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대진항-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통일전망대
*탐방일자: 2021. 5. 18일(화)
*탐방코스: 대진항-금강산콘도-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통일전망대
*탐방시간: 7시28분-10시30분(3시간2분)
*동행 : 문산중 황규직/황홍기 동문
장장 550Km를 걸어 경기도 김포의 대명항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평화누리길을 완주한 것은 제게는 오래 기억할 만한 쾌거(快擧)입니다. 경기도와 강원도가 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일컫는 ‘평화’와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인 ‘누리’라는 두 단어를 모아 ‘평화누리’라고 이름을 붙이고, 휴전선에서 멀지 않은 데다 평화누리길을 조성한 덕분에 이 길을 따라 서해의 대명항에서 동해의 통일전망대까지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통일전망대에 올라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무리하면서 이 길을 걸어온 많은 분들처럼 저도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겼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1828-1910)가 창작한 소설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터 1820년까지 광활한 러시아를 배경삼아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역사를 잘 그려 낸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3년 전에 최일호님이 번역한 홍신문화사의 『전쟁과 평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구체적인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아 그때 쓴 독후감을 찾아 읽었습니다.
“『전쟁과 평화』 는 1,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장편소설로, 프랑스의 보나파트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패전해 퇴각하기까지 전쟁 상황, 그리고 당시 러시아에서 살고 있던 민중과 이들을 기반으로 살고 있던 귀족들의 삶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통해 역사는 몇몇 엘리트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민중에 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처참한 전쟁을 겪으면서 저마다 시련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을 읽은 분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전쟁과 평화’라는 명제를 가지고 곰곰히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톨스토이만 전쟁과 평화라는 명제에 천착한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전쟁과 평화라는 과제를 풀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춘근교수는 저서 『전쟁과 국제정치』에서 전쟁과 평화에 접근하는 두 관점을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이상주의적 관점입니다. 좋은 국제법과 제도, 민족주의가 확립되면 세상은 전쟁이 없어져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이런 관점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일본이 강점한 조선 땅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3.1운동도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현실주의적 관점입니다. 국가들은 저마다 최고의 국가이익인 국가생존을 지속시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고 믿는 관점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아는 현실주의적 관점에 충실한 저서 『20년간의 위기』를 지었고,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사회』 라는 저서를 지어 현실주의적 관점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오늘날 우위를 점하고 있는 관점은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이 아닌가 합니다.
전쟁과 평화는 대등한 개념이 아니어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우리가 달성해야할 목표이고, 전쟁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 풍미하는 오해가 있는바, 그것은 바로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일본과 전투 한번 하지 않고 평화롭게 조선을 넘긴 고종임금과 을사오적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외교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서희는 위인으로 받들면서, 을지문덕, 강감찬이나 이순신장군 등을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를 망각하고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쟁의 억제는 평화의 갈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일으키면 필패한다는 것을 적국에게 확실하게 일깨워줄 만큼 국방을 강화하고, 이를 뒷받침하고도 남을 만큼 국부를 쌓아가며, 소중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국민적 결의를 굳건히 하는 것만이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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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7시57분 대진항을 출발했습니다. 바닷가에서 해오름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은 전날 밤의 과음 때문이었습니다. 생선회가 싱싱하고 바다공기가 신선해 숙취에 뒤따르는 두통과 배탈을 면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대진항 북쪽의 방파제를 걸어 끝자리에 세운 진적색의 등대에 다가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사면체의 빨간 등대를 어루만지면서 기둥에 부착한 「등대가 궁금 海」 쪽지 글을 읽었습니다. 이 쪽지 글에는 ’고성대진항북방파제등대’라는 긴 이름을 가진 높이 9.4m의 홍원형콘크리트조의 이 등대가 비치는 등대불빛의 광달거리(光達距離)가 8해리(24Km)에 이른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등대의 기능이 위험물표시에 있다는 것도 “기능 : 우현표지 - 배가 들어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위험물표시”라는 글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등대의 등질(점멸방식)은 “ FL-R-5s - 5초 주기로 홍색빛이 1번(1초) 점멸“로 표시되었는데 FL은 Flashing Light, R은 Red, 5s는 5seconds의 약자로 알고 있습니다.
(위 쪽지 글에서 ‘고성대진항북방파제등대’ 의 광달거리 8해리를 24Km로 적은 것은 오기(誤記)인 것 같습니다. 1해리는 1,852m이므로 8해리는 15Km를 넘지 않습니다.)
제가 작달막한 등대의 제원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바로 뒤 언덕 위에 자리한 새하얀 대진등대와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팔면체의 대진등대는 31m 높이의 등탑에서 발하는 불빛이 12초마다 한번 깜박이며 광달거리는 37Km에 달하는 것으로 안내문에 적혀 있었습니다. 대진등대가 앞서 본 고성대진항북방파제등대보다 성능이 훨씬 강력하리라는 것은 한 번 보는 것으로써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더욱 그 차이가 크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시달거리(視達距離)와 광달거리와(光達距離)의 관계입니다. 두 거리 모두 지구가 둥글어 관측자나 광원이 위치한 높이에 따라 그 거리가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높이에 대한 수치를 정확히 몰라 시달거리를 계산해보지 못했습니다. 추가로 고성대진항북방파제등대의 방파제 높이와 대진등대의 언덕 높이에 관한 자료가 있다면 노계현의 저서 『조선의 영토』에 실린 산식(算式) 「D=2.09(√H + √h )」에 넣어 시달거리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 산식에서 D는 시달거리(視達距離, mile), H는 물체의 해면상 높이(m), h는 눈높이(眼高, m)를 가리킨다고 위 책은 적고 있습니다.
대진등대에서 내려가 해변가에 자리한 고성평화지역아트센터를 지나면서 내륙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의 수로가 하구에 이르러 갑자기 좁아지는 현상을 다시 한 번 목도했습니다. 천진해변에서 걸어와 여기 마차진해변에 이르기까지 눈여겨 본 하천은 하나같이 바다를 만나면 수로가 좁아졌습니다. 바다에 이르러 하천의 수로가 갑자기 90도 가깝게 꺾이면서 좁아지는 것도 관찰했습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백두대간의 동쪽 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은 동해에 이르기까지 유로의 거리가 짧고, 중간에 유입되는 지천도 거의 없어 백두대간 서쪽의 계곡에서 발원해 서해로 흐르는 하천보다 흐르는 물의 양이 훨씬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량(流量)이 적으면 유로가 파도에 밀려 형성된 사주에 막혀 휘어지면서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추론은 관련 문헌을 찾아 확인한 것은 아니어서 좀 더 조사해볼 뜻입니다.
해변가를 지나 차도로 들어서자 금강산콘도가 가깝게 보였습니다. 2004년 가을에 서울대학교의 생활과학대가 주관하는 AFB(Advanced Fashion Bisiness)과정을 같이 이수한 패션업체 사장 분들과 함께 2박3일 코스로 금강산관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여행 첫날밤을 묵은 금강산콘도를 17년 만에 그 앞을 지나자, 그때 동행했던 여러분들이 생각났습니다. 1998년에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2008년에 여성 관광객 한 분이 이른 아침에 해변을 거닐다 북한군에 피격된 사건의 발발로 중단된 상태여서, 여기 금강산콘도를 찾는 관광객은 그때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 같습니다.
9시14분 통일안보공원에 다다라 평화누리길의 도보여행을 끝마쳤습니다. 통일안보공원은 통일전망대로 가는 관문으로, 이 안의 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를 들러 출입신고를 필했습니다. 여기서부터 10Km 떨어진 통일전망대까지 도보여행이 금지되어 5만원을 들여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민간인이 출입할 수 있는 최북단의 명파마을을 지나 제진검문소에 이르러 기사분이 출입신고서를 제출하고 통과했습니다. 통일전망대에서 하차해 2년 전에 개관한 고성통일전망타워 안으로 들어선 시각은 9시58분이었습니다.
고성의 통일전망대 탐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1998년 여름 경기도의 과천 집을 출발해 파주와 연천, 그리고 강원도의 철원을 거쳐 화천시내에서 일박한 후, 다음 날 평화의 댐을 둘러보고 양구와 인제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북진해 여기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올랐었습니다. 23년 전 집사람과 함께한 자동차여행코스는 이번에 친구들과 함께 걸은 평화누리길의 도보코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통일전망타워가 개관하기 훨씬 전이어서 동쪽 바로 옆에 자리한 2층의 흰색 건물인 통일전망대를 올라 북녘 땅을 조망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감격했던 23년 전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새로 지은 통일전망타워 안으로 들어가 안내전단을 뽑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커다란 금강산의 사진 판넬을 보고 앞에 보이는 금강산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확인했습니다. 2층에서 맨 꼭대기 7층 전망대까지는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전망대에 오르자 가림 막이 없어 북한 땅을 사진 찍기에 좋았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북쪽으로 곧게 뻗은 금강산육로는 17년 전 금강산으로 관광 갈 때 지났던 길입니다. 그 길을 보자 길 양 옆에 설치한 초록색 철망 울타리와, 일정 간격으로 보초를 서고 있는 작은 키의 수척해 보이는 북한병사들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왔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만, 금강산육로 오른 쪽으로 나란히 나있는 금강산철로길을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백사장 뒤 쪽의 해금강과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구선봉과 국지봉, 그리고 안쪽으로 외금강의 몇 봉우리들이 23년 전에 와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잘 보이는 것은 그 사이 금강산관광을 다녀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7층에 전시된 전시물은 주로 남북관계와 남북의 여로모를 비교한 판넬들이었습니다. 약13만명의 이산가족 중 그 반이 넘는 7만명 가량이 사망했다는 글을 보고 분노한 것은 남북한의 최고수뇌들이 몇 차례 만나 회담을 가졌으면서도 가장 인도적인 이산가족상봉조차 이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남북한 간에 어떤 신뢰도 구축되지 못한 결과여서 조만간 나질 것이라는 전망조차 불가능해 더욱 그러합니다.
통일전망타워를 빠져나와 ‘351고지전투전적비를 들렀습니다. 351고지전투는 동해안의 요충지인 351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1951년7월15일부터 1953년7월1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야 전투가 종식되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장엄하게 전사한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자 세운 이 전적비 옆에는 공군전투전적비가 같이 세워져 있었으며, 6.25 전쟁 때 주력 전투기로 활약한 F86F Sabre 도 전시되었습니다.
10시30분 통일전망대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경기도 김포의 대명항에서 시작한 장장 550Km의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쳤습니다. 강원도에서 조성한 평화누리길을 그대로 따라 걷지 못한 몇 곳은 여건이 되면 다시 걸을 뜻입니다. 민통선 안을 걸어서 지날 수 없는 철원의 ‘두루미 길’과 화천의 ‘화천평화의 길’, 코로나19로 출입이 금지된 양구의 ‘두타연 길’은 다른 길로 우회해 진행했는데 출입이 자유로워지면 제 길을 걸어볼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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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을 탐방하면서 묵언의 대화를 나눈 우리의 산하는 대략 이러합니다. 누리길 탐방은 산줄기를 이어 걷는 종주산행이 아니어서 주로 물줄기를 따라 걸었습니다. 김포와 고양의 한강, 파주와 연천의 임진강, 연천의 한탄강지류인 차탄천, 철원의 한탄강과 그 지류인 남대천 및 와수천, 화천과 양구의 북한강, 양구의 북한강의 지류인 수입천, 인제의 소양강 지류인 인북천과 북천, 고성의 천진천은 평화누리길을 탐방하면서 따라 걸은 물줄기들입니다. 천진리에서 통일전망대까지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길지 않은 천진천-문암천-삼포천-남천-북천- 부봉천 등의 하천을 차례로 건너 진행하면서 송지호와 화진포호 등 석호(潟湖)를 따라 걷기도 했습니다. 평화누리길을 따라 걸으며 넘은 큰 고개는 몇 곳 되지 않습니다. 철원과 화천을 경계 짓는 한북정맥 상의 하오현, 화천의 일산과 재암산 사이의 안부에 자리한 해산령, 양구의 동면과 해안면을 가르는 도솔지맥에 자리한 돌산령은 그 아래 긴 터널을 통과해 넘었으며 인제와 고성에 걸터앉은 백두대간의 미시령은 고개 꼭대기까지 걸어서 넘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우리의 산하를 만나볼 수 있어 평화누리길을 걷는 동안 내내 행복했습니다.
남북이 통일되어 휴전선 너머로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을 따라 제2의 평화누리길을 낸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 길을 따라 걷고자 합니다. 추가령구조곡은 광주산맥과 마식령산맥 사이 대략 서울∼원산을 잇는 북북동∼남남서 방향의 단층선곡(斷層線谷)을 이릅니다. 과거에는 이 구조곡을 단층에 의해서 형성되는 지구대와 동일시하여 추가령지구대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이 지대가 저지대로 된 것은 중국방향의 단층선에 연하여 화강암이 관입(貫入)하고, 이 화강암이 차별침식(差別浸蝕)을 받은 결과로 지구대와 같은 지형이 형성된 것으로, 지구대로 인정될만한 단층운동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 추가령구조곡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추가령구조곡이 특이한 것은 이 구조곡을 경계로 우리나라의 지체구조(地體構造)가 랴오둥 방향의 구조가 탁월한 북쪽과 중국방향의 구조가 탁월한 남쪽으로 양분된다는 것입니다. 휴전선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남과 북의 분단선이라면 추가령구조곡은 자연이 갈라놓은 분단선이어서 크게 대비된다 하겠습니다. 추가령구조곡 또한 수많은 비경을 숨겨놓았을 것이기에 생각만 해도 콩닥콩닥 가슴이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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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고 했습니다. 먼 길을 함께 걸어온 문산중학교 황규직/황홍기 두 동문에 축하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졸고를 실을 공간을 마련해주신 경기도평화누리길 카페에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매번 긴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앵베실님, 소그미님 등 여러 카페 회원님의 격려 덕분에 긴 여정을 잘 마무리하고 감사인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탐방사진>
'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 > 평화누리길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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