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17. 철원명소 탐방기4(백마고지전적비)

시인마뇽 2020. 12. 26. 15:13

*탐방일자 : 2020. 10. 23()

*탐방지 : 강원도철원소재 백마고지전적비

*동행 : 대구참사랑산악회 및 서울독립군모임

 

 

                                         

 

  평화누리길 탐방 차 백마고지역은 두 번 들렀지만 이 역에 이름을 빌려준 백마고지나 백마고지전적비는 찾아가보지 못했습니다. 백마고지는 민통선 안에 있어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백마고지역에서 멀지 않은 백마고지 전적비는 군 당국의 허가 없이는 탐방이 불가능하다고 잘못 알아 그동안 철원 땅을 열 차례 밟았으면서도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마침 대구의 참사랑산악회 회원들과 연천의 고대산을 올랐다가 동송의 한 음식점으로 이동 하는 길에 서울독립군모임의 범솥말 회장님이 안내하여 백마고지전적지(白馬高地戰跡地)’로 향했습니다. 고대산 주차장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소요산역- 연천역 구간의 전철화공사로 기차운행이 정지된 신탄리역을 지나 백마고지역까지는 작년에 평화누리길을 걸을 때 지난 바 있어 주변 풍경이 눈에 익었습니다. 백마고지역을 지나 평화로를 따라 북진하다가 대야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몇 분을 더 가 말로만 들어온 백마고지전적비 앞에 이르자 조각품 백마(白馬)’가 저희를 반겼습니다.

 

 

  초입의 백마고지전적지비석을 사진 찍고 양쪽으로 자작나무가 도열한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백마고지위령비앞에 잠시 머물러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한 후 날렵한 외관의 기념관을 그냥 지나 뾰족한 두 개의 현대식 첨탑이 마주보는 형상의 새하얀 충혼탑(?)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충혼탑 왼쪽의 깃봉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깃봉이 아닐까 싶은데, 이 정도 높이의 깃봉이라면 펄럭이는 태극기가 북한에서도 잘 보일 것 같았습니다. 백마고지전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상승각(常勝閣)에는 커다란 종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종은 타종금지의 푯말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언제고 타종할 수 있는 종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언제라도 누구나 타종을 해 눈앞에 보이는 북녘 땅에 자유의 메시지를 종소리에 실어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할 수 없어 아쉽기도 했습니다. 상승각에서 바라본 벌판 뒤로 해발395m의 백마고지가 눈에 잡혔습니다. 역곡천의 위치를 확인한 후 전적지 입구로 돌아가 버스에 올라 동송으로 이동했습니다.

 

 

  먼발치서 백마고지를 바라보면서 궁금해 한 것은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12번이나 뺏기고 뺏는 혈전을 벌이면서까지 백마고지를 확보해야할 지리적 중요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마고지의 전후와 좌우를 둘러봐도 이 고지의 중요성이 선뜻 와 닿지 않았는데, 온창일님의 한민족전쟁사, 이희진님의 한국전쟁사, 그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나자 그 지리적중요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195210월 백마고지 전투에 이르기까지 전개과정은 대략 이러합니다. 전쟁 발발 며칠 후 참전한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기를 잡아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14일 서울을 다시 내준 유엔군은 314일 서울을 재탈환합니다. 43일 작전을 개시해 문산-임진강상류-동두천-춘천-현리-영양 북쪽을 잇는 캔자스 선을 확보합니다. 유엔군이 캔사스선 구축에 추가한 목표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인 평강, 철원, 김화지역의 확보입니다. 1951411일 유엔군이 철의 삼각지대 확보를 위해 공세를 시작했으나, 중공군의 저항과 공세로 캔사스 선에서 밀고 밀리는 지리한 공방전이 1년 넘게 계속됩니다. 1952년에 들어 포로교환문제로 휴전회담이 교착됨에 따라, 유엔군은 군사적 제재를 가하면서 공산측을 설득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6월 초에 우리국군과 함께 철원서북방 역곡천 북안(北岸)의 백마고지(395고지), 화살머리고지(281고지), 티본고지(255고지)와 남안(南岸)의 포크찹고지(255고지), 불모고지(266고지) 11개 목표를 탈취하여 유리한 전초 진지를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확보한 백마고지는 강원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를 감제(監製)할 수 있는 고지이자, 철원평야가 공산측의 관측에 완전히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중요한 전초 진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전초(前哨) 진지를 중공군인들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1952106일 대대적으로 공격해오면서 백마고지 전투는 시작됩니다.

 

 

  백마고지 전투의 상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백마고지전투(白馬高地戰鬪)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백마고지전투(白馬高地戰鬪)」 글은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을 만큼 적확하고 빼어난 글이어서  아래와 같이 전재합니다.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10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10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10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백마고지전투에 나오는 역곡천은 강원도 평강군 평강면에서 발원해 철원군과 경기도 연천군을 지나 황강댐 위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전장 78.3의 하천을 이릅니다. 철원군을 지나면서 평탄한 대지를 흐르는 여러 지류를 합류하여 넓은 평야를 발달시킨 역곡천은 연천군 중면 어적산리에서 심하게 곡류한 후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임진강의 제1지류로, 하천 곳곳에 현무암 절벽과 하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특히 상류에는 토양이 비옥한 하곡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남북의 국경선인 휴전선은 캔자스선보다 훨씬 북쪽으로 그어졌습니다. 이는 1952106일부터 15일까지 12차례의 혈전 끝에 백마고지를 지켜냄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여기에 백마고지전적지를 조성하여 이 전투에 희생된 유엔군과 우리 국군9사단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고 전사 장병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들의 몫입니다. 195210월 백마고지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9사단장은 19506월 춘천전투에서 임부택 대령과 함께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종오(金鍾五, 1921-1966)장군입니다. 춘천전투란 1950626일 국군6사단을 중심으로 애국시민, 학생, 경찰이 하나 되어 전차를 앞세우고 기습 남침하는 북괴군 6,600여명을 사살하고, 전차18대를 완파하는 등 파죽지세로 침공해오는 북괴군을 3일간 지연, 저지시킴으로써 수원방면으로 진출하여 국군 주력을 포위하려던 북괴군의 남침계획을 무산시킨 전투를 말합니다. 김종오 사단장이 1952105일 백마고지전투를 앞둔 9사단 장병들에게 보낸 훈시의 글을 여기에 올려 장군과 장병들에 무한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장병 여러분! 본관은 제9사단 사단장 김종오 소장이다. 상승의 사단, 무적의 사단, 9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다는데 본관은 자랑과 긍지를 느낀다. 불굴의 감투정신, 타오르는 애국심을 누가 끄려 한단 말인가 이번 전투의 승패는 강철 같은 의지력과 인내심의 결과여하에 좌우된다. 이 일전은 또한 우리 한국군의 명예와 전투능력에 대한 평가가 달려있다. 이제 우리는 승리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을 뿐! 여기서 뭘 두려워하랴! 수양제의 백만대군을 살수에 장사지낸 을지문덕, 당태종의 삼십만대군을 섬멸하여 조국을 지킨 연개소문 장군이 구천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 누가 호적을 두려워하랴. 나를 비롯하여 사단의 모든 전우들이여, 여기에 우리의 뼈를 묻자! 그리하여 우리 9사단의 명예를 지키자.”

 

 

 

<탐방사진>

 

 

*마지막 '백마고지 전투전 상황'지도는 온정일 님의 "한민족전쟁사"에 나오는 사진을 찍어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