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데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로 정의됩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바뀌고,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를 일컫는 언어 또한 따라 변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처럼 나이든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의'를 '에'로 잘 못 발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표준발음법에서 '의'를 '에'로 발음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해서입니다. 표준발음법이 '서울의'로 쓰고 '서울에'로 읽어도 틀리지 않다고 해야 할 만큼 발음〔ㅢ〕가 〔ㅔ〕로 많이 변화해온 것입니다. 시대변화에 따른 언어의 변화는 발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정(人情)’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심정’, ‘남을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 ,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벼슬아치들에 몰래 주던 선물’ 등 그 뜻이 4가지나 적혀 있습니다. 이는 ‘인정(人情)’이라는 단어가 조선시대에는 ‘뇌물’이라는 뜻으로도 쓰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이 단어가 ‘남을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 등 좋은 의미로만 쓰인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발음뿐만 아니라 의미도 같이 변화합니다.
고유명사인 산 이름도 고정불변일 수는 없습니다. 어제(2018. 3. 3일) 다녀온 충남의 오서산(烏棲山)도 이름과 뜻이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오서산전망대의 안내판에 따르면 백제 때 불린 오산(烏山)이 가장 오래된 이름인 것 같습니다. 통일신라 때는 오서악(烏西岳)으로 불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오서산(烏棲山)으로 바뀐 후 오늘까지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제1에 3산5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중 중사는 5악, 4진, 4해, 4독 외에 기타 지역에서도 제를 올렸는데, 기타 지역에 오서악(烏西岳)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서악은 결기군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짓던 고려 인종 때는 홍성군 결성면에 소재한 것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오서산을 이르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산이 단군조선에서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동안 신령스런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받들어져온 것은 태양 안에 세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가 살았다고 믿어서라 합니다. 이런 성스러운 산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오서산(烏捿山)으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산”으로 비하되면서 성스러운 명산의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습니다. 이 산은 옛 그대로인데 붙여진 이름은 오산-오서악-오서산으로 변천되어 왔으며, 그 뜻하는 바도 삼족오라는 성스러움에서 기억을 제대로 못하고 까먹기를 잘하는 까마귀로 바뀐 것은 언어 또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서산을 산행하면서 몇 마리의 까마귀가 깍깍 우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몸통의 색깔이 온통 새까만데다 그 우는 소리도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어서 어느 누구라도 까마귀를 옛날처럼 성스러운 삼족오로 받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까마귀의 전신인 전설상의 삼족오가 상상속의 봉황새로 대체됨에 따라 까마귀의 위상이 삼족오와 함께 떨어지는 것이 어쩔 수 없었듯이, 오서산도 그 후 더 유명한 산들이 속속 밝혀짐에 따라 그 지위가 그저 그런 산중의 하나로 격하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서산을 굳이 한자로 표기하지 않고 그냥 한글로 표기해 까마귀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까마귀산”이라는 오명을 씻어내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위 글은 2018년3월3일 오서산을 산행한 후 쓴 오서산산행기에서 일부를 따와 2021년1월26일 가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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