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문래초교-돈들약수-암내교
*탐방일자: 2022. 4. 26일(화)
*탐방코스: 문래분교-용꿈마을-돈들약수-용산1리-월탄교-헐천교-암내교
*탐방시간: 12시40분-17시25분(4시간25분)
*동행 : 서울대 원영환, 이규성, 이상훈 동문
이번 한강탐방 길에 강원도정선군의 임계장터를 들렀습니다. 한때 인구가 2만 명을 육박했던 임계는 동쪽으로 강릉, 서쪽으로 태백, 남쪽으로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정선읍으로 이어져 영서지방 교통의 중심지라 할 만합니다. 여기 임계장터가 ‘사통팔달' 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러한 지리적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닷새마다 장이 서는 전통시장인 ‘사통팔달 임계시장’ 여기 저기에 드문드문 벽화가 그려져 있어 보물찾기를 하듯 찾아다녔습니다. 하루 전인 4월25일날 장이 선 임계의 ‘사통팔달’시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은 이 시장이 전형적인 닷새장터로 상설시장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 장터에 상설시장이 들어서 순수한 형태의 5일장이 많이 사라진 요즘에 곳곳에 벽화를 그려놓아 잠시나마 옛 장터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 임계주민들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합니다.
수년 전 논문작성에 참고하고자 여러 문헌을 찾아 읽다가 이영훈 교수의 저서 『한국경제사』에서 닷새만에 장이서는 정기장시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1914년 ‘시장규칙’이라는 명령을 발했습니다. 이 시장규칙은 시장을 제1호시장, 제2호시장, 제3호시장의 세 형태로 구분하였는데, 1호시장은 닷새마다 열려온 전통장시를, 제2호시장은 20개 이상의 점포가 들어선 상설시장을, 3호시장은 화물을 대량 거래하는 도매시장을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고 놀란 것은 우리 고유의 전통장시가 일제강점기 중에도 계속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1911년 전국적으로 전통장시는 1,084기를 헤아렸는데, 1940년까지 1,520기로 40%가 증가했습니다. 거래액도 명목가격 기준으로 약7배, 실질가치 기준으로 2배 정도 늘었습니다. 1938년 2호시장인 상설시장은 29기, 3호시장인 도매시장은 36기에 불과해 유통비중도 각각 4%와 5%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중에도 우리 고유의 정기장시(定期場市)인 5일장이 증가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영훈교수는 전통장시의 증가를 소농경제의 상품생산이 기본적으로 비자급 생활자료를 구입하기 위한 단순상품 생산의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풀이했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그런 경제적 이유에 더하여 전통장시가 외부를 바라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으로 이 장시에서 상품만 교환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저런 정보도 소통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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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50분 문래분교를 출발했습니다. 이상훈 동문차로 이번 목적지인 암내교까지 가서 농협마당에 차를 두었습니다. 34-3번 버스를 타고 35번 도로를 따라가다 지난번에 걷기를 마친 문래분교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폐교된 문래분교의 텅 빈 운동장은 그 반가량이 밭으로 일궈졌고, 운동장 한쪽으로 텅 비었었을 2층 건물의 교사(校舍)가 덩그러니 서 있어 휑해 보였습니다. 문래분교를 출발해 바로 왼쪽 뚝 길로 접근, 골지천 우안(右岸)길로 들어섰습니다. 개천 건너 산록을 반쯤 드리운 먹구름이 빠르게 움직여, 장마철에 산길을 걷고 있는 듯했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진행하면서 노란 꽃의 괴불주머니, 하얀 색의 사과 꽃 등과 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진초록의 침엽수와 연초록의 활엽수들이 빚어내는 뚜렷한 색상 차이가 5월의 자연을 한껏 싱그럽게 했습니다. 제방 길에서 35번 도로로 복귀해 왼쪽 아래 골지천의 물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용꿈마을 정류장에 도착한 시각은 13시33분이었습니다. 이 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용산2교를 건넌 다음 골지천 좌안길을 따라 북진하는 중 살짝 비가 내려 우산을 받쳐 드느라 사진을 찍기가 불편했는데, 이내 비가 그쳐 더 이상 수고롭지 않았습니다.
14시14분 돈들약수터를 들렀습니다. 용산2교에서 돈들교에 이르는 골지천 좌안의 제방은 제법 길었습니다. 제방 안쪽에 밭이 넓게 자리한 것은 감입곡류가 발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유속이 빠른 하천 바깥쪽은 침식되어 절벽이 생기고, 유속이 느린 안쪽은 흘러내려온 토사(土砂)가 쌓여 들판이 형성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침 차를 끌고 밭일(?)을 하러 나온 한 남자 분을 만나 임계댐을 건설하려던 곳은 임계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합류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은 그 지점을 가랑이천이라 부르면서, 사람이나 하천이나 가랑이를 조심해야한다고 말씀해 다 같이 웃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진짜 이유는 석회암층이 발달한 여기 정선 땅에다 댐을 만들면 석회암층의 지반이 이산화탄소가 용해된 지하수에 녹아 댐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김대중대통령 집권 시에 동강댐 건설이 취소된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돈들약수교에서 조금 떨어진 제방 끝자리의 정자를 지나 암반길로 조금 더 걸어가자 왼쪽 가까이로 돈들약수터가 보였습니다. 이 약수터가 여느 약수터와 다른 것은 약수가 지하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수질이 기준미달이어서 약수로 음용할 수 없는 것은 이 약수터의 물이 지하수가 아니고 지표수여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15시58분 월탄교에 이르러 35번 도로로 올라섰습니다. 돈들 약수터에서 정자로 돌아가 굽이져 흐르는 골지천의 승경을 완상(玩賞)하며 십분 남짓 쉬었습니다. 돈들약수교를 건너 돈들농원의 사과밭을 지나면서 사과 꽃도 배꽃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밭을 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꽤 넓은 밭떼기를 사진 찍은 것은 밭고랑이 하도 정연해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아서였습니다. 35번 도로로 복귀해 북진하는 중 눈길을 모은 것은 길가의 소나무였습니다. 산 속의 소나무는 잎들이 짙푸르러 막 돋아난 활엽수의 연초록 넓은 잎들에 비해 색상이 우중충해 보였는데, 길가의 소나무 몇 그루는 단아해 보였습니다. 소나무가든 정류장을 지나 용산1리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달여울교 앞에 다다른 시각은 15시34분이었습니다. 달여울교에 다가가자 하천 폭이 넓어지고 수량이 늘어난 것은 사행천 안쪽에 형성된 좁지 않은 충적평야(沖積平野)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바로 아래에 보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달여울교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골지천 우안길은 월탄교를 조금 지나 끊어지는 것으로 카카오맵에 나와 있어 이 길을 따라 월탄교 앞까지 걸었습니다. 이 구간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골지천 좌안에 자리한 20-30m높이의 나지막한 천애절벽입니다. 이 암벽이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은 작은 굴 여러 개가 눈에 띄어서였습니다. 작년 여름 한반도지형에서 보았던 곧추선 암벽과 작은 굴을 여기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강원도 일대가 석회암으로 되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골지천이 깊지 않아 이곳의 풍광은 평창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빚어낸 영월의 한반도지형에는 조금 못 미쳐보였습니다. 월탄교 앞에서 위로 올라가 35번 도로로 다시 복귀해 월탄교를 거넌 다음 오른 쪽 천변으로 내려가 골지천 좌안 길로 들어섰습니다.
17시26분 암내교에 이르러 네 번째 구간의 한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월탄교를 건너 다시 천변으로 내려가 골지천 좌안의 제방 길을 따라 걸은 것은 공기가 좋지 않은 차도를 피해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가능한 한 최대로 둑길을 따라 걷자고 마음먹은 것은 감입곡류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굽이져 흐르는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형성된 하천 바깥쪽의 암벽과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하천 안쪽의 넓은 농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감입곡류에 대한 이해도를 확실히 높일 수 있었습니다. 앞서 지나온 밭은 막 갈아 놓은 것으로 아직 작물을 심지 않아 밭고랑과 이랑이 그대로 살아 있었는데 이곳의 밭은 이미 씨를 뿌린 뒤라서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고자 까만 비닐을 깔아 놓아 온 밭이 새까맸습니다. 골지천 좌안의 제방 길을 걸으며 엄나무의 갓 돋아난 새 순을를 따고 있는 젊은 여성분을 만나 잠시멈춰 서서 농사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진행해 혈천교를 건너자 길 왼편에 대영산업의 아스콘생산설비들이 보였습니다. 5분가량 더 걸어가 암내교에 도착해 문래분교-월탄교- 암내교 구간의 한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이상훈 동문 차로 이동한 귀로는 암내교를 출발해 임계면사무소-여량의 아우라지 -북평의 오대천 합류점-작은 느릿재-큰 느릿재-백석폭포-진부갈림길-모랫재를 넘어 평창의 장계로 이어졌습니다. 추어탕으로 저녁을 든 후 19시45분 군포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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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파주의 고향마을에서 닷새장시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분은 단연 제 어머니였습니다. 17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장터는 닷새 만에 한 번 서는 광탄 장터로, 집에서 3Km 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광탄 장에 자주 가신 것은 딱지본소설을 빌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학교라고는 문지방도 밟아보지 못한 어머니가 동네아낙네 중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이야기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익혔기 때문입니다. 장터에서 빌려온 얘기책은 닷새 만에 다 읽으시고 그 다음 장날에 가셔서 반납하고 다른 책을 빌려오시곤 했습니다. 농한기인 칠월 백중 즈음이나 정월 대보름 전후해서는 어머니는 동리아낙네들을 집으로 불러 얘기 책을 읽어주시곤 했습니다. 읽다가 힘드시면 초등학생인 저 보러 읽으라고 하시어 저도 그때 고전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숙영낭자전』 , 『숙향전』 , 『춘향전』, 『심청전』, 『유충렬전』 등 꽤 많은 고전소설을 읽은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번 이사를 다니느라 그 책들을 남겨두지 않고 내버리는 불효를 저질러 후회막급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도 이야기책을 어머니가 읽으신 대로 운율을 넣어 읽으면서 옛날 강독사를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다행인 것은 어머니를 닮아 독서를 즐기는 문화적(?) 유전인자가 저는 물론 두 아들과 손자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닷새장시가 시장에서는 거의 다 사라졌어도 제 가슴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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