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금강 따라걷기

금강 따라걷기 8(외요대정류장-앞섬-뒷섬마을)

시인마뇽 2021. 12. 12. 03:37

*탐방구간: 외요대정류장-앞섬-뒷섬마을

*탐방일자: 2021. 11. 14()

*탐방코스: 외요대정류장-용포교-세월교-말골여울-세월교-임도정자-앞섬-뒷섬마을

*탐방시간: 1117-1632(5시간15)

*동행 : 나 홀로

 

 

  금강을 따라 걷는 일이 섬진강이나 영산강보다 훨씬 힘든 것은 단순히 강 길이가 길어서만은 아닙니다. 금강이 섬진강보다는 약180Km, 영산강보다는 약 250Km 가량 강 길이가 더 긴데다, 천애의 절벽 아래로 흐르는 곳이 여럿 있어 강줄기를 온전히 이어 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번에 강줄기를 이어가지 못한 곳은 금산군부리면방우리의 말골여울에서 큰방우리마을까지 입니다. 서면 합류점에서 남대천의 물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금강이 세월교를 지나 북서진하다가 천애절벽 아래 굽이진 방우리320번지 옛 나루터(?)인 말골여울에서 동쪽으로 확 꺾여 흐르는데, 강을 건너지 못해  더 이상 강을 따라 걷지 못했습니다.  지난 9월 지형이 비슷한 진안의 죽도구간은 물이 얕아 발 벗고 강을 건너 물줄기를 따라 걸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물이 깊어 별 수 없이 오던 길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세월교로 되돌아가 강을 건넌 후, 임도를 따라 산을 넘어 앞섬에 이르러서야 다시 금강을 따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지형도를 보니 앞으로도 금강을 온전하게 따라 걷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곳은 무주읍의 뒷섬마을에서 부리면 방우리의 청풍에너지까지의 구간과 방우리농원마을나루터에서 적벽강까지 구간으로 모두 다음번에 지나야 할 구간들입니다. 금산군부리면의 어재에서 제원면의 용화리에 이르는 구간도 지형이 유사해, 강줄기를 따라 걸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곳은 달리 방도가 없어 에돌아가기는 합니다만, 시험 볼 때 ( )안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답안지를 내는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이 쉽게 떨쳐지지 않습니다. 금강 따라 걷기의 품질을 올리는 요체는 이렇게 건너뛰는 구간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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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7분 외요대를 출발했습니다. 11시에 무주버스터미널을 출발하는 부남면사무소행 농촌버스를 타고 10분 남짓 달려 외요대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길 건너 금강 변으로 내려가자 누군가가 몰래 버렸을 기름이 물가에 떠있는 것이 보여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금강 물에 손을 담가보는 것으로써 8구간 탐방을 시작해, 강물을 따라 동진했습니다. 출발 25분이 지나 도착한 용포교는 다리 폭이 좁고 낡아 이 다리를 건너다니는 차들이 몇 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다리 아래 배드는 자리가 바로 소이진나루터, 용포교를 놓기 전에는 나무배를 운행해 금산과 무주를 이어주는 길목 역할을 단단히 했다고 합니다. 용포교를 막 지나 들어선 길은 금강 서쪽 산자락에 낸 예향천리금강변마실길로 이 길의 끝점인 서면까지 거리는 3.8Km로 표지목에 적혀 있었습니다. 12시쯤 낙엽이 살짝 길을 덮은 벤치에 앉아 햄버그로 요기를 한 후 마실길을 이어가면서 남대천의 물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금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사진 찍었습니다.

 

  1310분 무주군무주읍의 대차리 건너 편의  금산군부리면의 방우리320번지 옛 나루터(?)인 말골여울에서 더 이상 금강을 따라 걷지 못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남대천과의 합류점을 지나 북진하다 만난 다리는 세월교로, 여기서부터는 금산군 부리면의 방우리에 속합니다. 예향천리금강변마실길은 다리 건너로 이어졌고, 저는 세월교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북진했습니다. 10여분을 걸어  닿은 곳이 물길이 동쪽으로 확 휘는 절벽 아래 말골여울로, 강 건너 대차리쪽으로 길 같은 것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강가에 소형선이 정박해 있는 것으로보아 여기 말골여울 주변이 나루터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강을 건너 대차리 쪽 강변을 따라  걸어가다 쇠골 여울(?)에서  다시 건너가면 큰방우리에 이르게 되는데,  강물이 깊어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하는 수 없어 오던 길로 되돌아가 세월교를 건넌 후 남쪽 서면으로 이어지는 마실길을 버리고, 저는 북쪽 대차리 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내 '금강하구309Km' 지점을 지나 한창 진행 중인 잔도 공사장 입구에서 오른 쪽 산에 낸 임도를 따라  진성골로 들어섰습니다. 산마루에 가까이 오르면 이번에 못 걸은 구간의 금강을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올랐는데 금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금강을 조망할 욕심에서 산을 넘어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염려한 것은 이 임도가 어디서 끝나는지 몰라서였습니다. 길가에 세워진 산악기상관측장비와 정자를 보자 저 아래 마을로 길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이 바로 들어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1519분 내도교를 건넜습니다. 임도 가의 정자를 지나자 사진으로 보아온 그림 같은 앞섬이 반쯤 보여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 내도교 앞에 세워진 추모비의 비문을 읽고서야 이 다리가 놓이게 된 슬픈 사연을 알았습니다.

 

  197668일 갑자기 내린 소낙비로 강물이 불 것을 걱정하여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룻배가 뒤집혀 18명의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고소식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지원을 지시해 지금의 내도교를 건설토록 했습니다. 현지주민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준 박대통령께 감사하고, 전복사고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당시 전북지시였던 황인성지사는 추모비(?)를 세웠고 위 내용의 비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이 비문 맨 아래에 19766월로 적어 넣은 것은 전복사고가 난 연월을 적은 것으로, 이는 내도교가 완공되고 추모비가 세워진 연월로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도교를 건너 왼쪽 제방 길로 내려가 건너 뛴 큰방우리마을에서 내도교까지를 걸을 까 하다가, 다음 번에 농원마을 구간을 걸을 때 같이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내도교에서 뒷섬마을까지 진행할 생각으로 오른 쪽 제방 길로 들어섰습니다.

 

  1632분 뒷섬마을에서 8구간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내도교를 건너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제방 길은 시계반대방향으로 반원을 그려 후도교 앞에 이르렀습니다. 강 건너 산 밑의 강변길은 앞섬의 학생들이 걷던 길로, 그 길을 걷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길 상태가 좋지 않아 해 떨어지기 전에 뒷섬마을까지 진행하지 못할 수도 있을지 몰라 그만두었습니다.  편안한 둑길을 따라 걸어 다다른 후도교를 건너 왼쪽 제방 길로 들어섰습니다. 내도교에서 후도교까지는 시계반대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진행했는데, 후도교를 건너서부터는 뒷섬마을 끝지점까지 시계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둑길을 걸었습니다. 저만치로 청풍에너지의 파란 지붕이 보이는 제방 길 끝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 8구간 탐방을 마쳤습니다. 뒷섬마을에서 무주터미널까지는 택시를 불러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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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걸어 지난 앞섬과 뒷섬은 실제로는 섬이 아닙니다. 섬이라면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야 하는데, 앞섬과 뒷섬은 뒤쪽으로 산이 가로막고 있어 섬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다리를 놓기 전에는 큰비가 내리면 강을 건널 수 없어 이 두 마을에서 외지로 나가는 길이 막혀, 마치 섬처럼 고립된다고 해 섬마을로 불렀던 것입니다. 다리가 놓인 후에는 더 이상 고립되는 일이 없어 계속해 섬마을로 부르는 것은 좀 뭣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널리 섬마을로 알려진 마을 이름을 바꾸는 것은 더욱 뭣해 앞섬과 뒷섬 그대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파주의 고향 마을도 그 지형이 앞섬이나 뒷섬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른 점은 하나의 강이 고향마을을 빙 돌아 흐르는 감입곡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임진강의 제1지류인 문산천과 제2지류인 비암천이 고향 마을 가까이에서 합류해 고향마을 둘러싸고 있고, 뒷쪽으로는 산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큰 비가 내리면 물에 갇혀 고립되기는 마찬가지여서 수업을 중단하고 일찍 귀가를 시킨 것은 앞섬 마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배가 뒤집혀 어린 학생들이 18명이나 목숨을 잃은 것은 갑자기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서가 아닙니다. 사고의 참 원인은 다름 아닌 가난이었습니다. 나라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벌써 다리를 놓았을 테고, 그리 했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널 필요가 없어 전복사고가 날 까닭이 없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 가난을 물리친 진정한 대통령은 누가 뭐라 해도 박정희대통령입니다. 제가 금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것도 이 나라가 부강해 곳곳에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아 가능한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새삼 박정희대통령께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