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19. 9. 12일(목)
*탐방지 :경기도군포시소재 정난종선생묘역/김만기선생묘역
*동행 :나 홀로
제 고향 파주를 빛낸 역사적 인물은 방촌 황희, 율곡 이이, 용재 성현 선생 등 여러분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청백리로 녹선된 파주 분도 23명에 달해 전국 청백리 200명의 10%가 넘습니다. 그렇다고 청백리 23분이 모두 파주에서 태어나서 자란 분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분들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한양에서 가까운 파주에 별서(別墅)를 두고 거주한 분들도 있어서입니다.
조선시대 세도가들은 근거지를 떠나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물러나서는 근거지인 고향으로 낙향한 분도 있었지만, 서울근교에 별서를 두어 거주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서울 근교 중 별서를 두기에 적합한 곳은 서울에서 하루에 닿을 수 있는 양주, 고양, 파주, 광주, 시흥 등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군포도 서울에서 멀지 않아 명문가들이 별서를 두어 거주한 세도가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명문가들의 묘지가 여기 군포에 여럿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말년을 여기 군포에 마련한 별서에서 머물다가 세상을 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군포 땅에 묻힌 조선시대 명망가들은 자료를 찾아 확인한 사람만도 16분입니다. 조선 시대 문신인 송복산(宋福山, 1390-1467)과 아들 송숙기(宋叔琪, 1426-1489) 및 송찬(宋瓚, 생몰연대미상) 그리고 손자 송겸(宋謙, 생몰년대미상), 홍일동(洪逸童, 1412-1464), 안의(安誼, 1423-1467)와 아들 안우하(安友夏, 미상-1544년) 및 안우삼(安友參, 1441-1494), 한치의(韓致義, 1440-1473), 정난종(鄭蘭宗, 1433-1489)과 아들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이기조(李基祚, 1595-1653), 김만기(金萬基, 1633-1687), 김명연(金命淵, 1753-1830)과 김동헌(金東獻, 1791-1869)와 성종 임금의 셋째 아들 안양군(安陽君, 1480-1505) 등이 그 분들입니다. 이중에 제가 묘지를 찾아가 본 곳은 산본동의 안양군 묘, 속달동의 정난종선생 묘역, 수리산역에서 멀지 않은 이기조선생 묘와 대야미 역에서 가까운 김만기선생 묘역 등 네 곳입니다.
군포시의 수리산 산자락에 자리한 정난종(鄭蘭宗) 선생 묘역과 김만기(金萬基)선생 묘역을 찾아간 것은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몇 번을 다녀왔어도 이분들의 삶이 과연 탐방기를 쓸 만한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이제껏 미뤄왔습니다. 며칠 전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서 정난종선생과 차남 광필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탐방기를 쓰겠다는 마음이 움직여 이번에 다시 두 묘역을 심방(尋訪)했습니다.
1.정난종(鄭蘭宗)선생 묘역
산본의 시민체육공원을 출발해 수리산능선에 오른 다음 남진해 밤바위봉을 지났습니다. 감투봉에 올라 방향을 바꾸어 서진해 해발258m의 무성봉에 이르기까지 대략 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무성봉에서 능선을 타고 덕고개를 향해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갈리는 남쪽의 지능선을 따라 10분가량 내려가 정난종선생 묘역의 상단부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경이었습니다.
경기도군포시속달로의 수리산 자락에 자리한 정난종선생묘역은 명문가의 묘역답게 그 규모가 1,500여평에 이를 만큼 꽤 넓었는데, 묘역의 경사가 급해 관리가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정난종선생과 자손 10명의 큼지막한 묘가 들어선 이 묘역에는 묘비, 신도비, 묘갈, 장명등과 문인석 등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있어 기념물11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묘역 상단에서 차남 광필의 묘지를 둘러본 후 아래로 내려가 장남 광보의 묘비문을 보았습니다. 하단에 자리한 정난종선생 부부의 묘는 비문이 흐릿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한문 실력이 달려 묘역 서쪽의 비각 안에 세워진 정난종, 정광보와 정광필의 신도비 비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선생은 세종15년(1433)에 태어나 성종20년(1489년) 57세에 이 세상을 뜬 조선전기의 중신입니다. 선생은 세조9년(1463)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갑니다. 당대의 명필로 인정받은 선생은 세조11년(1465)금속활자 「을유자(乙酉字)」를 만들어 『원각경』을 인쇄합니다. 창덕궁 현액 「敦化門」과 낙산종명, 대원각사비에서 선생의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세조12년(1466)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춘추관 수찬관이 되어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한 선생은 훗날 『세조실록』 과 『예종실록』 편찬에도 동참합니다. 선생은 세조13년(1467)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 자리에 오릅니다. 이조, 형조와 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선생은 평안도 절도사에 봉직 중에 온성진 40리 장성을 축성했다고 동래정씨동래부원군파종친회에서 발간한 「정난종선생유적지」 안내전단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사후 중종 대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동래부원군에 봉해집니다.
「정난종선생유적지」 안내전단에 실린 아래 한시의 제목은 「鳳池樓(海州)」입니다. 선생이 황해도관찰사로 일할 때 해주에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 시를 읽고 제가 느낀 것은 이시애의 난을 맞은 선생의 절박한 심사였는데 제대로 감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鼓角邊城暮 북소리 나팔소리에 변방의 성 저물고
湖山秋色深 산과 호수에도 가을 색 깊어
敗荷終夜響 마른 연잎 밤새워 소리내고
凋柳半池陰 시든 버들 연못을 반이나 가리누나
簾幕螢初度 드리운 밭에 반디가 찾아들고
樓臺月欲侵 높다란 정자에 달빛 스며드네
此時拌客恨 지금 나그네 한숨 내뱉으며
不必聽猿吟 원숭이 노는 소리 들어 무엇하리오
창원공(昌原公) 정광보(鄭光輔, 1457-1524)는 선생의 장남으로 여러 고을의 군수를 거쳐 당상관에 이른 후 정치에 회의를 느껴 경북의령의 도굴산에 시완당을 짓고 낙향해 68세에 생을 마칩니다. 자손들은 관직에 나가 둘째아들 사룡(士龍)은 대제학을 지내며, 현손 기원(期遠)은 정유재란 때 선무공신으로 일하던 중 순직합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는 선생의 차남으로 중종 때 영의정에 두 번 오른 조선전기의 명신입니다. 성종23년(1492) 식년문과에 급제해 출사한 정광필은 사화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연산군10년(1504) 갑자사화 때는 왕에게 극간하다 아산으로 유배되었고, 중종14년(1519)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를 구하려다 영의정에서 영중추부사로 좌천됩니다. 전라도 순찰사로 일하면서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함경도관찰사였을 때는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한 공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를 맞아 영중추부사로 좌천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정광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불천위(不遷位)로 종묘 중종묘종에 모셔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서로 『정문익공실기(鄭文翼公實記)』를 남긴 정광필은 영의정 3인, 좌의정 7인, 우의정 2인 등 12인의 정승들을 후손으로 남겼습니다.
안산공(安山公) 정광좌(鄭光佐, 1466-1520)는 선생의 삼남으로 연산군에서 중종에 걸쳐 김천도찰방, 흥덕현감, 한성부판관 등을 역임합니다. 안산군수를 마지막으로 별세한 정광좌는 묘지가 이곳 정난종선생묘역이 아니고 전북순창군인계면마흘리에 있다고 합니다. 한글학자 정인승(鄭寅承, 1897-1986) 이 정광좌의 후손이라는 것은 「정난종선생유적지」 안내전단을 보고 알았습니다.
정난종선생묘역을 둘러본 후 재실(齋室) 성달재(省達齋)와 종택(宗宅)을 들렀습니다. 재실은 문이 닫혀 바깥에서 발을 들고 울타리 안의 성달재를 보느라 그 전모를 볼 수 없었습니다. 경기도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된 종택은 맏아들 광보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종택의 주거공간은 일반 주거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손님은 대문을 거치지 않고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안채는 주인용 방 2개가 전부인데 대문이 없는 사랑채에는 손님이 쓸 수 있는 방이 6개를 배치했다고 「정난종선생유적지」 안내전단에 소개되었습니다. 바깥에서 단아한 종택을 사진 찍으면서 정난종의 인정어린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작고하신 이이화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서 정난종선생과 차남 광필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구절을 읽었습니다.
세조4년(1458) 서얼출신의 어머니를 둔 안유와 안혜 형제가 과거에 응시합니다. 정난종(鄭蘭宗)은 이들의 처지가 불쌍하다며 과거응시를 허락해달라고 건의하고, 세조는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디 귀천이 없다”며 쉽게 허락합니다. 과거에 응시한 두 형제는 조준의 서녀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적서를 차별하지 않고 대하는 정난종 선생의 휴머니즘은 세조의 응낙으로 서얼의 과거응시를 결실합니다.
향약운동을 적극 지원한 조광조에게 처분을 내리기 직전 중종은 향약에 든 사람들이 자의로 형벌을 써서 법사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그 폐단을 지적합니다. 이에 정광필(鄭光弼)은 “초상에 서로 돕는 것으로 서울상공인들의 향약활동을 제한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정광필이 기묘사화를 맞아 처벌을 기다리는 조광조 등 9명을 적극 변호해 중종께 이들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결말을 맺자고 주청합니다. 중종도 이들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정광필의 말을 따라 8명을 귀향 보내고 유배 중인 조광조에게는 사약을 내립니다. 조광조와 김식 등이 적극 지원한 향약활동을 제한해야한다고 나선 정광필이 기묘사화를 맞아 조광조를 적극 변호한 것 또한 정광필에 잠재한 휴머니즘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2.김만기(金萬基)선생 묘역
정난종선생 종택을 출발해 갈치저수지 옆 차도를 따라 걷다가 왼쪽의 호젓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동래정씨속달가족묘지를 지나 내려선 'I'Park‘ 아파트단지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대야미역으로 향하다 왼쪽 소로로 접어들어 바로 앞의 광산김씨 재실인 경모재(敬慕齋) 앞에 다다랐습니다.
신라문무왕의 셋째아들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는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서열 5위를 점하고 있는 조선의 명문가입니다. 이 가문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 배출되는데, 대제학 7명은 모두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입니다.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金萬基)선생은 김수항의 추천으로 대제학이 되어 광산김씨 출신 대제학 7명 중 1명이 됩니다. 또 왕비 1명은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로 김만기선생의 따님입니다.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을 남긴 조선후기의 문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선생의 실제(實弟)입니다.
‘ㄱ’자로 배치된 두 채의 조촐한 일자형의 한옥은 한 채는 재실(齋室) 경모재(敬慕齋)이고 다른 한 채는 관리인이 기거하는 주택인 것 같습니다. 흙돌담의 울타리 한 쪽 끝의 사립문(?)같은 출입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돌담 밖에서 발돋움을 하여 사진만 찍었습니다. 바로 옆에 김만기선생의 묘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재실은 선생을 제향하는 재실이 틀림없습니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 1633-1687)선생은 서인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증손이고, 김장생의 학문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 전해주어 기호학파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신독재 김집(金集, 1574-1656)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발발 이듬해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부친으로 숙종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효종4년(1633) 별시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는 것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김수항의 천거로 대제학에 오르기도 합니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서인이 분당할 때 노론에 가담한 선생은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논란이 있을 때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삼년설을 주장하던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합니다. 선생은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집니다. 1680년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고 복창군 등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됩니다. 선생께서 1689년 기사환국 때 남인의 재집권으로 파직되었다가 복직된 것은 아우 김만중이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는 것과 대비되는데, 이는 선생이 숙종의 장인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선생의 저서로는 시문을 모아 간행한 『서석집』이 있습니다.
재실 경모재에서 3-4분 거리에 위치한 김만기선생 묘역은 정난종선생 묘역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산자락에 조성되어 안정감이 느껴졌습니다. 묘역에는 총5기의 묘와 묘지 아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인이 함께 묻힌 김만기 선생의 묘는 묘역의 상단에 자리 잡았고, 나머지 4개의 묘에는 손자 김춘택 등 후손들이 묻혀 있습니다. 송시열이 글을 쓰고 아들 김진규가 글씨를 쓴 선생의 묘비는 1688년에, 신도비는 1703년에 세워졌으며, 숙종의 친필이 새겨진 어필비는 1699년에 세워졌다고 ‘김만기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김만기선생의 실제인 김만중의 묘지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즉, 1689년 유배지인 남해의 노도에서 죽음을 맞은 서포 김만중의 유해는 3년 후인 1692년 여기 군포로 옮겨졌다가 훗날 사패지가 있는 개성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때 김만중의 후손이 영정하나만 들고 남하해 부친 김익겸의 묘가 있는 대전시유성구의 전민동에 정려각을 모셔놓았다는 글을 읽었는데, 사실인지는 관련 자료를 구하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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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명문가인 동래 정씨 정난종 일가와 광산 김씨 김만기 일가의 묘지가 제가 살고 있는 군포시에 자리하고 있어 여러 번 탐방했습니다. 이 명문가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고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는 아직은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조선은 사화와 당쟁, 그리고 환국으로 얼룩진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런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나라 일을 올바르게 해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난종선생과 김만기선생 두 분이 백성들을 괴롭혔다거나 나랏돈을 착복했다는 글은 이제껏 읽지 못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분들의 살아생전 족적을 알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탐방기를 남깁니다. 두 선생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는 기회 닿는 대로 찾아보고자 합니다.
https://blog.daum.net/mk490/11770456
<탐방사진>
1.정난종선생 묘역
2.김만기선생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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