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1. 4. 5일(월)
*탐방지 : 전남목포시 소재 목포갓바위
*동행 : 나 홀로
담양의 용소에서 시작한 ‘영산강 따라 걷기’를 영산강 하구둑에서 끝마친 후, 완주의 기쁨을 가슴에 안고 찾아간 목포의 명소는 바닷가에 자리한 갓바위입니다.
갓바위에 터를 내준 목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69년7월26일입니다. 제가 날짜까지 정확히 적을 수 있는 것은 그날 마침 개통한 광주역에서 개시로 운행한 열차를 타고가 처음으로 목포 땅을 밟은 것을 오래 기억하고파 일기에 써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목포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건너갔습니다.
1990년대 중반 2년 반 동안 다달이 목포를 찾아간 일이 있어 목포가 낯설지 않습니다. 모회사의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매월 한 번은 영업목표 달성을 독려하기위해 광주를 출발해 목포-완도-순천-여수 순으로 대리점을 방문했다가 광주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한번은 영산기맥 종주 차 유달산에서 시작해 목포 시내 산줄기를 종주했고, 홍도를 탐방하느라 목포항을 찾아가 배를 탄 적도 두 번 있습니다.
목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영원한 국민가수 이난영입니다. 1916년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1935년 문일석이 가사를 쓰고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요계의 신성(新星)으로 등장합니다. 이봉룡 작곡의 「목포는 항구다」와 김해송 작곡의 「다방의 푸른 꿈」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유명가수가 됩니다. 한국전쟁 때 남편 김해송이 납북된 후 악단을 손수 운영하기도 하면서 연예활동을 계속한 이난영은 자식들을 가수로 키웁니다. 김씨스터스와 김보이스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자식들을 따라 1963년 한 때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귀국해 1965년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가수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불러 시름을 덜어주지 않았다면, 이 땅의 어르신들은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더욱 힘들게 보냈을 것입니다. 제가 가끔 「목포의 눈물」을 듣거나 따라 부르는 것은 저 역시 이난영의 노래를 듣고 위로받아야 하는 시름이 남아 있어서일 것입니다. 과연 이난영은 목포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국민가수로 추앙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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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하구둑에서 9회에 걸친 ‘영산강 따라 걷기’ 완주를 자축한 후 북쪽 시내를 향해 하구둑을 따라 걸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바로 목포역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바꾸어 하구둑 끝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해안가 길로 접어든 것은 보다 가까이에서 서해바다를 조망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영산강의 마지막 구간을 종주하느라 이미 20Km 가량 걸었지만, 전장 150Km의 영산강을 완주한데 고무되어서인지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해안가로 길만 나 있다면 목포역까지 걸어가 볼 생각으로 하구둑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 아래 해안 길로 내려섰습니다.
평화의 다리를 건너 시작된 제4구간의 하당트레킹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1.4Km를 걸으면 달맞이공원에 다다릅니다. 해안을 따라 일직선으로 나 있는 해당트레킹 길은 북쪽 뒤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고, 남쪽 전면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직전에 다녀온 영산강하구둑의 갑문을 사진 찍었습니다. 해당트레킹길 중앙의 평화광장은 해양음악분수인 ‘목포 춤추는 바다분수’의 분수 춤을 관람하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기대했던 음악분수는 보지 못 하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면서 평화광장 데크 위에 앉아 분수 춤을 기다리고 있는 갈매기들을 사진 찍었습니다. 해안 길은 달맞이 공원에서 안쪽으로 휘어져 갓바위로 이어졌습니다. 목포9경 중 제3경으로 선정된 갓바위까지는 해안에서 5-6m 떨어져 바다 위에 설치한 데크 길이 나 있어 걷기에 좋았습니다. 데크 길로 들어서자 해안을 따라 곧추서 있는 해식절벽이 펼쳐졌습니다. 바위들이 떨어져나간 풍화혈(風化穴, tafoni)이 보이는 가 했더니, 이내 풍화와 해식이 절정에 달해 빚어낸 자연의 조각품 ‘목포 갓바위’가 전신을 드러내보였습니다.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한 ‘목포갓바위’는 영산강이 서해와 만나는 강 하구인 용해동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오랜 세월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을 받아 풍화혈(風化혈, tafoni)이 만들어진 바위입니다. 저녁노을이 비치는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입암반조(笠岩返照)라 불렀다고 합니다. 목포9경의 하나로 선정된 갓바위는 8m 크기의 큰 바위와 6m 크기의 작은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두 바위 모두 그 형상이 삿갓을 쓴 사람과 매우 닮아 갓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목포갓바위는 약8천만년전 화산재가 굳어져 생성된 응회암이 파도의 충격과 바닷물의 염분에 영향을 받아 형상이 변화해 오늘의 갓 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제껏 일어난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라 합니다. 이 바위의 생성과정은 해상보행교의 쉼터에 설치한 안내판에 자세히 소개되어 전문을 아래와 같이 옮겨놓습니다.
“목포 갓바위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로 그 특이한 형상은 마치 삿갓을 쓴 사람 같다. 이와 같은 풍화혈은 노출암괴에서 수분이 암석 내부로 쉽게 스며드는 균열부위에서 발달한다. 스며든 수분의 부피변화로 물리적 압력을 받으면 암석을 구성하는 물질이 더 쉽게 알갱이로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 곳은 햇빛이 가려져 있어 더 많은 습기가 모여 빠른 속도로 풍화되므로 풍화혈이 형성되면 암석 내부까지 형성된다. 목포 해안 갓바위는 인위적 작용이 아닌 해역의 풍화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진 조각품으로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가지고 있다.”
안내판에 소개된 목포갓바위의 전설은 이러합니다. 한 소금 팔이 아들이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고자 부잣집 머슴으로 일하러 가지만 못된 주인을 만나 품삯을 받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 달 동안 병간호를 했으나 끝내 돌아가신 아버지를 양지바른 곳에 묻으려고 가다가 그만 관을 바다에 빠트립니다. 아들은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볼 수 없다면서 갓을 쓰고 살다 갔는데, 훗날 갓 모양을 한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목포갓바위의 전설에서는 아들의 효심은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다 할 전망이 제시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경북 경산의 팔공산갓바위는 해발850m의 관산에 자리하고 있는 불상입니다.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부처님께서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전설이 전해져 요즘도 이 높은 관봉에 올라 갓바위 불상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위의 갓바위와 해안가의 갓바위가 전해주는 전설이 이리도 다른 것은 지형과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갓바위 탐방을 마치고 목포자연사박물관 앞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목포역으로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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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을 쓴 사람 형상을 한 갓바위가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 보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갓바위의 모습이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던 조상들의 얼굴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불효를 후회하는 아들이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듯이 핍박받는 백성들은 상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여윈 백성들과 얼굴부분의 바위돌이 떨어져 나가 머리만 남은 갓바위 얼굴이 너무 닮아 보이는 것은 저도 어린 시절에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보자 머리와 턱만 남아 있는 갓바위의 모습은 조금은 우스꽝스러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13년 전에 들른 화순 운주사의 불상들과 많이 닮아 보였습니다. 제가 본 운주사의 석불들은 얼굴 모습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어떤 돌부처는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으며, 또 다른 석불은 두 손을 꼭 잡고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 있는 온후한 부처님만을 보아온 저로서는 앞서 본 두 돌부처가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목포의 갓바위를 보고 해학미가 돋보이는 운주사의 불상을 떠올린 것은 모두가 정교하고 귀티 나게 만든 것이 아니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한 많은 대중들의 시름을 덜어주었다면 목포갓바위는 처절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지금도 대중들을 위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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