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1. 3. 5일(금)
*탐방지 : 전남 나주시소재 영모정/백호문학관
*동행 : 나 홀로
영산강의 강줄기를 따라 나주대교-죽산보 구간을 걷는 길에 나주의 명소인 영모정과 백호문학관을 들렀습니다. 나주시 다시면의 회진리에 소재한 두 명소 모두 영산강과 가까이 있어 이 강을 탐방하는 길에 잠시 짬을 내 둘러본 것입니다.
제가 두 명소를 탐방한 것은 조선전기의 걸출한 문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를 만나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백호 임제가 어떤 인물인가는 백호문학관의 안내전단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전단에서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로 소개된 임제는 1549년 나주 회진에서 출생합니다. 임제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1577년 9월이며, 11월 목사로 부임한 부친을 뵈러 제주도에 간 것은 그해 11월입니다. 3개월간 제주를 유람하고 남긴 일기체의 기행문이 바로 『남명소승(南冥小乘)』 입니다. 1583년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에 있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남긴 ‘정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는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시조입니다. 이듬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화사집(花史集) 『부벽루상영록』을 지은 임제는 부친이 돌아가신 후 두 달 뒤인 1587년 8월11일에 「물곡사」, 「자만」 등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떴다고 안내전단은 약술했습니다.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속받지 않았으며 혼란했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로 일컬어졌다는 백호 임제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1천여수의 시와 산문, 소설을 창작했습니다. 백호 임제가 당대에도 빼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은 『백호집』 서문에 실린 이항복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북돋아 시에다 토해냈다” 라는 글이나, 신흠의 “만약 고각을 세우고 단에 올라 맹주를 세워야 한다면 백호 그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영모정(永慕亭)
먼저 들른 곳은 백호임제선생기념관(白湖林悌先生紀念館)이 자리한 영모정입니다. 백호임제선생기념관(白湖林悌先生紀念館)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바로 위 언덕에 자리한 영모정으로 향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인 영모정이 건립된 것은 중종15년인 1520년의 일입니다. 바로 전에 둘러본 기오정(寄傲亭)보다 한 세기 반이나 앞서 세워진 이 정자는 건립자인 조선전기의 문신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으로 불렀다가, 명종10년인 1555년 임붕의 한 후손이 정자를 다시 지으면서 영모정(永慕亭)으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중창한 것이어서 고색창연함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바로 앞으로 영산강이 내려다보이고 주위에 4백년을 넘긴 팽나무와 괴목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영모정의 풍광이 앞서 들른 바로 옆 기오정에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자 아래에 창립자 임붕의 유허비인 ‘歸來亭羅州林公鵬遺墟碑(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와 조선 전기 명문장가인 백호(白湖) 임제를 기리는 ‘白湖林悌先生紀念碑(백호임제선생기념비)’, 그리고 백호임제선생시비(白湖林悌先生詩碑)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래 시 「금성곡(錦城曲)」 은 백호임제선생시비에 실린 한시입니다. 이 시 「금성곡(錦城曲)」과 아래 시 「물곡사(勿哭辭)」는 제가 한 번 번역해보았습니다.
<錦城曲)>
錦城兒女鶴橋畔 금성의 여아들은 학다리 두둑에서
柳枝折贈錦羈郞 버드나무 가지 꺾어 금기랑 님에게 주도다
年年春草傷離別 매년 봄풀은 이별을 아파하는데
月井峰高錦水長 월정봉은 높고 금수는 길도다
임제가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에 남긴 시 「勿哭辭(물곡사)」도 옆의 시비에서 읽었습니다.
<勿哭辭>
四夷八蠻皆呼稱帝 사방팔방 오랑캐들은 모두가 황제로 칭하는데
唯獨朝鮮入主中國 오로지 조선만 들어가 중국을 주인으로 모시는구나
我生何爲我死何爲 내가 살면 뭣 하고 죽으면 무엇 하리
勿哭 곡하지 말거라
2. 백호문학관
다음에 찾아간 곳은 영모정과는 10분 거리의 백호문학관입니다. 3층 건물의 백호문학관은 그 규모가 백호 임제의 문학적 명성에 걸맞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커보였습니다. 1층에서 안내전단을 뽑아들고 2층의 전시실로 올라갔습니다. 기획전시실은 다음 전시 준비를 위해 문을 닫아 상설전시장만 둘러보았습니다.
안내전단에는 임제 친필의 「石林精舍」 현판, 제주도 유람기인 목활자본의 『남명소승(南冥小乘)』, 미공개 친필 시, 그리고 1885년 전라도지역 유생 36명이 예조판서에 올린 백호임제사원의 건립청원서인 「건원상서(建願上書)」 등이 상시 전시되는 것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눈여겨 볼만한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상설전시장의 전시물은 크게 보아 백호의 인물과 약력소개, 석림정사 등의 청년기 작품, 화사집(花史集) 등의 중년기 작품, 죽음에 임박하여 지은 「자만(自晩)」 등의 만사와 미공개친필시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시물 「花史(화사)」를 보고 이 작품이 임제가 지은 의인체 한문소설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매화, 모란, 부용을 군왕으로 삼아 철따라 피는 꽃, 나무, 풀들의 세계를 나라와 백성과 신화로 의인화한 소설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피고 지는 꽃의 세계로 표현하였다. 소설의 문체는 고전적 역사 서술체의 변종으로 문자유희에 그치지 않고 우언적, 회화적으로 표현한 매우 희귀한 창작기법을 사용하였다. 임제는 사평(史評)을 달아 당대 현실사회의 당쟁과 부정을 풍자하고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자신의 소망을 반영하였다.”
당대 최고의 시인(詩人) 임제(林悌)는 시인 못지않은 산문작가였습니다. 몽유록인 『원생몽유록』 , 소설 『수성지』, 화사집 『부벽루상영록』, 제주도여행기인 『남명소승』 등은 모두 임제가 창작한 당대 최고의 산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들 주요 전시물 외에 제 눈을 끈 전시물은 「鬱林石(울림석)』으로 이름 붙여진 두 개의 자그마한 현무암(?) 바위였습니다. 아래 글을 읽고 임제의 청렴결백은 부친한테서 물려받았다는 것과 선정을 베풀고 이임하는 청렴한 목사를 전송하는 문화가 제주도에서는 내륙지방과 많이 달랐다는 것을 학습했습니다.
“당서((唐書) 『육구몽전(陸龜蒙傳)』을 보면 육씨 집 문 앞에 큰 돌이 있는데 울림석이라고 불렀다. 먼 조상인 적(績)이 울림태수를 그만두고 귀향할 때 짐이 적어서 배가 뜰 지경이 되어 큰 돌을 실었다. 그래서 울림석이라 하는데 이것은 곧 청렴을 칭송해서 명명된 것이다. 이 제주돌은 오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백호공 부친인 진(晉)께서 제주 목사를 마치고 귀향길에 녹봉을 받은 곢식은 어려운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배가 가벼워지자 돌을 가득 싣고 고향 회진 풍호나루로 돌아왔다. 제주도도민이 그 선정과 청렴을 기리기 위하여 제주에 청정비를 세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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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문인을 표방한 기념관이나 문학관에서는 해당문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 백호문학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의 저서 『한국문학통사』에 실린 글을 요약해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임제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얼마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첫째, 임제는 삼당시인의 뒤를 이으면서 사대부문학의 체질을 개선하는데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초년에 호협하게 놀다가 스물에 공부를 시작한 임제는 문과에 급제해 얻은 벼슬을 버리고 울분과 방황 속에 오로지 문학에다 정열을 쏟았습니다.
둘째, 임제는 법도 밖의 인물이었습니다. 문약한 선비이기를 거부하고 칼을 책 못지않게 숭상하면서 넘치는 기개를 발휘하고자 했으나 이룬바 없어 생애가 헛되었다는 생각에서 지은 시가 「물곡사(勿哭辭)」입니다.
셋째, 『원생몽유록』 , 『수성지』 같은 산문을 지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자기나름대로 토로하는 방식을 마련했으며, 시에서도 아래의 「금하영추홍(金河詠秋虹)」 같은 기개를 나타내는 시를 적지 아니 남겼습니다.
<금하영추홍(金河詠秋虹)>
自笑雄心盖八垠 스스로 웃노라 웅심으로 천지를 덮으려던 것을
早將書劒學從軍 일찍이 서검을 가지고 종군을 배웠건만
西風吹過千山雨 서녘 바람이 천산에 비를 뿌리고 지나가니
萬丈晴蛇截暮雲 만 길 청사검이 저녁 구름 가른다
넷째, 임제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 염정시도 즐겨 지었습니다.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지은 한탄조의 시는 너무나 유명해 여기서는 기생 한우와 주고받은 시를 대신 올리고자 합니다.
북천(北天)이 맑다 하거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이름에 빗대서 희롱하는 말을 하다가 잠자리를 같이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기녀라 해도 좀 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우(寒雨)의 화답가(和答歌)는 백호 임제의 시조보다 더욱 열정적입니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앵앵침(鶯鶯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잘이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짤까 하노라
다섯째, 임제는 자기 재능으로 시를 새롭게 하는 것만 능사로 삼지 않고 민요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조동일교수는 아래 시 「패강가(浿江歌)」를 두고 고생스럽게 일하는 농민의 처지를 읊어낸 민요사설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고 했습니다.
<패강가(浿江歌)>
辛勤無計望成秋 아무리 고생한들 가슬할 보람이 없네
千畝收來不盈不 온손배미 다 거두어도 한 솥이 못 차누나
官家租稅更相催 관청의 세금독촉 갈수록 심하여서
吏胥臨門吼如虎 동네의 구슬아치 문앞에 와 고함친다
流離不復顧妻孥 이리저리 흩어질 때 처자를 돌볼쏘냐
昨日戶亡今一戶 이제 한 집 없어지고 오늘 한 집 또 나간다
南州轉運北懲兵 남쪽으로 운력가고 북쪽으로 징병가네
我生之後何愁苦 이내 몸 생겨난 뒤 이 어인 고생인가
<탐방사진>
1)영모정
2)백호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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