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화진포해양박물관-원당리쉼터-화진포해양박물관
*탐방일자: 2021. 5. 18일(화)
*탐방코스: 화진포해양박물관-초도습지-죽정습지-화포습지-금강습지
-이승만초대대통령별장-화진포해양박물관
*탐방시간: 11시15분-15시40분(4시간25분)
*동행 : 문산중 황규직/황홍기 동문
평화누리길 탐방길에 강원도고성군거진읍의 화포리에 자리한 화진포를 들러 호수를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여기 화진포호가 내륙의 이름난 호수들과 다른 점은 오랜 옛날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들어왔다가 갇혀서 만들어진 석호(潟湖)라는 것입니다. 화진포교 다리를 경계로 북호와 남호로 나뉘는 화진포호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호(潟湖)로 그 둘레가 약16Km에 달합니다. 이번에 걸은 ‘화진포석호둘레길’은 강원도에서 ‘평화누리길 20코스’로 조성한 길로, 총 길이는 10.8Km 입니다. 이 호수를 환주하면서 병풍처럼 바다를 가로 막고 서있는 울창한 소나무 밭을 지났고, 때 맞춰 연분홍색의 해당화 꽃이 활짝 핀 호숫가도 걸었습니다. 한 바퀴 다 돌고나자 화진포의 풍광이 이토록 빼어날 진데, 기존의 관동8경에다 화진포를 더해 관동9경으로 부르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화진포호와 석호는 불가분의 관계여서 석호에 대한 이해 없이 화진포를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석호(潟湖)는 사취(砂嘴), 사주(砂洲) 등에 의하여 바다와 거의 분리되면서 생긴 호수를 이릅니다. 석호의 형성과정은 이우평님의 저서 『한국지형산책1』에 아래와 같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석호는 신생대 제4기를 대표하는 지형 가운데 하나이다. 약1만8천년전부터 마지막 빙하가 물러가면서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하여 약6천년전 현재의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이때 동해안이 침수되는 과정에서 산지(山地) 말단부와 골짜기 깊은 곳까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좁은 만을 형성하고 톱니와 같은 해안선이 생겨났었다. 이후 배후 산지에서 하천을 타고 운반, 퇴적된 모래가 연안 조류(潮流)와 파랑(波浪) 작용으로 사주(砂洲)를 형성하고, 이어 사주가 성장하여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격리된 호수들이 생겨났다.”
해안지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해안에 석호는 대략 3천년전에 만들어졌다고 추산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걸은 화진포호가 만들어진 것은 고조선 시대쯤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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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11시15분 화진포해양박물관에서 ‘화진포석호둘레길’ 탐방에 나섰습니다. 아침 일찍 대진항을 출발해 평화누리길의 끝점인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올라 북한 땅을 조망한 후 출발지인 이곳 화진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화진포석호둘레길은 해양박물관을 출발해 다시 돌아오기까지 시계반대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대진중·고 교문을 지나 육모정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초도습지 앞에 다다랐습니다.
초도습지는 죽정습지, 화포습지, 금강습지와 더불어 화진포호에 조성된 생태습지입니다. 화진포호로 흘러들어오는 토사 및 유기물이 쌓여 수질이 오염되는 것을 예방하고 자정능력을 높이기 위해 만든 생태습지 덕분에 깨끗한 호수를 볼 수 있습니다. 초도습지는 화진포호 북호에 자리한 단 하나의 생태습지로, 이 습지의 면적은 약36천㎡로 죽정 습지 다음으로 넓습니다.
초도습지를 지나 차도로 올라가 죽정쉼터에 이르렀습니다. 차도 아래로 길안내 표지목이 가리키는 대로 호숫가를 따라 낸 길로 생각하고 왼쪽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산자락을 돌아 데크 쉼터에 이르자 길이 끊겨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쉼터에서 점심을 들고나서, 차도로 되돌아가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소나무숲산책로의 들머리를 지나자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이승만별장길이 보였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남진해 다다른 삼거리에서 직진하는 별장길을 버리고 오른 쪽 화진포호둘레길로 들어서자 죽정습지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죽정습지는 화진포호 서쪽에 자리한 생태습지로 그 넓이가 98천㎡에 달합니다. 화진포호의 4개 습지 중 가장 넓은 죽정습지는 생태학습로가 잘 나있습니다. 습지 안으로 들어가면 습지관찰데크가 4개소에 설치되어 습지의 참모습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호숫가에 꽤 넓게 조성된 갈대숲이 화진포호로 흘러들어오는 바깥 물을 정화해 평시에는 호수물이 맑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위쪽 논에서 이앙기로 모를 내느라 탁해진 흙탕물이 수로를 통해 유입되어서인지 호수가 희뿌옇게 보였습니다. 죽정습지가 북미나리에서 자생지라는 것은 안내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연 이틀 걷느라 지쳐 습지 안으로 이어지는 데크 길과 야자매트길을 걸어보지 못하고 습지 바깥으로 낸 화진포호둘레길을 따라 진행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죽정습지를 거쳐 시골마을을 지나는 차도로 들어섰습니다. 월안길 차도를 따라 남진해 원당리 쉼터에 다다른 시각은 13시10분이었습니다. 하루 중에 기온이 가장 높은 시각인데다 쉬지 않고 1시간 넘게 걸어 쉼터 정자에 앉아 잠시 쉬었습니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호수에 인접해 나있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호숫가 갈대숲을 제대로 사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자전거거치대와 정자가 세워진 쉼터에서 잠시 멈춰 먼발치로 보이는 죽정습지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원당리쉼터에서 십 수분을 걸어 연보라색의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로 채워진 화포습지를 지났습니다.
화포습지는 그 면적이 31천㎡에 불과해 앞서 지나온 죽정습지의 1/3에 못 미칩니다. 화진포호 남단에 위치한 이 습지의 특징은 기존 양식장 주변에 테마식물인 수련을 도입했다는 것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호숫가에 터 잡은 갈대밭을 보고 여기 화포습지도 규모는 작지만 역시 습지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화포습지를 막 지나 둘레길은 잣골길로 이어졌습니다. 길가의 고송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시멘트블록길을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면서 하얀 집의 ‘lakehouse 山水通門’이 자리한 언덕을 넘었습니다. 북쪽으로 보이는 언덕 위 하얀 건물이 이승만별장인 것은 산책 중인 아주머니께 물어 확인했습니다.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자 호수와 내륙의 완충지를 뒤 덮은 갈대숲이 호숫가를 이어가며 그리는 선(線)이 비록 곡선이었지만, 잘 디자인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는 것처럼 깔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결이 잔잔히 이는 화진포호를 내려다보노라니 제 마음도 평안해져, 수 분전 안내판에서 읽은 화진포 관련 전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인색하고 성격이 고약한 시아버지 이화진은 스님에 시주는 하지 않고 소똥을 퍼줍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얼른 쌀을 퍼서 드리고 시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빕니다. 며느리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스님의 말씀을 깜박 잊고 여기 고총고개에 이르러 뒤를 돌아봅니다. 논과 밭은 물론 마을도 물에 잠겨 호수가 되자 며느리는 그만 돌이 되어 버립니다. 마을사람들이 며느리를 고총서낭신으로 모시자 농사도 잘 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는 이 전설에서 화진포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전설에서 제가 읽은 것은 며느리가 시아버지보다 낫다는 미래지향적인 긍정적 전망과 부귀영화나 권세가 아니고 풍작과 무병을 원하는 당대 백성들의 소박한 소원이었습니다. 이런 소원도 이루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전설을 통해 표출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잣골길을 따라 북진하다 오른 쪽으로 꺾어 이 호수 동쪽 끝의 금강습지에 이르렀습니다. 금강습지는 전날 지난 습지여서 눈에 익었습니다. 습지로 조성된 지역은 길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습지의 면적은 약27천㎡ 정도로, 화진포의 4개 습지 중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금강습지와 화진포호를 막은 배수문을 지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바로 전날 걸은 포장도로입니다. 그럼에도 느낌이 새로웠던 것은 하늘이 잔뜩 찌푸렸던 전날과는 달리 날씨가 좋아 구름 한 점 없는 데다, 이미 평화누리길의 끝점인 통일전망대를 다녀왔다는 안도감에 젖어 더 먼 곳을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어서였습니다.
이 길을 따라 북진하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이른바 김일성별장으로 불리는 ‘화진포의 성’이었습니다. 시간이 넉넉지 못해 화진포생태박물관을 들르지 못하고 곧 바로 김일성별장으로 향했습니다. 이 일대 관광명소를 다녀온 두 친구와 헤어져 저 혼자 김일성별장을 찾아갔습니다. 김일성별장이 전제군주의 별장답지 않게 호화롭지 않은 것은 김일성이 지은 것이 아니고 1938년 선교사 샤우드홀 부부의 의뢰로 독일의 망명 건축가 베버가 지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오직 1948년부터 2년간만 사용했을 뿐인데 김일성별장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별장은 2층의 석조 건물로 옥상에 오르자 금강산을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옥상에서 망원경의 도움 없이 조망한 명사십리(鳴砂十里)의 화진포해수욕장과 신라시대 수군기지로 사용했던 금구도, 그리고 쪽빛의 동해바다는 한 번만 보아도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풍광이 수려했습니다. 1층과 2층의 전시물 중에서 제 눈을 끈 것은 남북의 언어비교였습니다.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은 북한 말 ‘가마치’가 ‘누룽지’ 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남과 북은 무려 76년이나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체제로 살아왔습니다. 소득격차가 크게 나면서 문화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언어가 점점 달라지는 것은 삶의 양식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삼국시대처럼 언어소통이 불가능해 같은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기가 점점 힘들어 지지 않나 싶어 걱정됐습니다.
김일성별장에서 나와 그 아래 이기붕부통령별장을 들렀습니다.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이 북한공산당의 간부 휴양소로 사용된 것은 남북이 분단되고 나서입니다. 휴전 후 박마리아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했다고 안내전단에 소개되어 있는데, 혹시라도 남편 이기붕의 권세에 힘입어 자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보았습니다.
다음 방문지는 화진포교 다리 건너 야산 중턱에 자리한 이승만초대대통령별장이었습니다. 이승만이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1910년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선교사를 만나러 왔다가 화진포의 풍광에 매료된 이승만은 화진포를 수복하고 나서 선교사 집이 있던 이 곳에 작은 별장을 짓고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이승만대통령별장을 먼저 들렀습니다. 안내전단이 따로 없고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이승만대통령의 업적을 정확히 옮겨 적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 둘러만 보았습니다. 그 위 이승만대통령화진포기념관과 맨 아래 이승만초대대통령전시관 순으로 돌아보면서 이른바 김일성별장에 건물의 규모가 훨씬 못 미친다고 생각하자 건국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이승만대통령화진포기념관에 사진이 전시된 세 권의 책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은 『Japan Inside Out』 , 김현태가 지은 『이승만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양동안이 지은 『대한민국 건국사』입니다. 『Japan Inside Out』 은 한 번 읽어보았으나 나머지 두 권은 아직 읽지 못해 구해서 읽어보고자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國富兵强/永世自由”를 보고 이승만대통령이 조선 5백년의 오랜 관습과 전통문화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 가능했다고 봅니다.
화진포교 다리를 다시 건너 출발지인 화진포해양박물관 앞으로 돌아간 시각은 15시40분이었습니다. 먼저와 기다리는 두 친구와 함께 택시를 불러 간성버스터미널로 이동하는 것으로써 화진포석호둘레길 탐방을 끝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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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는 바다와의 교류가 차단되면 이내 죽음의 호수로 변해버립니다. 기사분의 전언에 따르면 고성군은 매년 화진포호 하구에 쌓인 사구를 일부 제거해 호수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록 수로를 넓힌다고 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진포호에 4개소의 생태습지를 조성한 것도 호수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서입니다.
수로를 넓히거나 생태습지 조성만으로 화진포호를 죽음의 호수로 변화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나봅니다. 화진포호를 구하는 것은 장마나 폭풍에 의해 바다와 일시적으로 연결되는 갯터짐 현상입니다. 갯터짐이란 돌발적인 해일과 강한 파도로 바닷물이 호수로 들어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갯터짐 현상 덕분에 석호는 항상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 결과 플랑크톤이 풍부해져 호수전체의 생명력이 왕성해지고, 안정된 먹이사슬이 형성된다고 이우평님은 그의 저서 『한국지형산책1』에 적고 있습니다. 화진포호가 숭어, 전어, 멸치, 농어 등의 바닷고기와 붕어, 가물치, 망둥어 등의 다양한 민물어종이 어우러지는 어족 자원의 보고가 될 수 있는 것도 갯터짐 덕분입니다.
이번에 화진포호를 빙 둘러보고 자연의 변화는 이렇듯 오묘해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화진포를 노래한 대중가요 가수는 「울릉도 트위스트」를 불러 인기를 모은 이씨스터즈입니다. 이 가수가 부른 황우루 작사 작곡의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의 노랫말이 호숫가 노래비에 새겨져 있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1.
황금물결 찰랑이는 정다운 바닷가
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 아
꽃구름이 흘러가는 수평선 저넘어
푸른꿈이 뭉게뭉게 가슴- 적시면
조개껍질 주어모아 사랑을 수놓고
영원토록 변차말자 맹세-한 사-랑
2.
큰물결이 반짝이는 그리운 화진포
모래위에 새겨놓은 사랑-의 언-약
흰돛단배 흘러가는 수평선 저멀리
오색곰아 곱게곱게 물결-쳐 오면
모래섬을 쌓아놓고 손가-락 걸고
영원토록 변치말자 맹세-한 사-람
<탐방사진>
'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 > 평화누리길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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