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40. 화엄늪의 안개

시인마뇽 2021. 1. 8. 08:18

 

 

  낙동정맥 종주 길에 들른 화엄늪은 넓었습니다. 안개 속에 몸을 숨긴 화엄늪이 그 크기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넓게 느껴졌습니다. 안개가 가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였다면 아무리 화엄늪이 넓다 해도 그 끝이 보일 것이 분명하기에 크기를 가늠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광활하다 해도 영남알프스의 사자평전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원효산의 화엄늪이 끝없이 넓게 느껴진 것은 순전히 안개 덕분입니다.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한 밤중에는 사방이 캄캄해 늪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기에 넓고 좁고를 이야기할 계제가 못됩니다. 태양이 세상을 밝히는 낮에는 십 수 분만 내달려도 한 끝에 다다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해 실제 크기가 한 눈에 잡힙니다. 화엄늪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질 수 있는 것은 안개가 이 늪을 휘감아 오로지 상상으로만 그 크기를 가늠할 때뿐인데 이번이 그러했습니다.

 

 

  저는 희뿌연 안개를 좋아합니다. 제가 농도 짙은 안개를 더욱 좋아하는 것은 세상 만물이이 안개 속에 숨어 모처럼 편안히 쉴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공익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비밀스러운 부분도 다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투명성 확보가 곧 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사람들은 툭하면 버선목을 뒤집어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아름다운 비밀은 추억으로 숨겨두고 성공한 기업의 경영 비밀은 그 기업의 노하우(know-how)로 남겨두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온 저로서는 투명성제고에 매달려 모든 것을 다 보여 달라는 주장하는 이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밤의 어둠은 이 세상을 모두 검은 색으로 덮어버리고 낮의 밝음은 이 산하의 현란한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하지만 안개는 이른 아침 밤과 낮의 완충지대에 자리 잡아 희뿌연 색깔로 이들 간의 색 대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안개의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낮과 밤의 양극사이에 완충지대(Buffer Zone)를 만들어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기에 세상만물이 안개 속에 숨어 편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 화엄늪에 몸을 숨긴 도롱뇽은 저처럼 안개에 고마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원하지도 않은 천성산터널공사 중단송사의 주인공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차가운 시선이 그간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꾸몄을지도 모를 송사가 훤한 대낮에 진행될 때마다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괴로움에 시달렸을 도롱뇽이기에 설사 인간변호사가 대리 출석을 한다 해도 신경이 엄청 쓰였을 것입니다. 1,400여 년 전 원효대사께서 여기 화엄늪에서 수천 명의 불제자들에 화엄경을 강의하실 때 그분들과 함께 들은 것 말고는 인간들과 이렇다 할 인연을 맺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별안간 한 여스님이 자신들의 생존권확보를 위해 단식에 들어간다고 야단법석을 떨어 몸 둘 바를 몰랐었기에 낮과 밤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기를 도롱뇽은 간구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도롱뇽을 만나 인간들의 괴롭힘에 대해 사과 말을 전하고자 했으나 안개 속에 몸을 맡기고 편히 쉬고 있을 그들을 불러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냥 돌아왔는데 역시 잘한 일 같습니다.

 

 

  짙은 안개에 가려 원효대사님을 끝내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안개가 가셔 원효산 정상에 정좌하고 계실지도 모를 대사님을 뵐 수도 있겠다 싶어 자주 뒤를 돌아보았으나 끝내 원효산은 정상을 내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 덕분에 이 땅에서 숙면을 취하고 계실 대사님을 아직은 깨울 때가 아닙니다. 뒤뚱거리기는 해도 우리나라는 북녘 땅 나라보다 훨씬 잘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두고 온 화엄 늪의 짙은 안개를 그리며 눈 좀 붙이고자 합니다.

 

 

 

 

*위 글은 201189일 대학동문 이상훈교수와 함께 낙동정맥의 화엄늪갈릴길-천성산-영산대갈림길 구간을 종주하고 남긴 산행기에서 화엄 늪을 걸으며 느낀 단상 부분을 떼어 20211월8일 일부를 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