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가막삼거리-죽도-외송버스정류장
*탐방일자: 2021. 9. 24일(금)
*탐방코스:가막삼거리-대문바위-구령천합수점-병풍바위-장전정류장 -병풍바위전망대-내송-외송정류장
*탐방시간: 11시27분-17시30분(6시간3분)
*동행 : 서울사대 원영환/이상훈동문
옛날 어머니들이 아기를 가슴에 안지 않고 등에 업은 것은 두 손이 자유로워야 집안일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전제품이 보급되면서 가사일로부터 해방된 다음부터는 아기를 업지 않고 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누구를 업는다면 어린애가 아닌 어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어른들은 앞으로 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금강따라걷기’에 같이 나선 두 명의 친구들을 업고 금강의 제1지류인 구령천을 건넜습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에 잠긴 10m 안팎의 시멘트 길에 다가가면서 언뜻 생각한 것은 이 친구들을 한 번 업고 건너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십여 년 전 봄에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경기도 파주의 보광사로 놀러 갔을 때 여기보다 조금 넓은 문산천을 친구를 업고 건넌 일이 불현 듯 떠올랐습니다. 이번에 한 친구가 농담조로 업기를 제의해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응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잠긴 물은 깊지 않은데 물 흐름은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 있어 60Kg를 넘는 친구들을 등에 업고도 휘청대거나 뒤뚱거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이의 남자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서로 껴안고 반가움을 표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악수를 하는 것으로 피부감촉을 느끼는 것이 전부였는데, 작년 봄 코로나19가 전파된 후부터는 그나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작해야 주먹을 대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번에 생각지도 않게 두 친구를 등에 업고 물을 건너면서 느낀 것은 악수보다 더 많은 묵언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몸이 닿는 면적이 넓고, 악수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들어서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를 더한다면 업는 것은 악수처럼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친분이 쌓인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업는 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감동을 준 최고의 작품은 단연 하근찬(河瑾燦, 1931-2007)의 단편소설 「수난이대(受難二代)」일 것입니다. 1957년 한국일보의 신춘문예당선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줄거리가 대략 이러합니다. 아버지는 일제 때 징용 가서 한 팔을 잃고, 아들은 6.25전쟁 때 참전해 한 다리를 잃습니다.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역으로 마중을 나가 한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 아들을 만납니다. 2대에 걸쳐 계속되는 수난을 그린 이 소설은 앞으로 어찌 살 거냐는 아들의 절망어린 물음에 “목숨이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거다”라고 답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소설의 압권은 한 팔을 잃은 아버지가 한 다리를 잃어 의족을 한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둘 다 성한 몸은 아니지만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건넌 아버지와 아들에게 전개될 앞날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일보다 훨씬 고된 수난의 2대,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이들 부자에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은 “목숨이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거다”라고 삶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노라면 남들이 못 느끼는 넉넉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은 이들은 누구보다 정(情)을 중요하게 생각해 서로 주고받아서입니다. 인정(人情)은 넉넉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수난의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보다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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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따라걷기’의 3구간을 동행할 두 친구를 수원역에서 만나 아침6시19분에 출발하는 여수행 무궁화호에 올랐습니다. 3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전주역에서 택시를 잡아타 인후동간이정류소로 가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시외버스를 타고 진안으로 향했습니다. 40분가량 달려 도착한 진안에서 하차해 점심을 사든 후 만팔천원을 들여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가막삼거리까지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11시27분 가막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지난 6월20일 두 번째 구간의 종주를 마친 가막교를 둘러본 후 삼거리를 출발해 금강 둑에 낸 차도를 따라 북진했습니다. 이내 서쪽으로 방향을 틀자 사진에서 봤던 대문바위가 그 위용을 드러내 반가웠습니다. 물길이 다시 북쪽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다가가자 강가에 천애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대문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 펼쳐 있어 과연 명불허전이다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안전한 징검다리로 금강을 건너 지질명소 천빈산이 자리한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동쪽의 대덕산 줄기와 서쪽의 천빈산을 가르면서 굽이져 흐르는 금강 물이 제법 세게 흐르는 것은 이틀 전에 내린 비로 불은 강물이 아직 다 빠지지 않아서입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금강을 따라 걷는 길은 죽도를 탐방할 목적으로 찾아온 몇 몇 사람들이 걸어 난 길로 차가 다닐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강변을 따라 돌밭이나 모래밭 또는 풀밭을 지나야 해 길을 이어가는데 신경이 쓰였습니다. 찻소리와 사람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오로지 바람소리와 물소리만이 들리는 청정하기 이를 데 없는 금강의 정적을 깬 것은 저희가 발한 ‘참 좋다’는 감탄사였습니다. 며칠 전 큰 비가 내린 후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직 없었다는 것은 새들이 다닌 발자국만 보여서입니다. 형제바위로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한 두 바위가 자리한 물가를 조금 앞둔 지점에서 두 번째로 강을 건널 때는 모두 등산화를 벗고 건넜는데 아직은 수온이 내려가지 않아 발등 위로 흐르는 물이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13시18분 금강과 구령천의 합수점에서 강물을 건너 죽도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합수점에서 세 번째로 강을 건너고자 바지와 등산화를 모두 벗어 배낭에 넣은 다음 홀가분하게 출발했는데 물이 점점 깊어져 팬티와 고추를 적셔야 했습니다. 하루 만 일찍 왔어도 불은 물이 빠지지 않아 강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살이 세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지만, 사백 몇 십 년 전 정여립이 반란을 꿈꾸었다는 여기 죽도의 지세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생각은 벌써부터 해왔기에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금강의 전 구간을 직접 답사하고 『금강길 이야기길』을 지어낸 환경운동가 최수경님이 이 책에다 죽도에 관한 역사와 문제점을 잘 요약해 놓아, 그 전문을 아래와 같이 옮겨 놓습니다.
“내륙에 웬 섬일까? 원래는 험준한 바위산악지형과 이어져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3면이 금강과 구량천에 맞닿아 있었다. 당연히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으므로 섬이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대나무가 많아 죽도라 했다는데, 오래전부터 사람이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아선지 대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죽도는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특별한 곳이다. 1589년 선조 때 개혁을 외치던 정여립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축옥사를 계기로 순절하게 된다. 당시 붕당정치가 드세던 때였으므로 정여립은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 대동계를 만들어 무술을 연마하였고 실제 왜구에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역모로 고하게 되자 정여립은 진안 죽도로 대피하게 되고 여기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를 계기로 천여 명이 피로 물들여지는 기축옥사가 시작되는데, 이후로 호남땅을 반역의 고향으로 전락시켜 중앙관직의 등용에 차등의 획을 긋게 된다. 실제 진안이 통계연보에도 죽도 근처에서 당시의 흔적인 화살촉과 지름6m의 거대 돌솥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의하다보니 정여립은 조선중기에 모반을 꾀한 자 정도로 기록되어, 올바른 역사적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개혁을 외치던 혁명가였던 정여립에 대한 조명이 전주의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강을 건너 금강을 따라 북서진하다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오른 쪽 언덕으로 조금 올라가자 잘 지은 양옥 한 채가 보였습니다. 주인분(?)을 만나 확인해본 즉 바로 아래가 죽도분교가 자리했던 교정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나 있는 찻길을 따라가면 49번도로에 합류해 이번 탐방의 끝점인 외송까지 길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합수점에서 강을 건너 죽도로 들어선 다음 내송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입니다. 첫 갈래 길은 강줄기를 따라 강변길을 계속 걸어 병풍바위 바로 밑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병풍바위에서 내송까지는 강변길이 잘 나있어 문제될 것이 없다는데, 여기에서 병풍바위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나봅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걸어야하고 수위가 올라가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선답자분의 답사기를 읽고 알았습니다. 또 하나의 갈래길은 저희가 걸은 길로 차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해발 4백미터 대의 산을 넘어 빙 돌아가는 길로 내송에 이르기까지 금강과는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죽도의 내지를 걸어보겠다면 두 번째 길이 좋을 것이고, 금강 따라 걷기를 고집한다면 첫 번째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보다 안전한 두 번째 길을 택했습니다.
죽도분교터에서 병풍바위까지는 이상훈교수가 카카오맵을 보고 길을 안내했습니다. 산길로 들어서 2백미터 가량 고도를 높이자 고갯마루에 자리한 “그리운 섬 죽도” 라는 제목의 비석이 보였습니다. 고개를 넘어 시멘트 길을 따라 걸어 평지로 내려선지 얼마 안 지나 발 벗고 물을 건너야 하는 구령천 앞에 이르렀습니다. 폭이 좁은 냇물을 건너고자 일행 셋이 모두 발을 벗을 것이 아니고 한 사람만 벗어 다른 둘을 업고 건너는 것이 좋겠다 싶어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제가 나섰습니다. 이 하천을 건너는 것으로 1시간 반가량 머문 죽도를 벗어났다 싶어지자 언제 다시 이 섬을 찾으랴 싶어 아쉽기도 했습니다.
15시19분 구령천을 건너 반시간 가량 더 걸어가 병풍바위 앞에 다다랐습니다. 죽도(竹島)가 인공 섬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가운데가 잘려나간 채 휑하니 남아 있는 병풍바위입니다. 원래 이 바위를 경계로 동쪽 위로는 구령천이 흐르고 바위 너머 서쪽 아래로 금강이 흘렀기에 두 물이 서로 만날 수 없었는데 이 바위의 일부분을 폭파, 금강과 구령천을 연결시켜 섬으로 만든 것입니다. 금강 쪽에서 올려다보고 찍은 다른 분들 사진에는 댐이 선명하게 나오는 데 저희가 있는 구령천 쪽에서는 댐의 전모를 볼 수 없었습니다. 댐을 설치해 구령천물이 바로 금강으로 흘러내려가는 것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병풍바위에서 죽도의 동쪽을 돌아 흐르는 구령천은 물이 흐르지 않아 건천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죽도를 섬으로 만들겠다는 애당초의 계획이 무산될 수밖에 없어 댐을 설치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폭파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병풍바위를 뒤로 하고 구령천을 따라 20분가량 동진해 보(湺) 아래 시멘트 길로 구령천을 다시 건넜습니다. 강 건너 휴업 중인 팬션을 지나 49번 도로상의 장전버스정류장에 다다랐습니다. 길 건너 돌탑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북서쪽 고갯마루로 향했습니다.
반시간 가까이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서 ‘진안 · 무주 지질공원안내도’라는 제목의 안내판을 보고 비경의 죽도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은 약9천만 년 전인 백악기 중기의 일입니다. 천빈산은 그때 떨어진 화산재, 암석파편, 광물 등이 떨어져 쌓여 형성된 유문암질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이 지역은 응회암 형성 이후 빠르게 융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때 하천측방보다는 하천바닥방향으로 수직침식이 주로 일어나 이 지역이 평탄하였을 때 발달하였던 곡류하천의 형태가 잘 유지되면서 하천주변에 만곡형 수직절벽과 하안단구가 발달된 감입곡류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좌우가 바뀐 역 한반도 지형 형태의 아름다운 비경을 볼 수 있는 것은 9천만 년 전에 일어난 지형변화 덕택입니다.
고갯마루에서 왼쪽 산길로 10여분 올라가 저 아래 병풍바위와 그 주변 풍광을 조망했습니다. 비경의 죽도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 모자라 몇 번이고 카메라에 옮겨 담곤 했습니다. 돌아간 고갯마루를 출발해 내려선 내송마을 입구의 정류장에서 진안 가는 버스시간을 확인했습니다. 다음 정류장까지 가도 시간이 될 것 같아 용담호 호반에 가까이 나 있는 49번 도로를 따라 20분을 더 걸어 외송버스정류장까지 진행했습니다. 이상훈 교수는 용담호를 덮고 있는 진초록의 녹조를 보고 댐을 막아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발생한 것이라며 걱정을 했는데, 금강으로 유입되는 지천의 물이 축산 폐수 등으로 인이 과다하게 함유되었는지도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17시30분 외송버스정류장에 도착해 3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진안으로 가는 농촌버스가 시간표에 나와 있는 대로 정확히 17시44분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도 이만하면 선진국이라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8시를 막넘겨 진안역에 도착해 30분 가까이 기다렸다가 18시30분발 전주행 버스에 올라 19시57분에 전주역을 출발하는 용산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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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탐방이 오래 기억될 만한 것은 좀처럼 접근이 쉽지 않은 죽도(竹島)를 찾아가 걸은 것입니다. 몇 번이고 발을 벗고 금강을 건너서라도 죽도를 꼭 들르고자 마음먹은 것은 죽도가 금강이 굽이져 흐르는 비경이어서 만은 아닙니다. 경승지가 명승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사와 문학의 옷을 입히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죽도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이곳은 정여립 역모(?) 사건의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 과연 역모를 꾀했는가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도의 스토리텔링이 다채로울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은 것은 죽도에 기반을 두고 꾀했다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여러 모로 해석될 수 있어서입니다. 반만년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국 수립을 시도한 근대적 인물로 평가받는 것에서 기축사옥을 불러일으킬 만큼 역모사건이 틀림없다는 해석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이 갖는 스펙트럼이 넓으면 넓을수록 이야기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설악산을 천혜의 승경으로 만든 것은 하느님이지만, 사람들에 널리 알려 우리나라 최고의 명승지로 만든 것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노력 덕분입니다. 조선 후기의 빼어난 문인인 김창흡이 남긴 설악산의 산수유기만도 「설악일기」 등 5편으로 가장 많습니다. 죽도(竹島)도 설악산의 김창흡처럼 누군가는 다녀온 여행기를 남겨야 죽도가 명승지로 자리 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싶어 못 쓰는 글이나마 이렇게 올립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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