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2021년3월18일(목)
*탐방지 :전남 나주시 소재 나주읍성 옛 사대문/금성관
*동행 : 나 홀로
조선후기 행정중심지가 광주로 옮겨가기까지는 전라남도의 중심지는 이 지역의 중서부에 위치한 나주(羅州)였습니다. 이는 전라도의 명칭이 북쪽의 전주와 남쪽의 나주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 나주가 전남지방의 중심지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 중 한 곳이어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작년 12월에 담양의 용소에서 시작한 ‘영산강 따라 걷기’는 오는 4월 중에 목포의 영산강하구둑에 도착하는 것으로써 끝맺을 뜻입니다. 총 길이가 150Km 가량 되는 영산강을 따라 걸으면서 나주 땅을 밟은 것은 이번이 3번째입니다. 그때마다 나주역에서 하차해 영산강으로 이동하거나, 탐방을 마치고 나주역으로 돌아가느라 몇 차례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야 했습니다. 이때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서울의 사대문을 닮은 튼실한 나주읍성의 옛 사대문이었습니다. 같은 곡창지대이면서도 전북의 김제에서 보지 못한 저 같이 우람한 대문이 여기에 세워진 것은 나주가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역할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영산강탐방 길에 사대문을 들르지 못하면 나중에 우정 내려와야 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다 싶어, 이번에 큰 맘 먹고 둘러보았습니다.
저는 1990년대 중반에 2년 반 동안 모회사의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광주영업소장과 함께 완도나 목포의 대리점을 방문하느라 나주시를 지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시내를 둘러본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은 나주역에서 하차한 아침7시53분에서 나주버스터미널에서 죽산보 행 시내버스에 탑승하는 9시50분까지로, 2시간이 채 안 되어 택시로 전 코스를 이동했습니다.
이번 탐방한 ‘나주읍성 옛 사대문’은 나주읍성의 동, 서, 남과 북에 낸 성문입니다.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축성한 나주읍성은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길을 내고자 헐어버려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다행히 4대문은 복원되어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나주읍성은 “뒤쪽에 자리한 금성산성(錦城山城)과 짝을 이루는 성곽으로,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규모와 역사가 가장 크고 오래된 읍성이자 평지에 네모꼴의 모습으로 축조된 대표적인 읍성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인구 증가로 수차례 확장된 나주읍성은 둘레는 9,966척,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은 7곳,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은 2,412개, 옹성과 함께 문루(門樓)를 갖춘 4대문이 있었다고 하니 이 읍성의 위용이 어떠했는가가 대강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1.남고문(南顧門)
나주역을 출발해 맨 처음 들른 곳은 남고문(南顧門)입니다. 4대문 중 출입이 가장 잦았다는 남고문은 남내동에 자리하고 있는 나주읍성(羅州邑城)의 남문(南門)입니다. 남고문이 4대문 중 가장 이른 1993년에 복원되었다는 기사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자 안내판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인 남고문이 추녀와 천장이 훼손되어 2005년에 추가로 보수하였다는 것은 ‘2천년시간여행 나주’ 팜플릿을 보고 알았습니다. 남고문은 이 문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차도가 나 있어 마치 찻길에 갇힌 섬 같았습니다. 오래 머무르기에는 너무 시끄럽고 어수선해, 사진 몇 장만 찍고 곧바로 동점문으로 이동했습니다.
2.동점문(東漸門)
나주시의 중앙동에 자리한 동점문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성벽이 없어지고 붕괴된 채로 남아 있다가 2002년에 터가 발견되어 2006년에 복원된 나주읍성의 동문입니다. 기사분의 이야기대로 동점문은 남고문을 복원하며 노하우를 터득한 후 복원한 것이어서 남고문보다 훨씬 정교해 보였습니다. 팔작지붕은 다르지 않았으나 성곽에 둘러싸여 있고, 그 성곽 위에 여장(女墻)을 쌓아 놓은 것과 방어를 위해 앞쪽에 작은 옹성을 덧붙인 것은 남고문과 확실히 달랐습니다. 동점문이 들어선 터도 남고문보다 훨씬 넓었으며, 성곽 위에 꽂아놓은 깃발도 여러 개가 보였습니다. 동점문에서 남쪽 바로 옆의 나주천을 거슬러 3-4분가량 걸어가면 버스터미널에 이른다는 것은 나중에 확인했습니다. 동점문에 세워진 나주읍성종합안내판에는 나주읍성에 관한 안내 글이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이 안내문을 읽고서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 고종 24년인 1237년에 김경손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적은 『고려사』 열전 인 「김경손전」이라는 것과 나주읍성의 사대문은 일제가 도로공사를 하면서 1920년 이전에 모두 없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북망문(北望門)
나주시의 성복동에 위치한 북망문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돌아보고 나간다는 나주읍성의 북문입니다. 사대문중 가장 늦은 2018년에 복원된 이 문은 몇 가지 점에서 앞서 본 남고문이나 동점문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문루(門樓)가 1층이고, 대문의 형태가 아취형이며, 물이 흘렀던 해자가 파여 있는 것은 이 문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남고문에서 보지 못했으나 옹성을 붙여 쌓은 것은 동점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위에서 한자 ‘令’이 쓰인 깃발이 펄럭이는 북망문을 둘러본 후 서성문으로 이동했습니다.
4.서성문(西城門)
나주시의 서대동에 위치한 서성문은 나주읍성의 서문으로 현판에는 영금문(映錦門)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아취형의 다른 대문과는 달리 네모꼴의 문이 달려 있었으며, 단층의 문루만 보면 너무 단출해 초라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011년에 복원할 때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 있어 제대로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현판 ‘映錦門’은 1815년에 간행된 「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에 서문에만 영금문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기록에 근거해 붙여놓은 것이라 합니다. 1894년 동학란 때 동학농민군이 월정봉에서 물밀 듯이 밀려와 서성문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벽을 넘지 못하고 3천여명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나주읍성이 꽤나 견고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탐방지인 금성관에서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를 보고 역사는 정의로운 자가 쓰지 않고 오직 승자만이 기록을 독점할 때 조선처럼 멸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금성관(錦城館)
나주읍성의 옛 사대문을 둘러 본 후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을 찾아갔습니다. 객사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지방 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을 이른다고 ‘2천년시간여행 나주’ 팜프릿은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자,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웠던 곳이라는 것입니다.
금성관은 조선전기 문신인 이유인(李有人, 출생연도 미상-1492)이 나주목사로 재임하는 기간인 1487-1489년 중 건립한 객사입니다. 두 번의 중수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쓰였던 금성관은 1976년 전부를 해체한 후 복원하였고 2000년대에 들어 앞을 가리는 나주군청사를 헐고 벽오헌으로도 불리는 동익헌과 서익헌을 복원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望華樓)는 일제강점기 때 없앤 것을 2003년에 복원했다고 하는데 공사장 가림 막에 가려서인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찾아간 금성관은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어수선했습니다. 길 한가운데 서 있는 나주목 관아의 아문(衙門)인 정수루(正綏樓)에서 하차해 임시로 설치한 쪽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외삼문과 내삼문의 중간에 있는 중삼문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 구석으로 공덕비들이 보였습니다. 내삼문 터를 지나 정면으로 보이는 우람한 건물은 금성관이고, 양쪽으로 붙어 있는 건물은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입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금성관의 동쪽에 자리한 동익헌에는 ‘碧梧軒’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면 6칸의 동익헌은 2칸이 온돌방이고 4칸이 마루입니다. 동익헌과 달리 현판이 보이지 않는 서익헌은 전면이 5칸으로 방과 마루가 붙어 있었습니다. 전면 한 가운데에 흘림체의 ‘錦城館’ 현판이 걸려 있는 나주객사 금성관을 한 바퀴 빙 돌아본 후 버스터미널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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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는 1884년 5월31일 조선에 미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합니다. 1883년 미국에 최초로 파견된 조선보빙사의 정사인 민영익은 미국에 강력히 요청해 포크와 함께 귀국합니다. 무관으로 부임한 포크는 조선의 중부와 남부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1884년 9월과 11월-12월 사이에 두 번을 여행하는데, 갑신정변이 일어나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포크는 당시 ‘통리교섭통상사아문’에서 발급한 국내내지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지참, 여행지 지역의 최고책임자들에 확인을 받고 허가를 얻어 여행을 진행합니다.
포크가 나주를 여행한 것은 1884년11월15일에서 17일까지 사흘 동안입니다. 15일에는 나주에 도착해 준비 없이 허둥대다 푸대접을 받았고, 16일에는 포크의 가마꾼들이 나주에서 여주인을 도와 패싸움을 했고, 17일에는 포크가 찍은 유리원판 사진들을 영산강 나루터에 빠져 깨졌다고 일기를 남깁니다. 대동여지도를 들고 여행 길에 나선 포크는 북망문으로 진입해 금성관에서 머무릅니다.
포크가 전하는 나주읍성의 북문 입성과 금성관에 이르는 과정이 알파미디어에서 간행한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에 자세히 실려 있어 일부를 옮겨 놓습니다.
“낮은 언덕을 지나자 나주의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북쪽 벽은 반 마일(800m), 20피트 높이에 사격을 위해 구멍이 뚫려 있고,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다. 이런 모습이 합쳐져 매우 예스러운 광경을 만들었다. 성벽은 언덕을 따라 이어졌다. 바깥쪽으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악단과 한 무리의 군중을 만났다. 나는 그들 모두를 멈춰 세우고 뒤편으로 보냈다. 성문 근처에서 나는 그 너머에 큰 도시가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아치가 있는 성문에서부터 조용한 들판만이 바라보였다. 겨우 몇 채의 집이 보일 뿐이었다. 성벽에 둘러싸인 지역은 1/2-3/4마일(800-1,200m)의 사각형이었다. (-중략-) 우리는 성문 근처에서 서쪽으로 지나가서 남쪽으로 큰 길하나를 통과했다. 나주 관아건물들은 조선의 다른 것과 비교해 높았다. 그리고 숫자가 많았다. 거리는 좁고 집들은 가난해 보였지만, 대나무와 철이 사용돼 조금은 나아 보였다. (-중략-) 나는 관아 북쪽의 커다란 관청으로 안내됐다. 나를 따라 몰려드는 엄청난 인파들이 가까이에서 뒤따랐고 큰 혼란이 이어졌다.”
위 글이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나주여행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포크가 그린 137년전의 나주와 혁신도시로 지정되어 웅비를 꿈꾸는 오늘의 나주를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싶습니다.
<탐방사진>
1)남고문
2)동점문
3)북망문
4)서성문
5)금성관
6)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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