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암내교-구미정-발면동정류장
*탐방일자: 2022. 5. 9일(월)
*탐방코스: 암내교-가랭이교-구미정-번천대교-어전리정자
-봉정교-발면동정류장
*탐방시간: 11시30분-17시28분(5시간58분)
*동행 : 서울사대 원영환, 이상훈 동문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의 골지천을 따라 걸어 정선군임계면봉정리의 발면동정류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번으로 나누어 걸었습니다. 골지천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오지를 헤집고 흘러 물이 맑은데다 석회암의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도 꽤 있습니다. 골지천변을 따라 걸으면서 내내 아쉬웠던 것은 섬진강의 구암정이나 영산강의 송강정처럼 자랑할 만한 누정(樓亭)을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번에야 비로소 봉정리구미동의 구미정(九美亭)을 만나보아 무척 반가웠습니다.
누정(樓亭)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총칭하는 것으로,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마루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건축물을 이른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누정이 남원의 광한루(廣寒樓)나 옥천의 독락정(獨樂亭) 같은 누(樓)나 정(亭)에 국한해 쓰인 것이 아니고,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오죽헌(烏竹軒), 광주의 환벽당(環碧堂)과 소쇄원 경내의 광풍각(光風閣)처럼 대(臺), 헌(軒), 당(堂)과 각(閣)을 포함해 넓은 의미로 쓰였는데, 주된 의미는 누(樓)와 정(亭)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전은 누정의 기능을 유흥상경(遊興賞景), 시단(詩壇) 형성, 강학(講學) 장소, 종회(宗會) 및 동회(洞會), 사장(射場) 역할, 치적(治積) 표상 등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누정의 주 기능은 누정에 올라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산자수명한 자연경관을 탄상하며 즐기는 유흥상경(遊興賞景)이 아닌가 싶습니다. 꼭 유흥상경이 아니더라도 누정은 먹고살기에 바쁜 일반 상인(常人)들이 찾아갈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누정의 다른 기능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정기(樓亭記)나 누정시(樓亭詩) 같은 누정문학이 사대부들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된 것은 누정이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음을 반증한다 하겠습니다.
이번에 들른 구미정도 다른 누정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사대부가 지은 누정입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문신인 이자(李慈, 1652-1737)가 을사환국을 피해 정선군임계면연산리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한 것은 1688년의 일입니다. 4년 후 이자가 여기 구미동에 누정을 지은 것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자는 조선의 4대문장가의 한 사람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손자로, 공조참의까지 지낸 명문가의 사대부였습니다. 구미정의 천변 경관이 이자를 만나 되살아난 것은 사대부 이자가 한시 「구미가(九美歌)」를 지어 전해준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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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중인 이상훈 교수 차로 평창역을 출발한 것은 아침 8시40분경입니다. 모릿재를 넘고 백석폭포를 지나 이번 탐방의 끝점인 발면동잠수대교 앞에 도착해 공터에 차를 주차시켰습니다. 바로 앞 발면동정류장에서 34-5번 군내버스를 타고 임계로 가서, 택시를 타고 낙천리의 암내교로 이동했습니다. 골지천에 합류되는 합수점이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임계천 최하류인 암내교 다리 가까운 곳에 보를 설치한 것은 안전문제로 건설이 백지화된 임계댐을 대신해 인근 농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곳에 대형 댐 대신 소규모의 보를 설치했다고 해서 꿩 대신 매라고 비하해서는 안 되는 것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1시30분 암내교(岩內橋)를 건너 5구간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다리를 건너 곧바로 들른 미락 숲은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든 데다 정자 아래가 골지천과 임계점이 만나는 합수점이어서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점심을 들고 나서 임계천의 물을 받아들여 강폭을 넓힌 골지천을 따라 제방 길을 걸었습니다. 감입곡류의 안쪽 포인트 바(poinr bar)인 농지는 골지천이 날라 온 토사가 쌓여 형성된 선상지로 감입곡류로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수경재배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대형비닐하우스를 지나 해발574m의 가랭이산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에돌아 가랭이교를 건넌 시각은 12시38분입니다.
천변에 바짝 붙여 낸 차도를 따라 걸으며 바라다 본 골지천이 이제껏 보아온 모습과 다른 것은 바닥의 모래가 보일 정도로 계곡물이 맑은데다 하천 한가운데 자리한 암반에서 가운데 구멍이 난 포트 홀(pot hole)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표고차가 200-300m를 넘지 않아 보이는 낮은 산들을 좌우로 두고, 그 사이를 흐르는 골지천의 물색깔이 연두색을 띄는 것은 주위 산색이 활엽수의 연초록 잎들과 소나무의 진초록 잎들의 색상들이 그 아래 물에 투영되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서쪽으로 곧게 나있는 천변도로를 따라 걸으며 쉽게 석회암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이 지역이 원래 해안이었는데 융기하여 산으로 바뀌는 지각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면, 도로공사로 절단된 절개면의 석회암이 붕괴되어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도로 변에 낙석주의 경고판을 세운 것 같습니다.
13시34분 주변 풍광이 빼어난 골지천 암반에 자리한 구미정(九美亭)을 둘러보았습니다. 낙석주의 경고판을 지나자 골지천변에 산을 깎아 도로를 건설한 설계자, 공사감독자, 공사대리인, 준공검사자의 이름을 적어 넣은 비석이 보였습니다. 그 옆의 이름 없는 작은 다리를 건너 20분가량 더 걸어 다다른 구미정 입구에서 골지천 산소길을 안내하는 지도를 보았습니다. 임계의 송계교에서 시작되는 산소길은 암내교에 이르러 골지천을 만난 후부터 산소길은 골지천과 나란히 이어집니다. 구미정, 아우라지, 오대천과의 합수점, 한반도지형을 차례로 지나 정선5일장에 이르기까지 정선 땅을 헤집고 흐르는 골지천을 따라 낸 전장 44Km의 이 길은 공기가 청량하고 산수가 자명해 ‘골지천산소길’로 이름 지을 만 합니다.
왼쪽 아래 골지천의 천변에 자리한 구미정(九美亭)은 조선 후기 문신인 수고당(守孤堂) 이자(李慈, 1652-1737)가 1692년에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은 정사(精舍)로, 원래 이름도 구미정사(九美精舍)였다고 비문(碑文)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자는 을사환국(1688) 때 공조참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버리고 임계면 연산리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합니다. 4년 후 연산리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여기 구미동에 정사를 짓고 후학들을 모아 가르치고 말년에는 풍류를 즐기다 1737년에 세상을 뜬 후 이조참의로 추증됩니다. 수수해 보이는 장방형의 구미정(九美亭)에서 한시를 써넣은 편액들이 보이지 않은 것은 이 정자가 쉼터로서의 정자(亭子)보다는 학당(學堂)으로서의 정사(精舍)로 더 많이 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정자 이름의 현판과 이자(李慈)가 지은 구미시(九美詩) 한편이 편액으로 걸려 있어 다행이다 했습니다.
구미정교를 건너자 오른 쪽으로 임계 가는 길이 갈렸습니다. 왼쪽 길로 들어서자 오전에 발면리잠수교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이 길로 와서인지 길이 눈에 익었습니다. 구미정교에서 반시간을 조금 못 걸어 14시24분에 다다른 개병교 바로 옆에 연리지가 눈에 띄어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이 연리지는 두 나무가 X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H자 모양으로 이어진 대개의 연리지와는 달랐습니다.
15시47분 느릅나무가든을 지났습니다. 개병교를 건너자 물색이 진초록으로 바뀌어 더욱 파랬습니다. 골지천의 물은 진초록색을 띠고 있었는데, 광동댐의 녹색 물과 다르게 보인 것은 전혀 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천대교를 건너자 왼쪽으로 반천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여기를 들머리로 삼아 오르는 해발900m의 반천산은 정상에 오른 후 반천1교를 날머리 삼아 하산하는데, 이 반천산성등산로는 그 거리가 총5Km에 달해 그저 곁불을 쬘 뜻으로 가볍게 오를 만한 산은 아닙니다. 공기가 탁한 서울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현달이 산 위로 높이 떠 있어 반가운 마음에서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천변의 제방 길을 걸어 다다른 어전동의 허름한 정자는 구미정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쉬어가기에 참으로 좋은 것은 강 건너로 깎아지른 서답바위(?)가 골지천변에 병풍처럼 도열하고 있어서였습니다. 흔치 않은 느릅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느릅나무가든을 지나 도로로 복귀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고 노일 정류장을 지나 반천산성등산로의 날머리인 반천1교를 건넜습니다. 이 다리 옆에 설치된 국가비점오염물질측정소는 도로나 농지 등에서 빗물과 함께 하천으로 유입되어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비점오염물질을 측정하기 위해 설치된 무인측정소입니다. 10분을 더 걸어 왼쪽으로 오전에 들렀던 고양리의 하승두쪽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반천삼거에 다다른 시각은 16시19분입니다.
17시28분 발면동정류장에 도착해 5구간 탐방을 마쳤습니다. 반천삼거리 앞 삼거리가든은 규모가 제법 커보였는데, 주차한 손님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 것은 코로나의 위세가 아직은 크게 약화되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굽이져 흐르는 골지천을 따라 걸으며 눈여겨 본 것은 길가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소담하게 하얀 꽃을 피운 끈질긴 생명력의 조팝나무(?)였습니다. 저 아래 막은 보로 골지천은 수량이 늘어나 꽤 깊게 보였습니다. 이 보(湺)가 신정일님이 저서 『한강역사문화탐사』에서 언급한 봉정리소수력발전소인 것 같은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정일님은 위 책에서 “옛날에는 물 반, 고기 반이었다는 골지천이 인간의 편리 때문에 자연자체가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라고 개탄했습니다. 이곳에 보를 설치한 덕분에 수로를 내어 바로 아래 벌말에 필요한 물을 적기에 공급해 토지생산성이 높은 밭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싶어, 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부인이 고추모를 깔대기 모양을 한 농기계에 던져 넣고, 남편은 그 농기계로 물을 주고 모를 심는 일련의 작업을 힘들이지 않고 바로 바로 해내는 것을 보고, 이 또한 저 위에 보를 막아 농업용수가 잘 공급되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정교 바로 앞 정자에 앉아 마지막 휴식을 취한 후 10분을 더 걸어 이번 탐방의 끝점인 발면동정류장교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빨리 평창에 도착해 모처럼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반주를 곁들여 막국수를 맛있게 들으면서 느낀 행복감은 한강을 따라 걷고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하면서 군포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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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정의 편액에 담긴 한시 구미가(九美歌)는 천변의 넓은 암반위에 세워진 구미정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자가 노래한 구미정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은 어량(漁梁), 전주(田疇), 반서(盤嶼), 층대(層臺), 평암(平巖), 징담(澄潭), 취벽(翠壁)과 열수(列峀) 등 9가지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9가지 아름다움을 각각 “항상 물고기가 많이 모여 있다고 하여 어량(漁梁), 주위의 밭두렁이 그림보다 아름답다는 전주(田疇), 주위에 있는 바위들이 섬과 같이 아름답다는 반서(盤嶼), 주위 곳곳에 쌓아올린 돌층대의 아름다움인 층대(層臺), 정자 뒤편에 위치한 연못이 바위가 뚫려 생긴 것이라 하여 붙여진 석지(石池), 바위 한개의 넓이가 100평 이상 되고 평평하여 붙여진 평암(平巖),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연못의 물같이 항상 잔잔하여 부르게 된 징담(澄潭), 주위의 기암절벽이 바위 옷 이끼로 항상 푸르게 보인다 하여 부르게 된 취벽(翠壁),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아름답다는 열수(列峀)”라고 부연해 설명했습니다. 번역문이 없었다면 그림의 떡이었을 난해한 한시 「구미가(九美歌)」를 읽고 나자, 조선시대 누정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집중된 까닭을 알 것 같았습니다. 낙동강이 흐르는 경상도는 영남학파의 산실이고, 섬진강과 영산강이 흐르는 전라도는 기호학파들이 세를 이루고 살았던 곳이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대부분의 누정은 경관이 빼어난 강가나 바닷가 등 물가에 세워졌습니다. 이에 더하여 유력한 사대부들이 세웠거나 자주 들러서 격조 높은 누정시(樓亭詩)나 누정기(樓亭記)를 남겨야 제대로 된 누정으로서의 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는 김풍기교수께서 논문 '명승 구성의 방식과 유형화의 길'에서 명승으로서의 명성을 얻기시작하는 시점을 확정하는데 "가장 확실한 것은 문헌기록에 남아서 자신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논의를 진행할 수 밖에 없다"면서 "그런 기준으로 경포대를 살핀다면, 가장 먼저 기록으로 남은 안축의 시문에서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대부들이 누정(樓亭)을 찾아가 즐겼다면, 일반 상인(常人)들이 마음 편히 쉬어 간 곳은 모정(茅亭)입니다. 주로 농경지에 세운 모정은 편액(扁額)이나 현판(懸板)도 걸려 있지 않고 이름도 따로 없어 들에서 일하다가 그때그때 쉴 수 있는 생활밀착형 정자라 하겠습니다. 제가 강을 따라 걸으면서 주로 쉬는 누정은 시골 마을의 모정으로 지금은 정자 이름도 걸려 있고 지붕도 기와로 되어 있어 옛날 모정과 많이 다르지만, 편액이나 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는 것은 그대로입니다.
을사환국이 일어나지 않아 이자가 이곳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구미정이 세워지지 않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누정은 모정과 달리 철저히 양반문화의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을사환국이라는 3백여년전의 역사적 사건이 오늘에 이르러 제게 구미정을 유흥상경토록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래서 나들이는 해볼 만한 것이다 싶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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