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금강 따라걷기

금강 따라 걷기2(노하교-천천리-가막삼거리)

시인마뇽 2021. 7. 1. 00:00

*탐방구간: 노하교-천천리-가막삼거리

*탐방일자: 2021. 6. 20()

*탐방코스:장수터미널-노하교-왕대교-타루비-운곡마을-천천파출소

-천천교-쌍암삼거리-평지마을-가막삼거리

*탐방시간: 1110-1845(7시간35)

*동행 : 나 홀로

 

 

  다함이 없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뜻하는 무진장(無盡藏)’이라는 단어는 요즘에는 별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진장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어린 시절은 지독히도 가난한 시절이어서 조금만 많아도 무진장 많다고 했는데, 풍요롭기 그지없어 없는 것이 거의 없는 요즘에는 굳이 많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어져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에는 무진장이라는 단어는 무진장(無盡藏)’ 보다는 무진장(茂鎭長)’이라는 뜻으로 더 자주 쓰이는 것 같습니다. 전라북도의 무주(茂朱), 진안(鎭安)과 장수(長水)를 통틀어서 부를 때 쓰이는 무진장(茂鎭長)’이라는 조어(造語)는 산간벽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는 무주, 진안과 장수가 강원도 못지않은 산간벽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진장이라는 단어가 앞으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겠다 싶은 것은 이 지역의 인구가 감소하여, 계속해서 산간벽지로 남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한 예로 2015년도 장수군의 인구는 23,277명으로, 이는 30년 전인 1985년의 47,388명 대비 49%가 줄어들었고, 2020년에는 22,099명으로 감소했습니다.

 

  제가 무진장(茂鎭長)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69년입니다. 그 해 7월 영동역에서 하차해 무주를 거쳐 구천동계곡에 갔다가 무주로 다시 나와 장수와 남원, 담양을 거쳐 광주로 여행했고, 다음 해 2월에는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무주로 들어가 덕유산을 올랐다가 다시 무주로 가서 전번과 똑같은 코스로 광주로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무진장과의 인연은 아홉 번의 덕유산 등산과 백두대간 및 금남호남정맥 종주 등으로 더욱 깊어졌습니다. 무진장이 자랑하는 덕유산, 남덕유산, 적상산, 마이산, 운장산, 부귀산, 성수산, 팔공산, 신무산, 장안산과 영취산 등 명산을 두루 올랐고, 이 산들을 이어주는 능선도 거의 빠짐없이 걸었습니다.

 

  무진장과의 인연을 강으로 넓히는 것은 며칠 전 뜬봉샘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걷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장수의 신무산 자락에서 발원해 군산 앞바다인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물 흐름이 끝나는 금강이 전북의 장수와 진안, 그리고 무주 땅을 헤집고 굽이굽이 흐른 후에야 충청남도의 금산 땅에 이르게 됩니다. 이번에 다녀온 두 번째 금강 따라 걷기는 장수 땅을 막 벗어나 가막삼거리에서 진안 땅에 첫 발을 들이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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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역을 출발해 장수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5시간가량 걸렸습니다. 아침 610분 수원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전주역에 도착한 시각은 919분입니다. 택시로 안골의 무진장간이정류장으로 이동, 950분에 탑승한 장수행 버스는 진안과 천천을 거쳐 11시가 조금 지나 장수터미널에 다다랐습니다. 대합실을 들러 버스시간표를 사진 찍은 후 1110분경 터미널을 출발해 지난번에 첫 구간을 마친 노하교로 향했습니다.

 

  1130분 노하교를 출발했습니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읍내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직진해 다다른 봉강교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금강 우안의 제방 길을 따라 걸어 노하교에 이르렀습니다. 한 낮에 목덜미를 내리 쬐는 6월의 태양은 창모자로 가리고 땡볕의 천변 길을 이어가다 이내 오른 쪽 아래 노하숲으로 내려갔습니다.  간이 정자에 걸터앉아 점심 식사를  한 후, 신기교를 건너 금강 좌안의 천변길을 따라 왕대리로 향했습니다.

 

  금강은 뜬봉샘에서 대청댐까지 자전거전용도로가 나 있지 않습니다.  사전에 갈 길을 확인하지 않으면 지난번 수분2교에서 그랬듯이 도중에 길이 끊겨 오던 길로 되돌아 가기 십상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카카오맵을 보고 건널 다리와  지날 다리를 사전에 점검하여 도표로 만들어 길을 나섰습니다.

 

  신기교를 건너 왕대마을회관에 이르기까지 반시간 가량 걸렸습니다. 그새 수량이 늘고 강폭도 넓어져 금강을 가로질러 놓은 왕대교 다리가 반시간 전에 건넌 신기교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왕대교에서 13번 도로를 따라 북진해 천천면으로 들어서자마자, 첫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요양원 길로 들어섰습니다.

 

  1251분 타루비를 둘러보았습니다. 요양원삼거리에서 2-3분 걸어가다 판둔1교에서 왼쪽으로 꺾어 금강 좌안의 천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포장이 잘 된데다 길도 넓어 트랙터가 넉넉히 다닐 만큼 넓은 판둔1-타루교 사이의 강변길이 하도 한적해, 제가 공기를 가르고 걷지 않았다면 강물과 시간이 함께 멈춰선 것이 아닌가 착각할 뻔 했습니다. 강 건너 야산에 설치한 시꺼먼 태양광집적판만 없었다면 눈에 거슬리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한갓진 시골의 천변 길을 걸으면서 강가에서 유유히 노닐며 시간을 낚는 백로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왕대교를 출발한지 반시간이 지나 13번 도로가 지나는 타루교 앞에 도착해, 길옆에 자리한 전라북도기념물 제83호인 타루비(墮淚碑)’ 권역을 둘러보았습니다. 문 앞의 안내판에 타루비를 소개하는 간략한 글이 실려 있어 여기에 옮겨놓습니다.

 

  “타루비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을 지닌 비석이다. 숙종4(1678)에 장수현감이 민심을 살피기 위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던 중 말굽소리에 놀란 꿩이 소리치며 날아올랐다고 한다. 이에 놀란 말이 발을 헛디뎌 장수현감이 벼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를 모시던 통인은 이 사고가 자신의 탓이라 비관하여 현감을 따라 죽었다. 통인(通引)의 이름을 알 수 없고 성이 백씨라고만 전한다. 이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순조2(1802)타루비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장수에서는 이를 주논개(朱論介), 정경손(丁敬孫)과 더불어 장수삼절(長水三絶)로 추앙하고 있다. 타루비 옆 장수리순의비(長水吏殉義碑)’18819고종18)에 세운 것으로, 비각 옆 바위 윗면에 같은 날 생()을 마친 조종면(趙宗冕) 현감을 기리는 물망비(勿忘碑)’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양 옆으로 담벼락이 쳐진 문 안으로 들어가 먼저 들른 곳은 두 곳의 비각입니다. 한 비각에는 殉義吏白氏墮漏追慕碑’(순의리백씨타루추모비), 또 다른 비각에는 長水吏殉義碑’(장수리순의비)墮淚碑’(타루비)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길옆에 자리한 수직의 암벽에 말 한 마리와 꿩 두 마리를 양각으로 새겨놓은 것을 보고 이 조각이야말로 통인 백씨의 죽음을 기리는 가장 압축적인 서사(敍事)이다 싶었습니다.

 

  타루교를 건너 13번 도로를 따라 걷다가 오른쪽 금강의 좌안 길로 옮겨 북진했습니다. 반월교를 건너 반월마을 어구의 숲속에 자리한 반월정에서 잠시 쉬어갔습니다. 아직은 포장도로에서 지열(地熱)을 뿜어내지 않아 챙 모자로 땡볕을 가리는 정도로 걸을 수 있지만, 7월로 접어들면 지열이 만만치 않아 그늘이 거의 없는 강줄기를 따라 걷는 것은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아 삼갈 뜻입니다. 반월교를 다시 건너 수분 후 13번 도로로 복귀해 북진을 계속하다 다시 강변으로 다가가 금강의 좌안 길을 따라 진행했습니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만만치 않아 박곡교에 이르러 다리 건너 느티나무를 찾아가 쉬었습니다. 다시 13번 도로를 따라 걸으며 월곡교회와 지금은 폐교된 월곡초교를 지나 다시 오른 쪽의 강변길로 다가가 덕들교 앞에 이르렀습니다.

 

  157분 천천에 도착했습니다. 덕들교에서 천천까지는 금강 좌안의 천변길을 따라 진행했습니다. 인삼밭과 담배밭(?)이 들어선 천변 길 왼쪽 들판 한 중간에 자리한 거목의 느티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엄청 시원해보여 들러서 시간만 여의하다면 쉬어가고 싶었습니다. 천변 오른쪽의 금강은 유로가 좁아 강폭의 1/3을 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천 물을 정화하는데 크게 도움 되는 갈대들이 강폭의 2/3가량을 덮고 있어서인지 강물은 상류보다 더욱 맑아보였습니다. 운곡교를 건너 운곡마을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건너와 천변길을 이어갔습니다. 면소재지인 천천이 가까워질수록 익산과 포항을 잇는 고가(高架)의 고속도로가 점점 크게 보였습니다. 천천사거리에 도착해 슈퍼를 들러 음료수 두 캔을 사서 연거푸 마시고나자 갈증이 가시는 듯 했습니다.

 

  천천파출소 앞에서 천천교까지는 금강과 한참 떨어진 13번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고개를 넘어 GS칼텍스주유소 옆 천천교에 이르자 바로 앞에서 장계천 물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금강이 도도하게 흘렀습니다. 천천교 건너 용광삼거리에서 오른쪽 장계로 이어지는 26번 도로를 버리고 왼쪽의 13번 길을 따라 북진했습니다. 광산산촌생태마을에 이르러 왼쪽 아래 금강으로 내려가 금강 우안 길을 따라 걸으며 강 건너 암벽을 사진 찍었습니다. 금강 우안길은 얼마가지 않아 끊어졌고, 별 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 13번 도로로 복귀해 천천1교를 건넜습니다. 이 다리에서 13번 도로 오른쪽 아래로 굽이져 흐르는 금강을 다시 만난 것은 1657분 천진2교에 다다라서였습니다.

 

  1715분 오연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17시에 천천을 출발하는 신기행 버스를 놓칠까 염려되어, 천진2교를 건너 오연삼거리에 도착하기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농촌버스라지만 정류장이 아닌데서 차를 세워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버스정류장을 확인하며 걸어가느라 신경이 쓰였습니다. 웬만하면 가막마을과 동향 양쪽으로 길이 갈리는 오연삼거리까지 가서 버스를 탈 뜻으로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오봉보건소를 지나자 등 뒤에서 달려온 신기행 버스가 저를 지나쳐버려 오연삼거리에서 신기행 버스를 타겠다는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오연삼거리에 도착해 1723분에 여기를 출발해 가막삼거리를 거쳐 진안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서 진안행 버스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4.9Km 떨어진 하가막까지 걸어가 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오연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이제껏 걸어온 13번도로는 오른 쪽 동향 쪽으로 이어졌고,  가막골가는 길은 직진 길의 726번 도로였습니다. 금강은 오연교 다리 아래에서 계북천 물을 받아들여 726번 도로와 나란히 북서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구상마을 지나 오른 쪽으로 동향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자 강물은 시계반대방향으로 휘돌아 평지마을 앞으로 흘러갔습니다.

 

  1845분 가막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평지마을 이정표를 막 지나 커다란 느티나무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쓰러져 있는 강변에 앉아 간이 보()를 바라보자 잔잔한 수면에 내려앉은 석양이 감지됐습니다. 평지마을을 지나 연평교 건너에 자리한 연평마을은 재야사학자 이이화선생이 기거하며 한국사이야기를 집필한 곳이라 하는데 들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역사를 나름대로 개괄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이화선생의 한국사이야기를 읽은 덕분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염려했던 것은 저자가 재야사학자라서 철지난 민중사관에 치우쳐 저술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첫 권을 읽고 제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한 후 22권 전권을 출간되는대로 사서 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한때 병환으로 집필을 중단했다가 다행히 쾌차하시어 장장 22권이나 되는 한국사이야기를 모두 탈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한국사 통사에 관한 역저 한국사이야기의 산실이 연평마을이라는 것은 신정일님이 지은 우리 강 따라 걷기 금강 401Km를 읽고서 알았습니다

 

  연평교에서 조금 떨어진 부연버스정류장을 지나자 길가에 피어 있는 진적색의 가을 꽃 코스모스(?)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허리는 가는데 키가 훤칠해 나뭇잎이 미동도 하지 않는 미풍에도 전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코스모스에 눈길이 간 것은 꽃 이름 코스모스(cosmos) 때문입니다. 멕시코가 원산지라는 이유로 코스모스 꽃을 외래종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전국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데다 우리 고유의 어떤 꽃과도 잘 어울려 지내고 있어서입니다. 영어 cosmos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우주입니다. 코스모스가 뜻하는 우주는 질서 있는 시스템인 로고스(logos)의 세계로, 혼란스러운 카오스(caos)의 우주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코스모스 꽃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질서는 때가 되면 어디서나 꽃을 피우고 주변의 다른 꽃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싶습니다.

 

  장수군의 마지막 마을인 신기마을을 지나 금강을 다시 만난 곳은 가막교였습니다. 장수의 연평리와 진안의 가막리를 이어주는 가막교에서 잠시 멈춰 적벽강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만한 승경을 완상했습니다. 수직의 암벽과 암벽을 받쳐주는 잔잔한 강물, 그리고 바위 상단을 덮고 있는 푸르른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아쉬워했던 것은 이렇다 할 정자가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오래된 정자가 없다는 것은 풍광을 노래할 만한 사대부들이 들러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이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한 사대부들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경승지가 명승지가 될 수 있으려면 자연적인 경관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에 인문학적인 서사가 덧붙여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인문학을 생활화한 사대부들이 들러 시를 지으며 쉬어갈 만한 정자는 필수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막교를 건너자마자 진안터미널을 1820분에 출발해 신기마을로 갔다가 진안읍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만났습니다. 이 버스를 타고 오천리를 지나 진안터미널에 195분에 도착해 5분을 기다렸다가 전주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노하교-천천-가막교 구간의 두 번째 금강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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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종 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장수의 인물로 고려 충선왕 때 문하시중병장사를 역임한 이임간(李林幹, 생몰연도 미상)과 조선 세종 때 여러 해 동안 영의정을 지낸 한 황희(黃喜, 1363-1452), 그리고 황치신(黃致身, 1397-14840)과 황수신(黃守身, 1407-1467)이 실려 있습니다. 이임간은 조선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李從茂, 1360-1425)의 증조부이며, 황치신과 황수신은 황희의 아들입니다.

 

  장수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은 조선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일 것입니다. 신증도국여지승람에 실린 세 인물 중 가장 자세히 소개된 사람은 바로 황희입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숨어 있다가 태조의 간청으로 출사한 황희는 형조, 이조, 병조, 예조 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 자리에 오릅니다. 18년간 영의정으로 일하면서 세종을 보필한 황희는 조선을 반석으로 끌어올리는데 크게 공헌합니다. 뿐만 아니라 황희는 맹사성(孟思誠, 1360-1438)과 더불어 “황희 정승네 치마 하나 가지고 세 어이 딸이 입듯 한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로 조선의 청백리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장수군에서 발간한 장수여행관광안내전단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황희에 관한 소개 글이 보이지 않습니다. 본관이 장수이고 경기도 개성의 가조리에서 태어난 황희가 말년에 시간을 보낸 곳은 경기도 북부의 파주입니다. 임진강변의 정자 반구정과 묘지 모두 제 고향 파주에 자리하고 있어, 저는 이제껏 황희를 파주가 낳은 최고의 인물로 알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대단한 인물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황희는 고향을 떠나 출세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가 외지에 묻혀, 이제는 더 이상 장수의 인물로 보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수여행관광안내전단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수의 인물은 황희가 아니고 장수삼절(長水三絶)입니다. 장수삼절로 뽑힌 세 인물은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남강 가의 바위로 유인해 허리를 껴안고 뛰어내려 순절한 의녀 주논개(朱論介), 임진왜란 중 왜군이 쳐들어오자 혼자서 끝까지 남아 장수향교를 온전히 지킨 향교지기 정경손(丁敬孫), 그리고 말굽소리에 놀란 꿩이 소리치며 날아오르는 바람에 말이 발을 헛디뎌 장수현감이 벼랑으로 떨어져 죽자 그 사고가 자신의 탓이라 비관하여 현감을 따라 죽은 수행원인 통인(通引) 백씨입니다. 세 사람 모두 의롭기로는 누구보다 빼어난 인물이나, 신분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네 인물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이들 세 분이 이곳 장수에서 황희 정승보다 더욱 추앙받는 것은 이들은  황희 정승처럼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요구받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의()를 실천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