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금강 따라걷기

금강 따라 걷기15(가덕교-독락정마을-피실나루터)

시인마뇽 2022. 3. 12. 12:29

*탐방구간: 가덕교-독락정마을-피실나루터

*탐방일자: 2022. 2. 24()

*탐방코스: 가덕교-청마대교-경율당-안남초교-독락정마을-안남초교-점촌고개-둔주봉-점촌고개

              -피실나루터-점촌고개-안남초교-연주리버스정류장

*탐방시간: 1037-1733(6시간56)

*동행     : 나 홀로

 

 

  대한민국의 영토는 헌법 제3조에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될 때는 한반도는 이미 미국과 소련의 지배아래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헌법이 한반도의 북쪽 반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정한 것은 그 땅은 우리가 하루 빨리 되찾아야 할 땅이고 그 주민은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할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토관이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잘못된 것이라면서 우리 영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남쪽 반으로 정하자고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200510월 당시 통일부 장관은 국회답변에서 평화체제를 넘어 남북연합을 내다본다면 영토조항은 손질해야 한다면서 북한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 헌법3조의 영토조항을 손질해 휴전선 이남만을 대한민국 영토로 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 주장을 대다수의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 2년 후 대선에 출마한 이 분이 5백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낙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수없이 불러 통일이 뇌리에 박힌 분들뿐만 아니라 국민의 대다수가 반()쪽짜리 반도영토론에 반대했기에, 그 후 이 문제는 다시금 선거의 쟁점이 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탈북민들이 이 땅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헌법이 북한 땅까지 우리 영토로 규정한 덕분임을 우리국민들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했었습니다.

 

  이번에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해발383m의 둔주봉을 올라 옥천이 제1경으로 자랑하는 '한반도지형'을 조망했습니다. 한반도의 동서를 바꿔놓은 것 같은 길쭉한 모양의 산줄기를 금강이 휘감아 돌면서 만든 지형이 한반도를 닮았다 하여 불리는 여기 옥천의 '한반도지형'을 조감하노라니, 초등학교 때부터 그려온 통일된 대한민국의 지형이 저런 모양이다 싶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벌써 다녀왔을 북쪽의 반도를 둘러볼 수 없는 답답함을 이렇게나마 풀 수 있는 것은 이 봉우리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한반도라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해준 옥천군 덕분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옥천군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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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1037분 가덕리마을회관을 출발했습니다. 10시 정각 옥천터미널 출발한 군내버스가 가덕리마을회관에 도착하자자 하차해 곧바로 금강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4-5분을 걸어 다다른 가덕교를 건너며 사진을 찍은 것은 이 다리에서 북쪽으로 1백여m 떨어져 있는 세월교(洗越橋)였습니다. 가덕교가 건설되기 전에 옥천군의 동이면과 청성면을 이어주었던 세월교는 열흘 전에는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간 물이 많이 빠져 세월교 다리가 거의 다 물 위로 드러난 것을 보자 겨울가뭄으로 봄 작물 재배가 힘들어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습니다. 가덕교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금강 우안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걷는 동안은 냉랭한 강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청마대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75번 도로를 따라 걷다가 지수교차로를 조금 지나 만난 삼거리에서 이 길을 버리고 왼쪽 강둑길로 들어섰습니다.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강둑길을 따라 걸으며 왼쪽 아래 강물에 자주 눈길을 준 것은 열흘 전에는 거의 다 녹았던 강물이 다시 얼어 얼음판이 갈라지는 소리가 쩡쩡 나서였습니다.

 

  1219분 경율당(景栗堂)을 들렀습니다. 강둑길을 막 벗어나 다다른 경율당은 영조11(1735) 전후증(全后曾)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 종미리마을에 세운 팔작지붕의 서당입니다. 선생은 율곡 이이선생의 학덕을 숭모하여 서당 이름은 물론 호도 경율당이라 지어 불렀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습니다. 축대를 쌓아 둔덕에 세운 경율당의 규모는 매우 작지만, 강 쪽으로 전개되는 논 뜰은 넓어 보였습니다. 경율당을 출발해 종배마을회관에 도착하기까지 시골길은 한가해, 좀처럼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흙벽에 슬레트 지붕을 한 폐가들이 자아내는 을씨년스러움은 그 옆의 황토를 구워 만든 흙벽돌 벽(?)에 새빨간 양철지붕이 얹혀 진 일자 모양의 창고(?)에서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보다 더해보였습니다. 지수교차로인근에서 헤어진 575번도로와는 종미리버스정류장 앞에서 다시 만나 이 도로를 따라 안남면사무소 소재지로 향했습니다.

 

  1333분 독락정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종미리버스정류장에서 575도로를 따라 북진하다가 왼쪽으로 꺾어 연주교를 건너자 정면으로 안남초교가 보였습니다. 안남초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안남천이 흐르는 방향과 나란히 남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안남초교를 출발한지 15분이 채 안 지나 독락정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안남천이 금강에 합쳐지는 합류점은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백 여m 떨어져 있는데, 오랜 겨울가뭄으로 물이 빠져 물에 잠겨 있던 모래톱이 상반신을 드러내보였습니다. 청마대교 쪽에서 한반도의 동해안을 그리며 흘러내려온 금강이 이 마을 저만치에서 남해안을 그리며 180도를 돌아 서해안을 그려가며 휘돌아 나가는 것을 보자 과연 승지(勝地)이다 싶었습니다. 도로 한 가운데 느티나무 고목이 뿌리내린 곳에 있음직한 독락정 정자는 보이지 않았고 오른 쪽 언덕에 영모사(永慕祀)가 터잡고 있어 사진 찍어 왔습니다. 초계 주씨의 집성촌인 여기 안남면연주리에 자리한 영모사는 초계주씨의 시조분인 휘 황의 사당이라고 하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옥천군이 자랑하는 독락정(獨樂亭)은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선조 40)에 세운 정자로, 1772년에 중수하고 1888,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보전해오다가 1965년 초계주씨독락옹파 문중에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정면 2,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 1칸과 마루가 있으며, 처음에는 정자로 지었지만 후에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전당으로 사용하여 서원 구실을 하였다는 독락정을 시간이 없어 찾아가보지 못하고 곧바로 둔주봉으로 향했습니다.

 

  153분 해발384m의 둔주봉에 올라섰습니다. 독락정에서 약2Km 가량 금강을 따라 강변길을 걸을 수 있었는데 이 길을 포기하고 둔주봉으로 향한 것은 '한반도지형'을 제대로 조망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마침 독락정 마을에서 만난  동네 분이 둔주봉으로 오르는 길을 안내해주었습니다. 독락정 마을에서 되돌아간 안남초교 앞에서 점촌고개로 이어지는 짧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인천에서 오래 전에 이사와 사신다는 71세의 동네 분이 앞장서서 점촌 고갯마루까지 동행해주어 고맙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점촌 고개에서 서쪽 위로 이어지는 둔주봉행 등산로는 고도차가 별로 없는데다 길이 잘 나있어 힘들지 않았습니다. 점촌고개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0.8Km를 걸어 전망대에 오르자 '한반도지형'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년7월에 조망한 영월군한반도면의 '한반도지형'보다 닮은 정도는 조금 덜해 보이지만, 얼음이 꽁꽁 언 금강에 휘감긴 여기 옥천의 '한반도지형'도 볼만 했습니다. 전망대에서 0.8Km를 더 걸어 다다른 둔주봉 정상은 잡목에 가려 전망이 좋지 않았지만, 퇴뫼식의 산성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돌들을 보고 이 일대가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1620분 피실나루터에 도착해 강 건너 옥천팜랜드를 사진 찍었습니다. 둔주봉에서 점촌고개로 하산하는 길에 다시 들른 전망대에서 다시 한 번 조망했는데 가히 '한반도지형'의 풍광은 일품이었습니다. 저녁 햇살에 등 떠밀려 부지런히 점촌고개로 내려가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피실나루터1.6Km/안남면사무소1Km’의 표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피실나루터로 내려가 독락정으로 가는 길만 있다면 그 길을 따라 독락정으로 돌아가서 면사무소까지 간다 해도 저녁 6시에 면사무소를 출발하는 옥천행버스를 오를 수 있겠다 싶었고, 피실나루터에서 독락정으로 가는 길이 없다면 다시 점촌고개로 올라와 안남면사무소로 내려가면 되겠다고 판단하여 왼쪽 피실나루터로 내려갔습니다. 점촌고개에서 피실나루터로 내려가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차도 다닐 만 했습니다.  왼쪽 계곡에는 오래 쓰지 않은 슬레이트 지붕의 폐건물이 보였습니다. 15분가량 내려가자 오른 쪽으로 임도가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길을 버리고 5분을 더 내려가 다다른 강가가 피실나루터인 것 같은데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강 건너로 옥천 팜랜드가 보이는 피실나루터에서 금강이 180도 회전하여 안천을 향하여 흘러서인지 꽁꽁 얼어붙은 강이 엄청 넓어보였습니다.

 

  1733분 안남면행정복지센터 앞에 도착하는 것으로 15번째 금강탐방을 마쳤습니다. 피실나루터에서 독락정마을로는 길이 이어지지 않아 별 수 없이 점촌고개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올라가서인지 오름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점촌고개에서 빙 돌아가는 먼 길을 택해 안남초교로 내려갔습니다. 안남초교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야외공원에 세워진 주황색의 커다란 조각물인 둥실둥실 배바우를 사진찍었습니다. 배바우(舟岩)란 도덕리의 덕실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 둔덕에 자리한 바위가 마치 배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대청댐이 건설되고 담수가 시작되면서 수몰선이 배바우 아래쪽까지 이르게 되어 배바우가 이름 그대로 물에 뜨는 형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옥천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15번째 금강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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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한반도지형'을 한 명소는 몇 곳 더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반도지형'의 명승지는 강원도영월군한반도면의 '한반도지형'으로, 영월군은 행정구역을 아예 서면에서 한반도면으로 바꾸고 홍보에 나섰습니다. 뗏목 배를 띄워 한반도를 일부 나마 주유할 수 있게 한 영월군의 노력으로 여기 옥천군의 '한반도지형'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지형이 한반도를 빼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한반도지형은 이 지형을 감싸고 흐르는 감입곡류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여기 옥천의 '한반도지형'도 다르지 않습니다. 감입곡류하천(嵌入曲流河川, incised meander)은 지반의 융기 또는 침식기준면의 하강으로 인하여 자유곡류하천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하도가 깊게 파여 형성됩니다. 우리나라의 한강 · 금강 · 낙동강의 중상류에 심하게 구불구불한 감입곡류하도가 널리 나타나는데, 이러한 하도는 흔히 고위평탄면과 더불어 요곡융기 이전에 한반도가 전체적으로 침식을 받아 낮아졌다는데 대한 증거로 제시된다고 권혁재교수의 저서 지형학은 적고 있습니다.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흐르는 감입곡류가 발달한 우리나라 하천에서 한반도의 지형을 닮은 한반도지형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곳이 관광명소가 되려면 교통이 편리해야 하고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적지에 설치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지형을 보고 통일이 바로 연상될 만큼 온 국민의 통일에의 염원이 절실한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교통의 불편을 무릅쓰고 '한반도지형'을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 세대에는 남북통일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젊은 세대들도 그러한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이 추구하는 가치가 너무 다른데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억압당하는 일이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는 북한과 무조건적으로  통일하자는 주장을 오늘의 우리 젊은이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북한도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는 나라로 변화되어 온 국민의 통일 염원이 더욱 절실해지기를 바라면서, 이만 탐방기를 맺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