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19. 파주명소 탐방기8(파주삼릉/공릉저수지)

시인마뇽 2021. 2. 19. 04:26

*탐방일자: 2021. 1. 23()

*탐방지 : 경기파주 소재 파주삼릉 및 공릉저수지

*동행 : 나홀로

 

 

  공릉천을 따라 걷는 길에 제 고향 파주의 명소 두 곳을 다녀왔습니다. 한 곳은 파주삼릉이고, 또 한 곳은 공릉저수지입니다. 파주삼릉과 공릉저수지를 다녀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파주삼릉은 1960년대 초반 문산중학교를 다닐 때 소풍을 갔었고, 공릉저수지는 1973년 한 산형(山兄)과 함께 찾아가 술잔을 나누었던 곳입니다. 그 후 두 곳 모두 집사람과 단 둘이서 찾아가 데이트를 즐긴 곳이어서 제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파주삼릉과 공릉저수지를 다시 찾아간 것은 몇 번을 다녀왔어도 쓰지 못한 탐방기를 남기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국내 명소의 탐방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6년으로, 그간 울릉도탐방기를 비롯해 총 118편을 작성했습니다. 기원전 47년 로마의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폰토스 국왕인 파르나케스를 제라전투에서 간단히 물리치고 나서, 원로원에 왔노라(venire), 보았노라(videre), 이겼노라(vincere)”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승전을 보고했다면, 저는  갔노라, 보았노라, 썼노라를 속으로 되뇌면서 2006년 이후로는 빠짐없이 탐방기를 작성해 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탐방기를 쓰지 않아 갔노라, 보았노라로 미완에 그쳤던  2006년 이전의 국내 명소탐방에 완결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그후 다시 찾아가 탐방기를 작성해 썼노라를 추가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오래 미루어온 숙제를 해내고나면 엄청 속이 후련하고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군포시의 산본 집을 출발해 파주시의 금촌역까지 전철로 이동하는데 2시간가량 걸렸습니다. 금촌역에서 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다다른 봉일천정류장에서 하차해 택시를 잡은 것은 두 곳의 명소 탐방을 마치고 이어갈 공릉천의 탐방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번째 방문지인 파주삼릉 앞에 도착해 탐방을 시작한 것은 1113분입니다.

 

 

 

1.파주 삼릉

 

  파주삼릉이란 경기도파주시의 조리면에 위치한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3개 능이 모여 있는 조선의 왕릉으로 옛날에는  공릉으로 불렸습니다.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이며, 이중에서 북한 땅 개성의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제외한 40기가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일괄 등재되었습니다. 500년 넘게 지속된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유지된 사례는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것입니다. 조선왕릉이 조선 왕조 519년 동안 왕위에 오른 27명보다 그 수가 많아 42기가 되는 것은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왕실의 무덤이라 해서 모두 왕릉은 아닙니다. 왕실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능, 원과 묘로 나뉩니다. ()은 왕과 왕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을, ()은 후궁이나 종친 등의 왕의 사친이나 왕세자, 왕세자빈, 황태자, 황태자비의 무덤을, 그리고 묘()는 폐위된 왕이나 그 밖의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을 이릅니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재로 등재된 것은 왕릉이며, 원이나 묘는 당연히 제외되었습니다. 제 고향 파주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묘인 소령원(昭寧園)이 있습니다. 영조임금은 이 묘를 능으로 격상시키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끝내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파주삼릉에서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재실(齋室)입니다. 파주삼릉안내전단에 실린 대로 탐방코스를 역사문화관-재실-공릉-순릉-영릉 순으로 잡고 능안으로 들어갔는데, 역사문화관이 공사로 문이 닫혀 곧바로 재실을 찾아갔습니다. 재실이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을 이릅니다.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재실과 일부 행랑뿐이었습니다. 단아한 한옥의 재실을 둘러보면서 요즘은 쉽게 보기 힘든 부뚜막과 굴뚝을 사진 찍은 후 공릉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공릉(恭陵)

 

  넓은 흙길을 따라 걸어 다다른 공릉은 조선 제8대 예종의 원비인 정순왕후의 능입니다. 사후에 왕후로 추존된 정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셋째 딸로 왕세자빈에 책봉되어 원손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여기 공릉에 안장되었습니다. 공릉도 다른 왕릉과 다르지 않아 진입공간, 제향공간과 능침공간으로 세분되어 있었습니다. 재실을 지나 금천교에 해당하는 작은 냇물을 지나는 것으로 진입공간에 들어섰습니다. 홍살문에서 산신석각까지는 제향공간으로 제를 올리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수라간, 수복방과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능침공간은 곡장으로 둘러싸인 능침(능상)이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과 장명등, 망주석과 문석인, 무석인 등과 함께 자리하는 공간입니다. 여기 공릉은 처음에 세자빈의 무덤으로 조성된 것이어서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과 무석인이 없다고 하는데 능침공간은 출입이 금지되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안내전단에 따르면 공릉은 정순왕후 한 분의 봉분만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單陵)이 틀림없습니다.

 

 

  왕릉은 봉분의 형식에 따라 그 유형을 6가지로 분류된다고 문화재청궁능유적본부에서 발간한 안내전단 조선왕릉과 왕실계보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처럼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單陵),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처럼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 세종과 소현왕후의 영릉처럼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 예종과 인순왕후의 창릉처럼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象設)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처럼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위 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헌종과 효현헌왕후 · 효정왕후의 능처럼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후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이 그것들입니다.

 

 

 2)순릉(順陵)

  공릉에서 오른 쪽으로 옮겨 다다른 순릉은 조선 제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능입니다. 공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넷째 딸로 훗날 성종인 자을산군과 가례를 올려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성종5년인 1494년 죽음을 맞습니다. 공혜왕후는 세상을 떠날 때 신분이 왕비여서 파주삼릉 중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제향공간에서 올려다 본 능침공간은 병풍석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난간석과 무석인 등의 석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순릉 역시 공릉과 마찬가지로 봉분은 단릉으로 조성된 왕릉입니다.

 

 

  공혜왕후는 정순왕후의 동생으로 모두 한명회의 딸입니다. 조선 왕조에서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사람은 한명회가 유일합니다. 이런 한명회도 죽어서 부관참시를 당하고, 왕비가 된 두 딸도 20세가 되기 전에 모두 요절합니다. 오늘날에도 권세에 취해 국정을 어지럽히는 어리석은 자들이 적지 않은 것은 한명회의 삶에서 역사적 교훈을 터득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3)영릉(永陵)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순릉의 아래 쪽에 자리한 영릉입니다. 영릉은 추존 진종의황제와 효순소황후의 능입니다. 영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는 1908년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고, 효순왕후도 효순소황후로 추존됩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인 후 세손인 정조를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킵니다. 영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왕세자빈을 효순왕후로 추존하여 영릉에 모십니다. 영릉은 단릉인 공릉이나 순릉과 달리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입니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생략되어 먼발치서 올려다보아도 능침공간이 단출해 보였는데 제향공간에도 수라간과 수복방이 생략되어 더욱 조촐해 보였습니다.

 

 

  파주삼릉 탐방을 마치고 택시를 불러 인근의 공릉저수지로 이동했습니다.

 

 

 

 

2.공릉저수지

 

  젊어서 집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는 공릉에서 공릉저수지로 넘어가는 산길이 나 있었습니다. 파주삼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문화재청에서 산길을 폐쇄해 공릉저수지로 가려면 이제는 바로 가지 못하고 장곡리로 빙 돌아가야 합니다. 봉일천택시를 불러 장곡리를 경유, 공릉저수지 물가의 장곡1리버스정류장 앞에 도착한 시각은 1241분이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그새 날씨가 흐리고 저수지가 얼어붙어 40여년전 어느 화창한 봄날 집사람과 함께 왔을 때 느꼈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공릉저수지에서 나지막한 산을 넘어 내려가면 바로 유흥지로 조성된 공릉저수지에 닿았고, 저수지 물가에 음식점들이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와보니 산길도 없어지고 술 한 잔 마시면서 쉬어갈만한 곳도 보이지 않아 썰렁하고 스산했습니다

 

 

  여기 공릉저수지는 1966년에 농업용수공급을 위해 농어촌공사에서 설치한 것으로 만수면적이 27.7ha이고 저수용량은 621으로 196ha의 농지가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 처음 봤을 때는 엄청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 저수지가 이번에 작게 보인 것은 그동안 큰 저수지나 호수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찾아간 공릉저수지가 옛날과 크게 다른 것은 저수지 동쪽의 물가로 데크길을 낸 것입니다. 물가에 바짝 붙여 낸 데크 길은 장곡1리종점정류장에서 광탄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마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저수지 건너편을 자세히 살핀 것은 이 저수지를 한 바퀴 일주할 수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데크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 한 분에 희멀그레한 자자나무들이 눈에 띄는 저수지 건너편으로 집이 보이는데 저 건너편에도 저수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길이 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중간에 길이 끊긴 곳이 많아 불가능하다는 기대 밖의 답을 듣고 나자 맥이 풀렸습니다.

 

 

  데크 길은 10여분 거리로 짧았지만 물가를 따라 곡선으로 나 있어 운치가 있어 보였습니다. 이 길을 따라 6-7분 진행하자 맞은편으로 저수지 물을 막은 댐과 수문이 보였습니다. 설사 건너편에 길이 나 있다 하더라도 저 댐의 수문을 건널 수 없어 저수지를 빙 도는 환주는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 수문을 통해 내려가는 물은 고산천을 따라 흘러 조리읍과 금촌읍의 경계지점에서 공릉천에 합류되는 것을 몇 시간 후 공릉천을 따라 걸으면서 확인했습니다. 몇 분을 더 걸어 다다른 데크길 끝점에서  빨간 지붕의 2층 기와집이 눈을 끌어 사진 찍은 후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장곡1리종점 정류장 도착하기 직전 봉일천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해 다음 버스를 기다릴까 하다가 걷기를 멈추지 않아야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다 싶어 택시를 타고 온 저수지 동쪽 길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몇 분을 걸어가 다다른 간이쉼터에서 햄버그를 꺼내들면서 같은 저수지라도 혼자 바라볼 때가 둘이 바라볼 때보다 훨씬 외롭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찻집이라도 있으면 쉬어가겠건만, 그렇지 못해 한데 쉼터에서 혼자서 햄버그 조각을 씹고 있노라니, 40여년 전에 함께 왔던 집사람이 생각났습니다.  곁에 있음보다 더한 행복이 없다는 것은 21년 전 집 사람을 떠나 보낸 후  혼자서 나들이를 할 때마다 느끼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했습니다.  공릉저수지를 벗어나 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고산천을 거슬러 걸으면서 수면이 얼어붙은 공릉저수지에서 보지 못한 물오리들이 얼음이 녹은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노니는 것을 보고나자  생동감이 느껴져 울적했던 기분을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장곡교를 건너 통일로로 가는 길에 논바닥에 앉아 있는 재두루미(?)를 보았습니다. 공릉저수지가 얼어붙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가까운 논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보이는 재두루미(?)들은 사진을 찍어 확인한 바로는 50마리가 넘었습니다. 이 새들이 인기척을 듣고 일제히 비상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재두루미(?)는 두 해전 평화누리길 종주차 파주땅의 임진강을 따라 걸을 때 본 후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재두루미(?)를 사진 찍고 나서 몇 분을 더 걸어 왼쪽으로 용미리 길이 갈리는 고갯마루 삼거리에 도착해, 봉일천 행 버스에 오른 것으로 공릉저수지 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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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명소 두 곳의 탐방을 마치고 생각한 것은 왕릉이야말로 유교문화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6년 전 한북정맥 종주 때 경기도 고양에 자리한 고려 공양왕의 묘를 지난 적이 있습니다. 고려 왕의 묘가 조선왕릉에 비해 비할 수 없이 작은 것은 고려는 유교국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충효정신을 국가통치의 근본으로 삼은 유교국가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명황제에 제를 올리는 대보단을 창덕궁 안에 설치해 운영했을 만큼 제례를 중시했습니다. 그러기에 왕릉을 크게 조성하고 정성들여 관리를 하는 것은 조선 조정이 매우 중히 여기는 국가의 대사였을 것입니다.

 

 

  이종호님이 지은 책자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2"에 따르면, 조선 왕릉을 심사한 유네스코 심사위원은 한 왕조가 5백년 이상 지속된 것도 놀랍지만 재위한 모든 왕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경우는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경탄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매년 제례까지 행해졌으니 놀랄 만도 했을 것입니다. 수도권 일대에 조성된 조선 왕릉의 녹지가 600만평에 가깝습니다.  이 모두가 조선이 왕릉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관리해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은 소홀히 하면서 왕릉은 극진히 보살펴온 결과로 세계문화재에 선정된 것이라면 유네스코 심사위원의 경탄에 마냥 감사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은 백성의 나라가 아니고 국왕의 나라였다고 생각하다가, 피라밋의 이집트나  만리장성의 중국은 조선보다 더 백성을 괴롭혔을 텐데 어찌 백성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나라가 조선뿐이랴 싶어 조선왕릉을 갖고 그리 탓할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질이도 못 사는 백성들이 감당하기에는 조선왕릉이 너무 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깔끔하게 지워버리지는 못했습니다.

 

 

 

 

<탐방사진>

 

1.파주삼릉

 

 

 

 

2.공릉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