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평화누리길 탐방기

평화누리길 탐방기31(천진리-송지호-간성버스터미널)

시인마뇽 2021. 5. 13. 04:36

*탐방구간 : 천진리-송지호-간성버스터미널

*탐방일자 : 2021. 4. 29()

*탐방구간 : 천진해수욕장-청간정-천학정-자작도해변-송지호-공현진해수욕장

                -가진항-간성버스터미널

*탐방시간 : 544-1550(10시간6)

*동행 : 문산중 황홍기/황규직 동문

 

 

 

 

  중국에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이 있습니다. 이번에 평화누길 탐방 차 들른 강원도 고성군의 청간정(淸澗亭)은 천진천이 동해와 만나는 하구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관동팔경의 한 곳입니다.

 

  중국의 소상팔경은 소상(瀟湘) ,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남쪽에서 합수하여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들어가는 일대에 형성된 여덟 곳의 승경(勝景)을 이릅니다. 1경은 소수 상강에 내리는 밤비를 형상화한 소상야우((瀟湘夜雨)이고, 2경은 산속의 저자를 둘러싼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의 산시청람(山市靑嵐)이며, 3경은 먼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의 모습인 원포귀범(遠浦歸帆)이고, 4경은 안개 낀 절에서 들리는 저녁 종소리인 연사만종(煙寺晩鐘)입니다. 5경은 어촌에 비끼는 저녁놀인 어촌석조(漁村夕照)이며, 6경은 동정호에 뜬 가을 달의 모습인 동정추월(洞庭秋月)이고, 7경은 평평한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의 모습인 평사낙안(平沙落雁)이며, 마지막 제8경은 강변 저녁 하늘에 내리는 눈인 강천모설(江天暮雪)이라고 이영훈 교수는 저서 환상의 나라2 - 호수는 어디에에 소개했습니다.

 

  제가 평화누리길 탐방기에 장황하게 소상팔경을 소개하는 것은 우리선조들이 조선의 자연을 중국적 형태로 감각하는데 소상팔경의 그림과 시가 한 몫 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상팔경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오대 송초의 이성(李成)이며, 소상팔경을 소재로 한 최초의 그림과 시는 1080년 미불(米芾)이 그린 소상팔경도시병서(瀟湘八景圖詩幷序)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고려에 전해져 명종 임금은 1185년 문신들에 명해 소상팔경의 시를 짓게 하고, 화공에 명하여 시의 내용대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소상(瀟湘)은 아황(蛾黃)과 여영(女英) 두 여인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음을 맞은 남편 순() 임금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통곡하며 투신한 전설이 깃든 강입니다. ()나라 책략가인 굴원(屈原)이 자신의 주장을 죽음으로 간하고자 몸을 던진 강이었다고 위 책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동정호와 더불어 소상팔경은 조선 사대부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최고의 승경이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관동팔경이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비롯된 것은 이영훈 교수가 위 책에서 지적한대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우리나라 자연을 중국적 형태로 감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위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는 17세기 실학자인 조선의 유형원(柳馨遠)이 중국이 동정호를 경계로 호남성과 호북성을 가른 것을 본 따서 김제의 벽골제를 경계삼아 호남과 호서로 나눈 것이나,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이라 칭할 만한 송강 정철(鄭澈)이 그의 가사 사미인곡에서 "소상의 남쪽 밭도 추위가 이러 하거늘/ 임 계신 옥루고처는 더욱 말해 무엇하랴"고 노래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관동팔경이란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여덟 곳의 명승지로 통천의 총석정(叢石亭)과 고성의 삼일포(三一浦)는 북한 땅에 자리하고 있어 가볼 수 없습니다. 남한 땅 최북단의 관동팔경은 이번에 탐방한 고성의 청간정(淸澗亭)입니다. 그 아래로 양양의 낙산사(落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와 원래 강원도였다가 1963년 경상북도로 편입된 울진의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月松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동팔경은 모두가 동해안에 면해 있어 망망대해와 새하얀 모래사장, 울창한 송림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여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정자에 올라 관동팔경의 절경을 노래한 한시를 편액으로 남기곤 했습니다.

 

  이번에 관동팔경의 한 곳인 청간정에 올라 읽은 시문(詩文)은 조선중기 문신인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지은 한시(漢詩) 청간정(淸澗亭)입니다.

 

天敎滄海無潮汐 하늘의 뜻이런가 밀물 썰물 없는 바다

亭似方舟在渚涯 방주마냥 정자 하나 모래톱에 멈춰 섰네

紅旭欲昇先射牖 아침 해 솟기 전에 붉은 노을 창을 쏘고

碧波纔動已吹衣 푸른 바다 일렁이자 옷자락 벌써 나부끼네

童男樓艓遭風引 동남동녀(童男童女) 실은 배 순풍(順風)을 탄다 해도

王母蟠桃着子遲 왕모의 선도(仙桃) 열매 언제나 따먹으리

怊悵仙蹤不可接 선인(仙人)의 자취 못 만나는 아쉬움 속에

倚闌空望白鷗飛 난간에 기대 부질없이 오가는 백구만 바라보네

 

  이 시에서 저자 이식의 모화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 시구(詩句)는 제3연인 경련(頸聯)입니다. 한국고전종합DB의 주()에 따르면, 경련의 첫 구인 동남동녀(童男童女) 실은 배 순풍(順風)을 탄다 해도(童男樓艓遭風引)” 는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불(徐市)에게 명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했던 고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대구(對句)왕모의 선도(仙桃) 열매 언제나 따먹으리(王母蟠桃着子遲)” 는 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가 한 무제(漢武帝)를 방문하여 복숭아를 먹여 주었을 때, 무제가 그 씨를 남겨 두고서 땅에다 심으려고 하자, 서왕모가 웃으면서 그 복숭아는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데다, 중국은 땅이 또 척박하니 심어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녘 멀리 동해바다의 청간정을 찾아 서녘의 먼 나라 중국의 고사나 전설에서 시상(詩想)을 빌려온 것은 모화사상의 발로이다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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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544분 천지리의 민박집을 출발해 31번째 평화누리길 탐방에 나섰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출을 보러 해변으로 나가봤으나 구름이 잔뜩 끼어 허탕 치고 민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서둘러 중심가로 나가 아침을 들고자 했으나 문을 연 식당이 없어 곧바로 청간정으로 향했습니다. 천진천 건너 구릉에 자리한 청간정에 올라 망망대해의 동해를 조망했습니다.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청간정의 건립연대는 1520(중종 15)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보고 있는 청간정은 1980년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동해안을 순시할 때 청간정의 보수정화를 명해 그 이듬해 개축한 것입니다. 이 정자의 추녀 밑에 걸려 있는 淸澗亭현판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 합니다. 2012년 여름에 청간정을 처음 찾아와 바로 아래 바닷가로 내려갔을 때는 철책선이 쳐져 있어 백사장에 접근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개방되어 청간해변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청간해변을 지나 이야진항에 이르자 항구에 정박된 작은 배들이 여러 척 보였습니다. 해양생태계를 죽인다며 일본의 방사능오염수방류계획의 철회를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환경보존은 전 지구적 과제이다 싶었습니다. 오전 7시가 조금 지나 식당을 들러 요기를 한 후 토성면 교암리에 자리한 천학정(天鶴亭)으로 이동하는 중에 해당화를 보았습니다. 해당화(海棠花)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관목으로 바닷가의 모래밭이나 산기슭에서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연분홍꽃의 해당화가 반가웠던 것은 19687월 한 고교동창과 동해안을 여행하며 본 해당화가 선명하게 기억나서였습니다.

 

  교암항의 해변에 이르기에 앞서 들른 곳은 천학정입니다. 1931년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지방유지들이 발의하여 정면 2, 측면 2,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으로 세운 천학정은 해안의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조망하기에 딱 좋은 일출전망대입니다. 이에 더하여 1백년 이상 된 소나무가 풍치를 더해주고 있어 천학정이 고성팔경의 제2경으로 선정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824분 교암해변을 지났습니다. 안으로 휘어져 들어간 교암해변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썰렁했습니다. 천진리부터 평화누리길 표지판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평화누리길과 해파랑 길이 겹쳐서인 것 같습니다. 해파랑 길은 부산의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고성군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낸 길로 전장이 770Km이며, 고성군을 지나는 구간만도 그 길이가 65Km에 달합니다. 문암천 위에 놓인 문암대교를 건너자 백도해변과 방파제가 가깝게 보였습니다. 백도오토캠핑장을 지나 낭만가도 안내문을 읽어본 즉, ‘낭만가도(Romantic Road of Korea)'란 강원도의 동해안의 빼어난 절경을 즐길 수 있도록 강원도최북단의 고성과 최남단의 삼척의 해안선을 이어 낸 길을 뜻하는데, 이 또한 해파랑길과 겹치는 것같습니다.

 

  자식을 얻고 대풍어를 가져오기를 기원하고자 인근 마을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미륵불을 막 지나 해안에 노출된 구릉의 단애를 보았습니다. 능파대타포니(凌波垈風化穴)로 이름 붙여진 이 단애의 전면에 곧추선 바위는 움푹 들어간 곳도 있고 큰 구멍이 나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강원평화지역지질공원 안내문에 따르면, 능파대타포니를 형성하는 주 원인은 염분이라고 합니다.

 

  “능파대에는 해안타포니가 매우 인상적이고 대규모로 발달하고 있다. 타포니(Tafoni)sms 풍화작용에 의해 암석의 측면에 발달한 동굴형태의 구멍으로 마치 골다공증처럼 암석에 구멍이 난 형태로 발전한다. 능파대타포니의 주요한 형성 원인은 염분이다. 오랜 기간 동안 기반암인 화강암의 틈(절리)을 따라 염분이 성장하였고 압력을 가하면서 바위를 부스러트린 것이다.”

 

  여기 능파대타포니도 풍화가 더 진전되면 주문진의 소돌공원 바위처럼 변모하지 않겠나 싶어, 이우평의 한국지형산책1에 실린 조각공원 같은 주문진소돌공원칼럼의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여기 해안에 노출된 바위도 소돌공원의 바위처럼 중생대 쥐라기말에 관입해 지하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의 상층부가 지반이 융기한 이후 점차 깎여 나가면서 지표에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바닷물에 녹아 있는 염분이 바위의 틈새나 작은 홈에서 결정을 이루며 성장하면서 절리면이 벌어지고 붕괴됩니다. 또한 틈새와 홈으로 오랜 세월 파도가 드나들면서 침식과 염풍화가 진행되어 풍화혈이 만들어집니다. 이 바위 전면에 구멍이 나있거나 움푹 들어간 곳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가 계속 진행될 것이기에 몇 만 년이 지나면 여기 바위들도 주문진의 소돌공원처럼 더욱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암항을 지나 자작도해변으로 이동하는 길에 고성문암리유적지를 지났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신석기시대유적 중 남한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고성문암리유적지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문화,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과정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지라 합니다. 이에 더하여 신석기시대 생활상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국가사적 제426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제법 넓은 유적지를 판목으로 울타리를 쳐 보전하는 것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은 덕분일 것입니다.

 

  자작도해변은 길지 않아 아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두 개의 섬이 백도라는 것은 섬 전체가 온통 흰색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작도해변서핑존을 알리는 표지판 앞에서 왼쪽으로 확 틀어 이어가는 국토종주자전거길이 해파랑길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길을 해파랑길, 평화누리길, 낭만의 길, 국토종주자전거길로 부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몇 십년전만해도 동해바다의 특산물이었던 명태를 생태, 황태나 통태로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자작교를 건너 백사장이 꽤 넓은 삼포리해수욕장 입구를 지나자 백사장을 가로질러 설치한 대전차장애물이 바로 앞에 보여, 여기 고성군은 북한과 면해 있는 최전방 자치단체이다 했습니다. 죽왕면소재지를 지나 오호해수욕장에 오심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자 다가오는 여름에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가 크게 꺾일 것 같지 않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1110분 송지호(松池湖)에 바짝 다가갔습니다. 오호교를 건너 왼쪽으로 나 있는 천변길을 따라 걸어 오호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저 멀리 금강산으로 뻗어 올라가는 백두대간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가슴이 뛰었습니다. 송지호산소길로 접어들어 고개를 넘자마자 말로만 들어온 송지호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파란 색의 통통선 한 척이 정박해 있는 송지호는 강릉의 경포대처럼 넓지는 않았으나 길게 굽어져 있어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송지호는 고성군죽왕면의 오호리와 인정리, 그리고 오봉리에 걸쳐 있는 둘레 약 6의 석호(潟湖)입니다. 석호란 작은 만()의 입구에 모래가 쌓여 사주(砂洲)가 발달하면서 바다로부터 분리되어 형성된 호수를 이릅니다. 송지호를 비롯해 북한의 삼일포, 다음에 들를 화진포, 속초의 영랑호, 강릉의 경포 등 동해안에 집중되어 있는데 하천이 실어 나르는 토사로 점차 메워지고 있다 합니다. 노풍재에 오르면 맑은 물과 소나무 숲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칭송받는 송지호의 이름다운 자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데 그리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경승지가 명소로 평가받으려면 자연경관이 빼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조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전설이 뒷받침해주어야 비로소 명소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1,500년 전에 하루는 늙은 스님이 문전옥답을 가진 정거재라는 사람을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정거재가 시주를 거절하자 쇠절구를 던지고 사라졌는데, 쇠절구에서 계속 물이 솟아나 생긴 호수가 바로 송지호라는 것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입니다. 문전옥답이 호수로 바뀐 것은 정거재에는 불행이었지만, 오늘의 지역주민들에는 다행이 되어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이 또한 새옹지마라 부를 만 합니다.

 

  송지호를 둘러보는 길에 한옥마을인 왕곡마을 앞을 지났으면서도 들어가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흩뿌리는 비를 맞고 호숫가를 걷는 것도 추억이 되겠다 싶어 그냥 걸었는데, 알고 보니 봄비를 반긴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송지호는 물론 이 호수에 살고 있는 동식물이 모두 반기는 것 같아 저 혼자 우산을 꺼내들기가 민망했습니다. 빗방울이 점점 커져 인근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잠시 쉬다가 공현교 인근의 음식점을 들러 칼국수를 들면서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13시가 조금 지나 칼국수집을 나섰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잦아지리라 기대했던 비는 더 거세게 내렸지만 마냥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 없어 오후 탐방을 재개했습니다. 그새 공현진해수욕장의 텅 빈 해변은 모래가 다 젖어 쓸쓸해보였습니다. 지도를 보면 동해안은 거의 일직선으로 보이는데, 이번에 해안선을 따라 걸어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성군의 동해안은 해수욕장 마다 해안선이 안쪽으로 휘어 내륙 쪽으로 푹 들어간 만()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공현진해수욕장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배롱나무가로수 길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철조망이 연이어 쳐진 해안선을 따라 걸었습니다. 길옆 팬션에 딸린 조그마한 카페를 들러 따끈한 커피한잔을 들면서 철책선 너머 비를 맞고 있는 동해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가진항에는 여러 횟집과 건어물젓갈집이 들어섰고 사람들과 차들도 보였지만, 오전에 보았던 이야진항 만큼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가진항에서 왼쪽으로 꺾어 차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고개를 막 넘자 고성군민은 율곡부대장병 여러분을 응원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보였습니다. 여기 고성군도 휴전선과 가까운 최전방지역이다 싶었던 것은 25년 전 경기도의 휴전선 인근의 연천 시내를 지나면서 거리에 걸어놓은 사단장(?) 부임을 축하하는 프래카드를 본 일이 생각나서였습니다. 각이 져 모던해 보이는 스퀘어루트 갤러리(Square Root Gallery) 건물을 끝으로 점점 바다와 멀어졌습니다. 항목리에 들어서 모내기에 대비해 물을 담아 둔 논 사이로 낸 농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논을 가득 채운 흙탕물을 보면서 생각난 것은 1960년대 초반 중학교에 다닐 때 농번기방학 중에는 빠짐없이 저런 흙탕물에 들어가 모를 옮겨 심느라 거머리에 피를 빨아 먹힌 일이었습니다. 농로를 지나 제방으로 올라서자 남천의 물 흐름이 제법 빨라 보였습니다. 이 하천을 거슬러 천변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천 건너 버드나무들이 떼 지어 자라고 있는 습지(?)를 사진 찍었습니다.

 

  1550분 간성버스터미널에 도착해 31번째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쳤습니다. 남천의 천변을 따라 걸으면서 3개의 보를 보았습니다. 백두대간 동쪽의 하천은 서쪽의 하천보다 발원지에서 바다와 만나는 하구까지 거리가 짧고 경사가 급해 물 흐름이 빠르고 수량도 많지 않습니다. 짧은 거리에 보가 3개씩 만들어진 것은 그대로 물을 바다로 흘려보냈다가는 근처 농지에 물을 대기 어려워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하나 특이 한 것은 하천 물이 하구에 이르러 대다수가 해변의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가 바다로 합류되어서인지 하천의 수로가 사라지거나 아주 좁게 보였습니다. 남천교를 건너 고개 너머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은 간성의 시가지 길이어서 건널목을 두 번 건너야했습니다. 달홀공원을 지나 도착한 간성버스터미널에서 20분 남짓 기다렸다가 1630분에 출발하는 동서울터미널 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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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평화누리길 탐방 덕분에 하루 종일 해변 길을 원 없이 걸었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는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여려 곳의 해수욕장과 항구를 이어서 걸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이번에 청간정을 올라 조선의 문신인 택당 이식의 한시를 읽게 된 것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편액에 실린 누정(樓亭) ()는 현장에서 감상해야 작자의 표현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친 김에 한시 淸澗亭을 지은 택당 이식에 관해 한 가지 짚어보고자 합니다. 택당 이식은 신흠(申欽),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히는 문인이자, 대사헌 및 형조, 이조와 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조선 중기의 명신입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했다가 인조반정 후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된 이식은 김상헌과 함께 심양으로 잡혀가기도 했던 올곧은 사대부로, 문집으로는 택당집(澤堂集)을 남겼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는 대로 이식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올곧은 사대부 이식이 자유분방하고 인목대비의 폐모에 동조한 허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리 만무했다는 것은 아래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이의 후손 삼대에 걸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보응(報應)을 받은 것이니, 도적을 높이는 책을 지은 때문이다. 허균과 박엽 등은 그 책을 좋아하여 도적의 우두머리의 별명으로써 각기 자신의 호를 삼아 서로 농하여 즐기었다. 허균이 또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어 수호전(水滸傳)에 비의(比擬)하였다. 그의 무리 서양갑, 심우영 등이 몸소 그 행위를 본받아 한 마을이 가루가 되었고 허균도 또한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수호전(水滸傳)지은 이의 삼대가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된 보응보다 심한 것이다.”

 

  위 글 중 허균이 또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어 수호전(水滸傳)에 비의(比擬)하였다(筠又作洪吉童傳, 以擬水滸)”라는 문장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가 다름 아닌 허균(許筠)이라고 증언하는 것이어서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위 글을 쓴 택당 이식(1584-1647)은 허균(1569-1618)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의 인물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허균을 험담하는 위 글이 후세에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소설의 하나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가 허균이라고 증언해주고 있는데, 이는 이식이 의도한 바가 아닌 것 같아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요즘 들어 국문학계에서는 현전하는 최고본(最古本)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서 허균이 죽고난 후인 숙종 때 활동한 장길산이 이 소설에 등장한다는 이유로 허균이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존의 학설은  배척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하의 이식이 혹시라도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