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소정휴게소-청풍정-교동정류장
탐방일자: 2022. 4. 18일(월요일)
탐방코스 : 소정휴게소-국원리정류장-진걸/석결삼거리-청풍정-문화유씨묘지-백호산-진걸/석결삼거리
-석호리마을회관-석호리482번지지점-석호리마을회관-이평리-교동정류장
탐방시간: 9시21분-16시19분(6시간58분)
동행 : 나홀로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역사적 인물을 현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옥천 땅을 흐르는 금강을 따라 걸으며 만난 인물은 구한말의 풍운아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입니다.
김옥균은 개항기에 이조참의, 호조참의, 외아문협판 등을 역임한 정치인으로, 1884년 조선을 개혁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이기도 합니다. 김옥균이 개화사상을 갖게 된 것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스승 박규수는 북학파를 이끈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오경석(吳慶錫) · 유홍기(劉鴻基) 등과 더불어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선각자였습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해 실행을 서둘렀습니다. 청군을 등에 업은 민씨 수구파에 밀려 끝내는 혁명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1894년 3월 민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으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은 적고 있습니다.
군북면 석호리의 대청호 호반에 자리한 ‘청풍정(淸風亭)’은 조선 말엽 김옥균이 낙향하여 기생 명월과 함께 소일하며 지낸 곳으로 안내문에 적혀 있습니다. “기생 명월이 국가를 개혁할 인물인 김옥균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부의 큰 뜻을 펴길 바라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마치 참이라는 듯이 청풍정 뒤편에 ‘明月岩’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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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21분 소정휴게소를 출발했습니다. 옥천에서 탄 가덕리행버스가 어느 정류장을 지나는지 알려주지 않아 카카오맵을 켜놓지 않았다면 하차할 정류장을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지난번에 걷기를 마친 소정휴게소 정류장에서 내려 금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국원리를 향해 37번 구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길가에 피어 있는 민들레, 아기똥풀, 금낭화, 현호색 등 봄의 전령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가로수들 또한 연초록의 잎들로 뒤덮여 한껏 싱그러워 보였습니다. 막지리와 소정리를 차례로 지나 국원정류장에 이르기까지는 왕복2차선의 좁은 찻길을 따라 걸으면서 차들을 걱정했는데 거의 다니지 않아 기우였다 했습니다. 장계관광지를 굽이돌아 남서쪽으로 흐르는 금강의 강물이 산골짜기들을 가득 채워 생긴 건너편 강안선(江岸線)이 들쭉날쭉 이어져 마치 리아스식 해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강가에 자리한 그림 같은 카페들과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닿을 수 있는 선착장은 시간이 넉넉지 못해 들르지 못하고 사진만 찍어 왔습니다.
10시15분 국원리 정류장에서 청풍정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소정휴게소를 출발한지 채 1시간이 채 못 되어 도착한 국원리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37번 구도로를 버리고 오른 쪽 길로 들어섰습니다. 국원보건소를 지나 농부 한 분이 100평도 안 되는 작은 밭떼기를 트랙터로 갈고 있는 것을 잠시 지켜보면서 살아생전 내내 소를 앞세워 쟁기로 논밭을 가셨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손에서 쟁기를 놓지 못하셨지만, 고향의 형님은 20여 년 전부터 쟁기 대신 트랙터로 터로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석결/진걸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을 따라 걸어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커브 길 가에 세워진 정자 석호정에서 햄버그를 꺼내 들며 10여분 쉬었습니다.
심하게 휘어진 꼬부랑길을 따라 내려가 강가에 자리한 대청호의 명소인 청풍정(淸風亭)을 들렀습니다. 조선말기 개화파를 이끈 김옥균이 명기 명월과 사랑을 나눈 곳으로 알려진 청풍정에 올라 대청호의 빼어난 경관을 탄상(歎賞)했습니다. 들쭉날쭉한 대청호의 강안선(江岸)線)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비상을 앞둔 거대한 용이 꿈틀대는 것 같았습니다. 김옥균이 명월과 은근하게 사랑을 나누던 구한말에는 청풍정 아래로 흐르는 금강이 산골짜기를 따라 굽이져 흐르는 큰 내와 같아서, 앞이 탁 트여 시원스레 조망되는 오늘의 대청호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11시51분 문화유씨 가족묘지에 이르렀습니다. 청풍정을 출발해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평탄한 길이 이어져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청풍정 출발 30분이 지나 진걸마을의 선착장에 도착하자 강 건너 강안선이 선명하게 눈에 잡혔습니다. 대략 1m 높이로 수면 위로 드러난 산 기슭의 암반들이 강변을 따라 반원을 그리며 산자락을 받쳐주고 있어 참으로 이채로웠습니다. 원래는 산골짜기였던 곳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표토가 물에 씻겨 떨어져나가고 바위만 남아 병풍을 둘러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그러한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진걸마을회관에서 4-5분을 더 걸어가 문화유씨 가족묘지에 이르자,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강가로 내려가 두 손으로 강물을 떠 담는 것으로써 금강과 인사를 나눈 후 발길을 돌려 진걸/석결삼거리로 향했습니다. 석호정을 조금 지나자 길 오른 쪽으로 해발171m의 백호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보였습니다. 오름길은 짧았지만 비탈진 길이어서 산 오름이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시멘트 길과 계단 길을 차례로 올라가 다다른 SK장계기지국 건물을 오른 쪽으로 돌아 정상에 올랐는데, 나뭇잎들로 시야가 막혀 기대했던 대청호의 경개(景槪)를 조망하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망루(望樓)가 자리했을 정상에서 잠시 머물러 숨을 고른 후 곧바로 올라온 길로 하산했습니다.
13시34분 진걸/석결삼거리로 되돌아갔습니다. 백호산에서 하산해 진걸/석결 삼거리로 되돌아가는 데 20분이 채 안 걸렸습니다.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자 강안에 시멘트로 포장된 네모반듯한 공터가 보였습니다. 이 공터로 내려가는 길목에 세워진 ‘외부차량금지 및 수상레저금지’ 경고판을 보고 저 아래 구축물이 석결선착장으로 대청호 부유물 수거 및 처리를 위한 설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 더 걸어 ‘금강인 어절씨구’와 ‘대청호 보전하세’ 등 두 개의 장승들이 서 있는 강가의 작은 정자에 걸터앉아 잠시 쉬어갔습니다. 석호리마을회관을 지나 나지막한 고갯마루에 이르자 수질보존을 위해 차량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과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았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옆으로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찻길은 끊겼고 샛길이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7-8분가량 걸어가 군북면석호리산46-2지점의 시멘트구축물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 구축물을 돌아서자 잔잔하게 물결이 이는 대청호가 펼쳐져, 그 승경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되돌아간 석호리마을회관 옆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며 스틱을 꺼내 든 것은 고개 아래 외딴 집의 견공 세 마리가 죽어라고 짖어대서였습니다. 개들이 저토록 목청 높여 짖어대는 것은 모처럼 사람을 만나 반가워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온종일 목줄을 매고 사는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자 저를 보고 위협적으로 짖어댄 견공이 밉지 않았습니다.
15시6분 이평리마을경로당 옆 정자에서 잠시 쉬어갔습니다. 외딴 집 위 고개를 넘어 내려간 곳은 옥천군군북면의 이평리로, 집들은 몇 채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강변하얀집을 지나 다다른 구릉에서 내려다본 대청호의 강 건너 지점은 옥천의 명소인 부소담악이 시작되는 추소정 쯤 될 것 같은데 다음번에 들러보고자 합니다. 잘 포장된 왕복2차선의 차도가 꽤 넓어 보이는 것은 차량과 집들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이평리 마을을 막 지나 다다른 경로당 옆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청정한 시골바람을 마음껏 들이 마시고나자 혼탁한 도시 공기로 찌들었을 폐부가 깨끗해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산줄기를 종주하고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두 다리를 엄청 혹사를 시켰지만 폐부만은 더할 수 없이 맑은 자연의 공기로 호사를 시켰다고 장담합니다.
16시19분 교동정류장에 도착해 18번째 금강탐방을 마쳤습니다. 경로당에서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차도는 ‘대청호오백리길’의 8구간을 지난다는 것은 표지목을 보고 알았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차도를 따라 반시간 가까이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서 문바우재 인근의 교동육교에 이르기까지는 고도차가 별로 없는 평탄한 길이 이어져 걷기에 좋았습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오른 쪽 아래 자리한 옥천군자원순환센터(옥천군폐기물종합처리장)을 보았습니다. 대청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종합처리장이 들어선 것은 대청호의 수질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폐기물 처리기술이 충분히 고도화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37번 도로 위의 교동육교를 건너 37번 구도로가 지나는 교동정류장에 도착해, 옥천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18번째 금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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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엽 김옥균이 여기 옥천에 내려와 청풍정에서 기생 명월과 사랑을 나눈 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명기들의 작품이나 행적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능화((李能和, 1869-1943) 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김옥균이나 명월의 이야기가 전혀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명월은 명기가 아니거나 전설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혁의 주체세력인 김옥균이 옥천으로 내려와 여기 청풍정에서 연정을 나눈 기생 명월이 국가를 개혁할 인물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부의 큰 뜻을 펴길 바라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혁명가 김옥균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김옥균과 명월의 러브 스토리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김옥균이 아무리 강철 같은 사나이라도 냉혈한이 아니라면 애증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되어서입니다. 실제로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가서 일본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19세기의 풍운아 김옥균이 설사 갑신정변을 일으켜 국왕 앞에서 정적의 목을 치는 과단성을 지닌 사나이라 해도 때때로 여인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은 평범한 졸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청풍정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진위와 관계없이 강인한 인물로 알려진 김옥균도 여인네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나이였음을 보여주는 훈훈한 스토리이다 싶어 사족을 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20세기의 풍운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랑을 나눈 육영수여사도 옥천분입니다. 김옥균과 박정희 두 사나이는 총탄에 맞아 암살되었습니다. 이분들과 사랑을 나눈 기생 명월은 강으로 몸을 날려 자살했다고 하고, 육영수여사는 괴한의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두 사나이와 두 여인 모두 제 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공통점일진데,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가 싶어 씁쓰레하기도 합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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