천과 나란한 방향으로 길이 나 있는 성대로로 들어섰습니다.

 

 

  1825분 고성군토성면의 면소재지인 천간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30번째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설악대교차로를 건너 성대로를 따라 북진해 성대1리 버스정류장을 지났습니다. 이내 신평리로 이어지는 차도를 만나 동진하다가 성대교 앞에 이르러 천진천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용암1리에 이르자 차도 왼쪽 아래 천진천 한가운데 모래톱의 하얀 모래와 물에 젖은 주황색(?) 모래가 저녁 햇살을 받아 더욱 돋보였습니다. 신평교회를 지나 청간정으로 가는 지름길인 곧게 뻗은 제방길로 들어섰습니다. 다소 넓어진 천진천이 그 안 모래밭에 길을 내 구불구불 흐르는 모습은 마치 계곡에서 사행천을 옮겨 놓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보를 설치한 몇 곳을 제외하고는 하구까지 모래톱이 계속 보여 백두대간 동쪽의 하천이 서쪽의 하천보다 하구의 수량이 눈에 띄게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해와 만나는 하구에 가까이 가서 건너편의 청간정을 사진 찍은 후 남쪽의 천진리로 옮겨 하루 여정을 마쳤습니다.

 

  민박집에다 짐을 풀고 중심가로 나가 저녁을 사든 후 친구들과 함께 천진해수욕장을 들렀습니다. 앞 바다가 캄캄해도 바라보는 것 그대로가 좋았던 것은 사람들이 거의 없고 지나가는 차도 보이지 않아 바다가 연출하는 파도소리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어서였습니다. 집사람이 생각나 영화 로미오와 주리엣의 주제가를 불렀는데, 파도소리에 묻혀 집사람에게 전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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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황동규는 그의 시 미시령 큰바람을 이렇게 맺습니다.

 

 

나무들은 조용하다

옛 책상의 얼굴을 한번 조심히 쓰다듬어 본다.

내 내장, 관절, 두뇌 피질 여기저기서

녹물이 흘러나온다

녹물이 사방에 번진다

옛 책상의 얼굴을 한번 더 쓰다듬는다.

지구(地球)의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이상하다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복도 끝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강원도 나무들이 환하게 소리지르고

그 바람 점점 커져

드디어 내 상상력을 벗어난다

아 이 천지(天地)

 

미시령 큰바람.

 

 

  시인이자 대학교수인 황동규는 평생을 책상과 더불어 살아온 분입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하응백이 책상을 쓰다듬는 행위를 삶의 녹과 화해에 대한 시인의 의지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시인이 삶의 녹과 화해하자, 지구의 얼굴로 표현된 세속의 사람들이 부드러워지고, 부드럽게 불기 시작한 세속의 바람이 끝내는 자연의 바람과 합쳐져 마침내 천지를 뒤흔드는 미시령의 큰바람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식(李植, 1584-1647)이 미시령을 힘들게  넘고 나서 남긴 한시 <미시파령(彌矢坡嶺)>을  덧붙입니다.  이식이 지은 한시 <미시파령(彌矢坡嶺)>은 이 시 외에도 한 수가 더 있습니다. 이 시에서 바람이 거셌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날씨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미시파령(彌矢坡嶺)>

 

五步一回顧 다섯 걸음마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고

十步一停留 열 발 걷고 나서 다시 멈춰 휴식하며

三朝上峻阪 삼일 동안 아침나절 험한 비탈 올라

三暮登上頭 사흘 저녁에 정상에 우뚝 섰어라

巨石傷我足 거대한 바위에 발도 다치고

顚崖眩我眸 깎아지른 낭떠러지 눈이 아찔했나니

大哉穹壤內 굉대(宏大)하도다 미시령이여

玆嶺誰與侔 천지간에 그 무엇이 그대와 짝하리요

回車與叱馭 수레를 돌렸거나 마부 꾸짖었거나

忠孝心所求 모두가 충효심의 발로라 할 것인데

何意携老母 노모를 모신 이 길 무엇 때문에

乃反窮遐幽 깊은 골 뒤질 생각 거꾸로 한단 말가

餘生慕苟全 남은 인생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絶跡甘遠投 자취 끊고 먼 산골로 들어가도 좋으련만

臨風發長歎 바람결에 날려 보내는 나의 장탄식(長歎息)

吾道知是不 나의 이 길 과연 옳은 것인지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