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금강 따라걷기

금강 따라 걷기16(피실나루터-옥천선사공원-황새터)

시인마뇽 2022. 3. 16. 06:55

탐방구간: 피실나루터-옥천선사공원-황새터

탐방일자: 2022. 3. 6()

탐방코스: 피실나루터(옥천팜랜드)-한반도전망대-안터교-옥천선사공원

             -물비늘전망대-황새터-오대리정류장

탐방시간: 930-1456(5시간26)

동행      : 나 홀로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라 합니다. 먹을 것을 찾아 산과 들로 떠돌아다니던 이들은 짐승과 추위를 피해 강변의 동굴 속에서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금강변 공주의 석장리유적, 한탄강변 연천의 전곡리유적과 한강변 단양의 금굴동굴유적 등은 우리 조상들이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이곳에서 막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가 처음 물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정착생활을 시작한 신석기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면서 살아가던 유목생활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생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정착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은 맑은 물의 생활용수와 대량의 농업용수였습니다. 필요한 물의 확보를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하수도를 건설하고 수로를 내고 우물을 파고 숯으로 정수도 하는 등 물 관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7천 년 전에 하수도를, 5천 년 전에 상수도를, 그리고 2천 년 전에 수로를 만들었고, 19세기 후반에야 오늘날과 같은 물 관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사시대의 유적이 강변에서 많이 발견된 것은 강변이 농사를 지으며 살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옥천군에서 안터교 다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 끝자리에 안터선사공원과 옥천선사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금강이 굽이져 흐르는 옥천일대에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어서였습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은 고인돌과 선돌 등 거석입니다. 거석을 강변으로 옮겨 묘를 만들고 바로 세워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취락을 만들어 한 곳에 모여 살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모여살 수 있는 곳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강변 일대이기에 금강이 흐르는 옥천일대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물 관리는 이때부터 시작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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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옥천팜랜드로 이동했습니다. 안터교 다리를 건너 팜랜드로 이어지는 길은 반 이상이 산길로 몇 곳에서는 비포장도로도 지나야했습니다. 이 길이 초행이라는 기사분이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차를 몰아 고마웠습니다. 팜랜드에서 하차하자 지난번에 들렀던 강 건너 피실나루터가 아주 가까이 보였습니다. 주말을 이용해 여기로 캠핑 온 젊은 부부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자, 젊었을 때 집사람과 산을 올라 텐트를 치고 밤을 새웠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습니다. 팜랜드 주인분이 타준 커피를 들면서 이곳에 팜랜드를 조성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의 말씀에 따르면 피실나루터는 지난번에 찾아간 강 건너가 아니고 여기 팜랜드가 자리한 곳이라며 개발 전에는 여덟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전 930분 피실나루터 자리의 옥천팜랜드를 출발했습니다. 팜랜드 주인 분께 커피를 잘 마셨다며 감사인사를 드린 후 곧바로 금강탐방에 나섰습니다. 안터교를 향해 남쪽으로 흘러내려가는 금강은 강물이 하도 파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냉기가 느껴졌습니다. 강 건너 금강에 수직으로 면해 있는 천애의 암벽은 어디서 본 것 같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금산의 적벽강과 많이 닮았습니다. 강변을 따라 낸 비포장도로가 왼쪽으로 휘어지면서 더 이상 강변을 따라 걷지 못하게 되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금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조망했습니다. 시야가 탁 트여 먼발치로 향수호수길의 물비늘전망대가 보이는 금강의 주변 풍경을 완상하면서 이만한 절경을 다시 보기 쉽지 않겠다 싶어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1027분 한반도전망대에 올랐습니다. 강변에서 산 쪽으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다 빨간 기와집의 자그마한 일자형의 빈 집 앞을 지났는데, 외관이 깔끔한 것으로 보아 비수기인 겨울철에 일시 비워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집에서 한반도전망대로 오르는 꼬부랑길은 시멘트길로 바뀌어 지그재그로 이어졌습니다. 15분가량 걸어 올라선 한반도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것은 팜랜드에서 걸어온 금강의 강줄기뿐으로, 정작 지난번 둔주봉을 오르며 조망했던 한반도지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넘어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가리내 농원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안터교다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 모양의 깔끔한 한옥이 벽이 헐린 채 서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아깝다 한 것은 잘 지은 집도 집이려니와 파릇파릇한 보리들이 땅을 덮은 꽤 넓은 텃밭이 바로 아래 붙어 있어서였습니다.

 

  1121분 안터선사공원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내버려진 한옥을 사진 찍고 나서 차도를 따라 내려가 안터의 석탄보건지소 앞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면 단위에는 보건소가 없어 군청소재지나 가야 보건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골 촌구석의 환자를 돌보는 일은 면허가 없는 이른바 돌팔이의사가 맡아 부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먹고살만해지자 괄목할 만하게 좋아진 것이 의료서비스가 아닌가 합니다. 그 덕분에 코로나 위기를 잘 극복했다 싶었는데 최근 들어 확진자가 수십만 명으로 급증해 걱정입니다. 길 건너 안터선사공원을 둘러본 후 공원벤치에 앉아 햄버그를 꺼내들었습니다.

 

  안터교를 건너 옥천선사공원도 들렀습니다. 안터선사공원보다 터도 넓었고 야외에 전시된 유물도 좀 더 많았습니다. 두 선사공원에서 제가 눈여겨본 것은 신석기시대의 거석문화를 상징하는 고인돌과 선돌로, 이 유적은 여기 안터마을과 대청호수몰지인 남곡리 등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126분 향수호수길로 들어섰습니다. 팜랜드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5Km 넘게 걸어 도착한 안터에서 다시 북쪽으로 휘어 장계 쪽으로 흐르는 금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것은 옥천군에서 강변에 향수길을 조성해놓은 덕분입니다. 굽이져 흐르는 금강을 일일이 따라 걷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대청댐의 강물이 골짜기 골짜기를 채워 들쭉날쭉한 강안선(江岸線)을 찾아가 걸어야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지자체에서 살펴 길을 만들어주니 고맙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옥천선사공원 길 건너에서 시작되는 향수호수길은 금강 좌안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나 있었습니다. 길이가 짧은 안터교 다리를 경계로 북쪽은 유람선을 띄울 만큼 강이 넓고 깊은 호수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남쪽은 물이 많지 않은 습지(?)로 변해 낚시꾼들로 붐볐습니다.

 

  1325분 황새터에 이르렀습니다. 옥천선사공원에서 1.1Km를 걸어 물비늘전망대에 다다랐습니다. 오전에 걸어온 강변길을 조망하면서 내 삶도 저 물과 같이 흘러간다 싶어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강 건너 오대리 앞에서 금강은 크게 휘어 북쪽으로 돌아 흘렀습니다. 대청댐이 생기기 전에는 며느리재를 넘어 황새터여울과 한밭여울로 강을 건너 다녔다는 오대리마을은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는 육지 속의 섬이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대청댐을 건설하기 전에 여기 금강은 샛강으로 물이 깊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람쥐쉼터, 솔향쉼터, 우듬지데크를 차례로 지나 왼쪽 며느리재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며느리재 안내판에 적힌 전설을 읽었습니다. 내용인즉, 비가 오던 어느 날 고개를 넘던 며느리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에서 수십길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는데, 며느리의 애틋한 넋이 새하얀 진달래꽃으로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안내판에는 드러내기가 부끄러워서인지 시아버지로부터 정절을 지키려했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습니다.  거북이 등 위에 앉아 비상을 준비하고 있는 황새를 형상화한 조각물을 사진 찍고, 조금 더 걸어가 황새터에 이르자 낙석의 위험이 있다면서 2.3Km 떨어진 주막마을로 가는 데크길을 폐쇄해 별 수 없이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1457분 오대리(선착장) 정류장에서 16번째 금강탐방을 마쳤습니다. 데크 길만 폐쇄되지 않았다면 주막마을 거쳐 장계관광지까지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하지 못해 많이 아쉬웠습니다. 덕분에 시간의 여유가 생겨 모처럼 느긋하게 걸으면서 앞서 그냥 지나쳤던 정지용님의 여러 시들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산 너머 저쪽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 우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치는 소리만

서로 맞아 쩌르릉!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장수도

이 봄 들며 아니 뵈네

 

  산 너머 저쪽에 누가 사는지는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을 종주했어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요즘은 산 너머 누가 사는지만 궁금한 것이 아니라 강 건너 누가 사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나라 5대강을 다 따라 걸어도 그 궁금증은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궁금해서 누가 사냐고 물어본 것이 아니고 그저 가보고 싶어 물어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궁금증을 먼 곳에의 동경이라 명명하고 그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옥천선사공원으로 돌아가 인근 오대리선착장버스정류장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 옥천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써 하루 탐방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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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이 관리의 대상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이제 자연의 강만으로는 다양한 물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상, 강은 문명의 강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문명의 강은 여러 가지 주요 기능을 갖고 있는 바, 치수(治水)기능, 이수(利水)기능, 배수(排水) 정화(淨化)기능, 생태(生態)기능, 주운(舟運)기능, 위락(慰樂)기능, 발전(發電)기능 등이 그것들입니다. 이러한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강은 자연 상태에 일부 변형이 가해지더라도 잘 관리되어야 합니다. 며느리재를 넘어 황새터여울과 한밭여울로 금강을 건너다닌 것은 떠올릴 만한 추억거리는 될 수 있지만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했다가는 강에 물이 많지 않아 위에서 열거한 문명의 강으로써 제 기능을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래톱이 드러나는 강으로는 더 이상 도시문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강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데 따른 부작용은 선진과학기술로 해결해야하고, 또 할 수 있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