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20. 담양명소 탐방기2(죽녹원/송강정)

시인마뇽 2021. 2. 21. 20:07

*탐방일 : 2021. 1. 20(), 27()

*탐방지 : 전남담양소재 죽녹원/송강정

*동행 : 나홀로

 

 

 

  강()이 소통과 통합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영산강 강변에서 멀지 않은 산자락에 자리한 죽녹원(竹綠園)과 송강정(松江亭)을 다녀오고 나서  느꼈습니다. 오로지 대나무만으로 조성한 사시사철 푸르른 숲의 죽녹원과 송강 가사의 산실인 송강정, 이 두 곳의 공통점은 영산강과 아주 가까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담양군에서 죽녹원을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산의 능선에 조성했다든지,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골짝에 송강정을 지었다면 이 두 곳을 심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강이 소통과 통합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강물이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흘러 이동하는 덕분입니다. 산은 한 자리에 꼼짝 않고 가만히 있어 사람 사는 마을을 갈라놓지만, 강은 굽이굽이 흘러내려가면서 떨어져 있는 마을들을 물줄기로 이어주어 소통을 돕고,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통합하도록 해줍니다. 수많은 도시가 강을 끼고 발달해온 것은 강이 소통과 통합의 기능을 갖고 있어 가능했을 것입니다. 대하소설 조선총독부의 작가 유주현(柳周鉉)은 그의 소설 임진강은 흐른다에서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소통과 통합을 이룩해낸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9년에 걸쳐 백두대간과 이 대간에서 분기된 9개 정맥을 모두 종주했습니다. 전장(全長)2,800Km 가량 되는 산줄기를 거의 혼자서 종주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능선만을 걸어서 가능했습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도중에 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는 들를 만한 명소가 없어 능선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강줄기를 따라 걷노라면 인근에 들를 만한 명소가 많아 그냥 지나치기도 쉽지 않습니다. 강이 소통과 통합의 장소로 기능해 빚어낸 명소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만, 산은 소통과 통합의 기능을 갖고 있지 못해 산줄기 가까이에는 이렇다 하게 찾아갈 만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영산강 강줄기를 따라 담양 땅을 걸으면서 들른 곳은 죽녹원과 송강정입니다. 죽녹원은 2005년에 조성한 대나무 숲으로 모든 국민들을 위한 오늘의 휴식처이고, 송강정은 1585년 송강 정철이 낙향해 4년간 머물다 간 초막으로, 훗날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양반들의 쉼터가 되었다는 것이 죽녹원과 대비됩니다. 두 곳 모두 제가 처음부터 목적한 곳이 아니고 여행길에 생각이 나 찾아간 곳입니다. 잠시 영산강에서 벗어나 강줄기에서 멀지 않은 두 명소를 탐방한 것은 강이 이뤄낸 소통과 통합의 현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였습니다.

 

 

 

1.죽녹원(竹綠園)

*탐방일자: 2021. 1. 20()

*탐방지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소재 죽녹원

*동행 : 나 홀로

 

 

  담양댐을 출발해 죽녹원에 이르기까지 3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영산강 따라 걷기의 두 번째 구간을 시작한 담양댐에서 향교교까지는 강줄기를 따라 걸었습니다. 관방제림이 끝나는 곳에서 향교교를 건너 죽녹원에 다다른 시각은 오후 242분이었습니다.

 

 

  2005년에 개원한 죽녹원은 담양읍을 관통하는 영산강과 인접한 야산에 조성한 대나무 숲으로, 그 크기는 약31(94천평)에 이릅니다. 울창한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 속에 8가지 주제의 길이 나 있어, 이 길을 걸으며 죽림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죽녹원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라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나무의 이산화탄소 흡수량은 소나무의 4배이며, 여름철 피톤치드의 발생량은 편백나무의 2배나 된다하니 이만한 삼림욕장이 어디 있으랴 싶어서입니다. 대나무의 이산화탄소 흡수는 스트레스 해소, 신체이완 등 심신의 안정을 가져오고 행복감과 편안함을 증대시켜 뇌기능을 활발하게 해준다 합니다. 피톤치드 발산은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고 죽녹원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무료의 경로우대권을 받아들고 죽녹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엄청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나 놀랐습니다. 키가 훤칠한 대나무들이 발 딛을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도 놀랍거니와 줄기와 잎이 모두 진녹색으로 독야청청해, 몇 시간 동안 들판을 덮은 하얀 눈만 보아온 제 눈이 놀랐습니다. 한 여름철이라면 편백나무의 2배가 발산되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오른쪽 전망대인 봉황루에 오르는 것으로 달랬습니다.

 

 

  2층의 기와집 봉황루에 오르자 담양읍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건물 화장실에 사군자 로 대접받는 대나무를 그린 수묵화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과연 죽녹원답다 했습니다. 봉황루 건물 안에 걸린 전시물에서 담양의 대나무와 대나무의 가치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었습니다. 담양의 대나무 식재면적은 전국대나무의 1/3이 조금 넘는다는 것과 300년 역사의 죽물시장과 청죽시장이 죽제품의 생산 감소로 담양천 둔치지에서 열렸던 죽물시장은 폐쇄되고, 요즘은 담양읍의 삽다리로 옮겨 죽제품의 원자재인 청죽시장만 열린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환경적 가치, 약리적 가치, 문화 · 예술적 가치, 산업적 가치와 관광적 가치 등 다양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데, 제가 주목한 것은 이산화탄소흡수량이 소나무의 4배이고 피톤치드 발생량이 편백의 2배이며, 음이온 함량이 일반도시의 7.4배이고 산소방출량이 다른 수종보다 35%나 더 많다는 환경적 가치였습니다. 이토록 유익한 대나무가 지구의 식물 중 가장 빨리 자라 봄에 순이 돋아난 후 40일 내에 성장이 완료되며, 하루에 최고125cm나 자란다고 합니다. 숲을 유지하면서도 목재생산이 가능하고 산사태나 지진 대비에 가장 우수한 수종이라고 하니 대나무의 생태적가치도 적지 않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죽녹원에는 죽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의 산책로가 나 있습니다. 전장이 2.4Km에 달하는 산책로가 자동차가 지나가도 될 만큼 넓게 나 있는 것은 여름철에 관광객들이 몰려들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봉화루를 둘러본 후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길옆에 놓인 독특한 모양의 대나무의자를 보고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생태전시관 안의 이이남아트센터였습니다. 클래식작품과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여 담양에 숨겨진(?) 고전의 현대적 가치를 재생산해 보여주는 아티스트 이이남의 미디어(영상) 아트는 생소했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트의 개념을 확대 해야 수용할 수 있는 미디어(영상) 아트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그 속에서 고전이 재해석된 것을 보았고, 소통과 재생을 추구하는 작가의 얼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을 치워 황토 흙이 드러난 운수대통길을 따라 걷다가 대나무를 세워 여러 개의 문을 만든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 문 위에 세워진 안내판(?)당신의 뱃살은 표준입니까라는 위압적인 질문에 기죽지 않고 대나무문 통과에 도전했습니다. 2년여 체중감량에 힘써 배가 좀 들어갔다 했는데, ‘6024,39cm' 칸을 통과해 표준이라고 호기롭게 답했습니다. 오른 쪽으로 내려가 물이 얼은 죽림폭포를 보고나서 짧은 길인 임금님귀는 당나귀 길도 걸었습니다. 옛날 옛적 한 백성이 대나무 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을 타고 널리 퍼지는 것을 알았다면, 소리친 백성은 엄청 마음을 졸였을 것입니다

 

 

  '사랑이 꽃피는 쉼터를 지나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쌍분(雙墳)을 둘러싼 대나무 숲을 보았습니다. 대나무 숲 뒤로 의젓한 추월산의 자태가 뚜렷하게 보이는 이 곳을 죽녹원은 추월산 뷰 파인더로 지정했습니다. 죽녹원의 대나무들은 키가 훤칠하고 몸체가 제법 굵은 왕대속에 속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대나무를 비스듬히 맛 물려 세운 세모꼴의 터널을 지나자 조릿대속의 키 작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의향정(義鄕亭)을 지나 다다른 한옥쉼터족욕체험장을 일별한 후 매표소로 직행했습니다. 1시간 남짓 죽녹원을 둘러보고 매표소를 빠져나간 시각은 1552분이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적인 시조작가인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연시조 오우가(五友歌)를 통해 대나무()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모도 아닌거시 풀도 아닌거시

곳기 뉘시기며 속은 어니 뷔연다

뎌러코 사시에 프르니 그를 됴하 노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나무가 벼과(Poaceae) 대나무아과(Bambusoideae)에 속하는 상록성 식물의 총칭으로 나무로 분류되는 식물로 적고 있다는 것을 첨언합니다.

 

 

 

 

2.송강정(松江亭)

*탐방일자: 2021. 1. 27()

*탐방지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소재 송강정

*동행 : 나 홀로

 

 

  담양교에서 시작한 섬진강 따라 걷기의 3구간 탐방은 봉산면삼지리의 영산강/증암천의 합수점에서 종료하고, 고산면송강정로에 자리한 송강정으로 향했습니다. 삼지리의 합수점에서 증암천 남쪽의 제방 길을 따라 동진하다가 양지삼거리로 옮겼습니다. 양지삼거리에서 29번 도로를 따라 남진해 송강정주차장에 도착하자 바로 앞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송강정이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서 단숨에 돌계단을 올라가 송강정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앞 안내판에 무등산권유네스코지정세계지질공원 담양군역사문화명소로 소개된 송강정(松江亭)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안내판에 적힌 송강정의 소개 글이 아래와 같이 옮겨놓은 것은 이 글을 토대로 몇 가지 부연설명을 덧붙이기 위해서입니다.

 

 

  “조선 선조 때인 1584년 대사헌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동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청평으로 내려와 죽록정(竹綠亭)이라는 초막에 은거했다. 그는 우의정이 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이곳에서 4년간 머물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을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770년 세운 정면3,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송강정(松江亭)이라 일컬었다.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思美人曲) 시비(詩碑)가 서 있다.”

 

 

  첫째, 정철이 탄핵을 받은 것은 1584년이고, 청평에 내려간 것은 다음 해인 1585년입니다. 1584년 절친한 지우인 율곡 이이와 사별한 정철은 대사헌으로 제수됩니다. 그해 12월 동인의 탄핵을 받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직을 유지합니다.  다음해 8월 양사의 논척을 받고 고양에 우거하다가 곧 창평으로 내려갑니다. 큰아들이 죽어 장사를 지내기 위해 청평에서 고양으로 이전한 것은 1589년의 일이니 창평에서 4년간 머무른 셈이 됩니다. 

 

  둘째, 청평에 머물면서 지은 가사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외에 성산별곡이 더 있습니다. 50(1585)에 내려와 여기 죽녹정에 기거하면서 지은 가사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입니다. 성산별곡은 25(1560)가 되어 정계에서 물러나 창평에 머무르면서 먼저 지었습니다. 이 가사는 성산(星山) 기슭에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린 것이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가사(歌辭)란 조선 초기에 나타난 시가와 산문 중간 형태의 문학을 이르는 것으로, 주로 4음보의 율문(律文)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대부는 물론 여성들도 지을 만큼 폭넓게 창작되고 향유된 가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저서 서포만필에서 이 세편(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의 별곡은 천기(天機)가 스스로 발한 것을 담고 있되, 이속(夷俗)의 비리함은 없으니,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참 문장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김만중은 사미인곡이나 관동별곡은 여전히 한자어를 빌려 윤색한 것이어서 속미인곡에 못 미친다며 속미인곡을 으뜸으로 쳤습니다. 여기 송강정의 시비에는 보다 널리 알려진 사미인곡이 새겨져 있습니다.

 

  셋째, 일반 정자와 달리  송강정은 사면이 벽인 방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여닫이 방문과 마루도 같이 있어 기거가 가능합니다. 정철이 죽녹정에서 기거했다는 것은 그때  이미 방이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송강정의 팔작지붕도 다른 정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송강 정철이 빼어난 가사와 시조를 창작한 것은 담양의 창평에 머물면서 호남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한 덕분일 것입니다. 송강 정철은 16(1551)년 때 명종의 원자(元子)가 탄생해 은사(恩赦)로 부친이 해배되자, 조부의 묘가 있는 담양의 창평으로 이주해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냅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 · 김인후(金麟厚) · 송순(宋純) ·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웁니다. 25(1560) 때 창평으로 다시 내려와 김성원을 위해 성산별곡을 지었고, 50(1585)년 또 내려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은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송강 정철에게는 여기 담양의 청평이 마음의 고향이었을 것입니다. 태어난 고향은 한양이지만, 한양은 치열한 정쟁의 현장이었지 마음 붙이고 편히 쉴 만한 고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양에서 물러나 산 곳은 청평이었지만, 정작 죽어서는 창평 땅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숱하게 우여곡절을 겪은 정철은 58세인 159312월에 강화에서 불운하게 병사합니다. 이듬해인 1594년 봄 정철의 유해는 서울근교 고양으로 옮겨져 묻혔다가, 70여년이 지난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됩니다.

 

 

  노송들이 둘러싸준 송강정을 돌아본 후 북쪽 아래 증암천을 내려다보면서 사미인곡 등의 가사를 지어 불렀을 송강(松江) 정철을 떠올렸습니다. 송강정에서 내려가 주차장 옆 카페를 들러 커피를 마시면서 조선 최고의 풍운아 송강 정철이 죽녹정에서 맞이한 저녁은 어떠했을까 그려보는 것으로 송강정 탐방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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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5년과 2005년이란 시간의 간극은 송강정과 죽녹원의 공간적 간극보다 훨씬 메우기 힘들 것입니다. 영산강이 빚어낸 소통과 통합의 문화적 실체일 수 있는  송강정과 죽녹원의 시간적 간극을 메워주는 것은 바로 竹綠입니다. 푸르른 대나무가 공간적으로는 竹綠園의 숲으로, 시간적으로는 竹綠亭의 정자이름으로 사람들과 소통하여 담양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가사문학의 산실이라 불러야 마땅한 담양 땅에서 두 곳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것도 영산강을 따라 걷고 있어 가능했습니다. 나머지 영산강도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가끔은 인근 명소를 찾아 볼 뜻입니다.

 

 

 

<탐방사진>

 

1.죽녹원

 

 

 

2.송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