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평화누리길 탐방기

평화누리길탐방기32(간성버스터미널-거진항-대진항)

시인마뇽 2021. 5. 29. 08:13

*탐방구간: 간성버스터미널-거진항-대진항

*탐방일자: 2021. 5. 17()

*탐방코스: 간성버스터미널-북천교-번암해수욕장-거진항-화진포

               -초도해수욕장-대진항

*탐방시간: 1030-1834(8시간4)

*동행 : 문산중 황규직/황홍기 동문

 

 

  이번 평화누리길 탐방은 또 다시 해내기가 쉽지 않은 나들이여서 앞으로 오래 오래 기억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친구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은 구간은 간성터미널에서 대진항에 이르는 20Km의 해안길입니다. 제가 이런 탐방을 해보겠다고 또 다시 나서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번 탐방은 비, 친구, 그리고 장거리 걷기 등 3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이루어질 수 있다 싶어서입니다. 몇 년 후면 긴 시간 비를 맞으며 길을 걷겠다고 나서기도 쉽지 않고, 7-8시간 걸려 20Km가 더 되는 먼 길을 걸을 만큼 체력이 계속 뒷받침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려우며, 이미 70세를 훌쩍 넘긴 친구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건강을 유지해 같이 걷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파도와 바위를 이번에 유달리 눈여겨 본 것은 앞으로는 강줄기 따라 걷기에 전념할 뜻이어서 비 내리는 해안가를 걸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일이 흔치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동해안의 번암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해안가 바로 옆에 반쯤 바닷물에 잠긴 바위들을 보았습니다. 확언할 수 없지만 이 바위는 지도상의 위치로 보아 벼락바위가 아닌가 합니다. 잠시 멈춰 서서 바다에서 밀려오는 푸른 파도가 여기 벼락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로 바뀌면서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파도를 보고 문득 생각난 시가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의 서정시 그리움입니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등단 4년 후인 1935년이니, 이 시는 시작(詩作) 활동 초기에 지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시는 어쩌란 말이냐를 네 번이나 반복하면서 사랑의 아픔을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라는 시구(詩句)를 읽고 이 시가 그저 그런 사랑 타령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와도 까딱 앉는 대표적인 뭍은 바위입니다. 같은 뭍이라도 모래는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곤 합니다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임을 바위로 치환하면 파도가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것이, 바위는 파도의 공세에 쉽게 넘어가지 않겠지만 한 번 넘어가면 파도를 등지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데 뭍같이 까딱 않는 임도 언젠가는 파도의 끈질기고도 진정어린 구애에 감동해 돌아설 날이 있으리라는 전망이 가능하기에 이 시를 마냥 신파조의 노래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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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1030분 간성터미널을 출발했습니다. 아침649분에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한 대진행 버스가 해발500m 대의 진부령을 넘어 간성에 이르기까지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간성에서 하차해 아침을 든 후 우비를 입고 지난번에 건넜던 남천교로 이동했습니다. 평화누리길은 남천교 앞에서 왼쪽 아래 남천의 북쪽 제방 길로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4-5분 걷다가 정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한창 모내기가 진행 중인 들판을 가로 질러 해당화마을 동호1리 삼거리에서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른 쪽으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조금 더 걸어가자 동해바다가 보였습니다.

 

  걷기를 시작한지 한 시간 후에 도착한 북천은 데크다리로 건넜습니다. 여기가 양양과 원산을 이어주었던 전장 192.6Km의 동해북부선의 북천역이 자리했던 곳이라는 것은 고성이 옛 동해북부선 철도의 요충지임을 홍보하는 안내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북천역과 북천철교가 복원되어 분단되기 전까지 다녔던 기차가 다시 운행되려면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살아생전 그런 감격스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바로 옆 동해와 만나는 북천의 하구를 사진 찍은 후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첫 삼거리에서 야산을 끼고 오른 쪽으로 돌아 바다 쪽으로 향했습니다.

 

  1250분 번암리 마을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첫 삼거리에서 산자락을 돌아 직진하자 배수펌프장이 나타났습니다.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숱하게 보아온 배수펌프장을 바닷가에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 펌프장은 잘은 몰라도 논이 침수되면 바다로 물을 빼내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배수장에서 번암리 굴다리까지는 바닷바람을 막고자 방풍림으로 조성한 해송림(海松林)을 따라 북진했습니다. 물이 흥건한 굴다리를 위로 넘어 번암리부대입구를 지나자 번암리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문을 연 음식점을 찾아가 점심을 들면서 처음으로 반시간 넘게 쉰 후 1336분에 오후 탐방을 이어갔습니다.

 

  번암해수욕장을 지나 바닷가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습니다. 해안의 나지막한 구릉 쪽으로 대전차장애물(?)이 설치된 것을 보고 전방지역의 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이 실감됐습니다. 철조망 바로 옆에 낸 데크 길을 지나 만난 바다 속의 바위들이 지도에 나오는 벼락바위인 것 같습니다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해안가로 밀려오는 푸른 파도가 벼락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로 부서지면서 나는 소리가 참으로 힘차게 들렸습니다. 밀려오는 파도가 지녔던 운동에너지가 벼락바위를 만나 소리에너지로 전환되면서 철썩 철썩 파도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몇 십m 높이의 해일이 밀려오면, 산채 같은 파도도 파도려니와, 포효하는 파도소리에 놀라 넋을 잃을 것 같습니다.

 

  1440분 거진항에 이르렀습니다. 벼락바위를 출발해 해변에 자리한 성원상뜨빌 아파트를 지나자 길 건너로 거진읍사무소가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직진해 거진1교를 건너면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자산천의 하구를 사진 찍었는데, 이 하천도 앞서 지나온 남천이나 북천과 마찬가지로 하구에 이르러서는 바다로 흘러나가는 유로(流路)가 갑자기 좁아졌습니다. 거진1리해수욕장을 지나다 고성명태산업관광홍보지원센타를 들러 명태의 어원과 22가지나 되는 다른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전시물을 보았습니다. 명천에 사는 태씨라는 어부가 잡은 고기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명태의 다른 이름은 북어, 노가리, 춘태, 시태, 원양태, 선태, 동태, 꺽태, 무두태, 백태, 막물태, 대태, 추태, 망태, 지방태, 코다리, 생태, 황태, 싼태, 간태, 노랑태, 짝태 등입니다. 북어, 노가리, 코다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름이 로 끝나는 명태가 동해에서 더 이상 잡히지 않는 것은 수온 상승 때문이라 합니다.

 

  홍보지원센타에서 얼마간 북진해 거진항에 이르렀습니다. 거진항이 전번에 들른 가진항과 다른 것은 규모가 조금 더 크고 대한민국 해군의 군함이 정박해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여기 해변에 이 지역은 군사작전지역으로 군사시설을 촬영하거나 드론을 날리거나 군사시설 훼손 등 경계작전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진 것은 거진항이 단순한 어항이 아니고 군항의 기능도 같이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항구에 날렵한 요트가 정박해 있고, 그 옆에 텐트가 쳐져 있어 군항 특유의 긴장된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항구 뒤에 자리한 야산 중턱에 지붕의 색상이 다채로운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풍경은 바로 앞 넓은 바다와 대비되었습니다.

 

  1627분 화진포의 금강습지 앞에 다다랐습니다. 거진항이 끝나는 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변도로는 참으로 환상적이어서 집사람과 함께 걷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결혼해서 23년간 같이 산에 오른 것은 꽤 많습니다만, 해변은 제주도에서 딱 한 번 같이 걸은 것이 전부입니다. 작년10월에 개장된 백섬해상전망대에 올라 수평선이 보이는 일망무제의 동해바다를 바라보자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뭍에서 백도를 있는 폭2.5m의 다리를 따라 137m를 걸어 해발 25m의 전망대에 오르자 먼발치로 해금강과 가진항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길가에 부착한 올바른 해루질 문화에 동참해주십시오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해루질이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보았습니다. 해루질의 사전적 정의는 밤에 얕은 바다에서 맨손으로 어패류를 잡는 일입니다. 속초해양경찰서에서 변형갈고리나 작살 등의 불법도구 사용을 금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것을 보아도 맨손으로 잡는 것이 해루질의 본질인 듯싶습니다.

 

  직선과 원이 어우러져 빚어낸 조형물의 선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저 멀리 단조로운 수평선과 대비되어서입니다. 조형물이 세워진 해오름쉼터를 지나자 평화누리길은 산 위로 이어졌습니다.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고가다리가 놓인 오른 쪽 길로 내려가 빨간 지붕이 눈에 확 띄는 평지길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1837분 대진항에 도착해 32회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쳤습니다. 평지길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2-3분을 걸어가자 길 왼쪽으로 화진포의 금강습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길옆에 활짝 핀 해당화가 반가웠던 것은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로 시작되는 국민가수 이미자님의 인기곡인 섬마을 선생이 생각나서였습니다. 물결이 제법 크게 출렁이는 화진포 호숫가를 따라 걸어 화진포해양박물관 앞에서 오른 쪽으로 진행하면서 화진포해수욕장의 넓은 모래사장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아직은 정식으로 개장한 것이 아니어서 해변의 길손들이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호(潟湖)인 그림 같은 화진포호가 바로 뒤에 있어 한 여름에는 엄청 북적일 것 같습니다.

 

  화진포를 지나 초()미니급의 초도항에 이르자 바로 앞에 보이는 앙증스러운 금구도(金龜島)가 꽤 커 보였습니다. 이 섬은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고, 늦가을부터 한 겨울까지 금빛으로 단풍이 들어 금구도로 불린다 합니다. 이번에 본 금구도는 섬의 반가량만 황색을 띄었고, 나머지는 푸른 숲과 흰색의 바위로 덮여 있었습니다. 철조망이 쳐진 해변을 지나 펼쳐진 초도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는 한 두 사람만이 보여  앞서 지나온 화진포 해수욕장과 비교되었습니다. 현대식 건물의 사찰인 현지사를 지나 거진항을 돌아서자 북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대진항의 하얀 등대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대진항에 도착해 하얀민박' 집에다 짐을 풀었습니다. 다음 날 걸어갈 마지막 구간은 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까지로 3-4Km만 걸으면 되어 벌써부터 긴장이 풀렸습니다. 장장 550Km에 이르는 평화누리길 완주가 눈앞에 보이자 70대 초반의 초로들인 저희는 하루 먼저 자축하고 싶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8시간 넘게 걸어 도착한 대진항에서 하룻밤을 그냥 보내지 못하고 모처럼 거나하게 술을 들은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횟집을 찾아가 생선회를 안주삼아 함께 마신 술로 모자라 가게를 들러 맥주를 사 갖고 가서 숙소에서 또 들었습니다. 저희 셋 모두는 함께 먼 길을 걷고 또 걸어 완주를 눈앞에 둔 스스로가 장하고 대견스러워 술이 취하는 줄 모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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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절규한 시인 유치환은 파도를 그리 애태우게 만들었을 바위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위>

 

내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黙)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이 위 시를 발표한 것은 <그리움> 발표 6년 후인 1941년입니다. 제가 가끔 이 시를 찾아 읽곤 하는 것은 저도 이 같은 바위로 길이 남고 싶어서입니다. 2000년에 먼저 보낸 후 홀로 21년을 지내면서,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살아가려고 애썼습니다. 2000년 이후 10년간은 온갖 고난이 밀려들어 제 삶이 여성 취향의 나이브한 시로 위로받을 만큼 그리 간단치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 “두 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다행히 2010년 이후 오늘까지는 고진감래의 기간이었습니다. 젊어서 전공한 화학을 제쳐두고 국문학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사대부들의 산수유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등산을 연구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도 제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기에 감히 고진감래를 들먹였습니다. 언제 다시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끝나고 흥진비래(興盡悲來)가 닥쳐와 또 다시 고난을 맞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파도에 끄떡 않는 유치환의 <바위>를 닮아가고 배워간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동해안을 따라 걸으며 유치환의 시 <그리움><바위>를 떠올릴 만큼 저도 익어가고 늙어가나  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