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2. 1. 22일(토요일)
탐방지 : 충북영동소재 월류정/양산팔경
동행 : 나 홀로
작년 여름 ‘금강 따라 걷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영동 땅을 이처럼 자주 걷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969년 여름 방학 때 덕유산을 오르려고 영동역에서 하차해 인근의 천변에서 아침 식사를 지어 먹는 것으로써 영동 땅과 인연을 맺은 후, 이 땅을 다시 찾은 것은 천태산과 민주지산을 등산하고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지난 것이 전부였습니다. 다 합해도 다섯 번을 넘지 않은 영동 땅 탐방이 최근 몇 달 동안에 일곱 번이나 추가된 것은 금강을 따라 걷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영동역을 거쳐 금강을 찾아 간 것은 충북의 영동 땅을 걸을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전북의 무주는 전북의 전주역보다 충북의 영동역에서 더 가깝고 교통도 편리합니다. 무주 땅을 흐르는 금강을 따라 걸을 때 비용과 시간이 더 드는 전주역으로 가지 않고 영동역에서 버스를 타고 무주로 이동, 금강을 찾아가곤 해 영동역을 거쳐 가는 횟수가 많아졌습니다.
영동역을 경유해 ‘금강 따라 걷기’를 진행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금강이 영동 땅에서 옥천 땅으로 흘러들어가는 다음번부터는 옥천역에서 하차해야 금강을 따라 걷는 일이 수월해 더 이상 영동역까지 가서 하차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미뤄왔던 황간의 월류정(月留亭)과 양산의 양산팔경(陽山八景) 등 영동의 명소를 이번에 찾아 나선 것은 이번이 영동역을 거쳐 가는 마지막 금강 탐방 길이어서 그리했습니다.
1.월류정(月留亭)
영동군황간면에 자리한 월류정은 달도 머물다 갈 만큼 경관이 빼어난 영동의 명소입니다. 작년 10월 영동역에서 월류정의 사진을 처음 보고나서, 진행 중인 금강 따라 걷기가 영동 땅을 벗어나기 전에 꼭 한 번 탐방하겠다고 별러오다 이번에야 비로소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영동역을 한 역 지나 황간역에서 하차, 택시를 타고 월류정으로 이동했습니다. 황간역에서 월류정까지는 부지런히 걸으면 1시간 남짓 후에 다다를 수 있을 만큼 멀지 않은 길인데도 택시를 탄 것은 서두르지 않으면 월류정 탐방을 마치고 양산으로 이동해 양산팔경을 둘러본 후 금강을 따라 심천역까지 걸어가는 이번 탐방 길을 해지기 전에 마치기 어려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황간역 출발 10여분 후 월류정 맞은 편 조망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강 건너 월류봉은 산세가 적지 아니 험해보였습니다. 뒤편에 곧추 서 있는 해발4백m대의 월류봉의 세 봉우리는 전면이 깎아지른 천애의 절벽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세에 쉽게 압도됐습니다. 세 개의 바위 봉우리 앞에 자리한 아주 작은 바위 봉우리를 보자 저 봉우리야말로 월류봉이 월류정에 정자 터를 내주기 위해 빚어낸 꼬마 봉우리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이 꼬마 봉우리의 암벽 위에 자리 잡은 월류정을 바라보자, 앞으로는 민주지산의 물한계곡에서 발원해 심천리에서 금강에 합류되는 금강의 제1지류 초강천이 휘돌아 흐르고, 뒤로는 월류봉의 세 봉우리가 병풍처럼 서있어, 월류정은 산과 강이 어우러져 빚어낼 수 있는 최고의 승지(勝地)에 터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주변의 푸르른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월류정은 이제껏 보아온 어떤 정자보다 더욱 단아하고 품위 있어 보였습니다.
차에서 내려 육각정의 월류정에 올라가 사방을 조망해보고자 초강천을 건넜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월류정에 다가가자 시설물노후화에 따른 사고 위험이 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고 출입구를 철문으로 막아놓아 정자에 올라설 수가 없었습니다. 사대부들이 쉬면서 지었을 법한 한시가 남아 있나 살펴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올라온 길로 조심해 되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꽁꽁 얼어붙은 초강천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월류정에 터를 내준 월류봉은 한천팔경의 제 1경으로 절벽이 공중에 솟아 봉우리가 수려하고 그 봉우리에 마치 달이 걸려 있는 것 같아 월류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만한 곳이라면 과연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인근에 한천정사를 지어 강학을 할 만 했겠다 싶었습니다.
2.양산팔경(陽山八景)
영동군이 양산을 꿰고 흐르는 금강 변의 아름다운 절경 8곳을 선정해 명명한 양산팔경은 2017년 영동군이 팔경을 잇는 둘레길을 개통함으로써 누구나 언제든 탐방할 수 있는 영동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월류정에서 영동역으로 돌아가 송호관광지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중간에 하차한 양산에서 광운관광농원 앞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이 농원에서 조금 내려가 금강의 우안 길을 걸어 송호관광지를 들르느라 강 건너 양산팔경은 다가가보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양산팔경은 금강의 좌안에 자리한 5경 함벽정, 8경 용암과 2경 강선대 등 3곳입니다. 수두교를 건너 왼쪽 산자락에 자리한 4경 봉황대는 시간이 넉넉지 못해 그냥 지나쳤고, 6경 여의정은 건너편인 금강 우안의 송호관광지에 터 잡고 있어 들르지 못했습니다. 양산팔경의 1경 영국사는 천태산 등산 때 두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만, 3경 비봉산과 7경 자풍서당은 금강과 떨어져 있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광운관광농원 앞에서 조금 내려가 금강을 건넜습니다. 큰 비가 오면 물이 넘치는 세월교인 수두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금강의 좌안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걸어 시작된 데크 길로 들어서 오른 쪽 아래 금강의 물 흐름과 나란한 방향인 동쪽으로 진행했습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기세여서 걱정했는데, 이내 구름이 가시고 맑게 개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첫 번 째 들른 명소는 탐방로에서 약간 위쪽으로 떨어져 자리한 봉양정(鳳陽亭)입니다. 양산팔경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영동군의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된 봉양정은 금운(錦雲) 이명주(李命周)가 동문수학한 13명과 함께 이 정자를 짓자 어진 새가 아침볕에 와서 울었다 하여 봉양정(鳳陽亭)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꽤 높은 곳에 자리해 전망 좋은 봉양정이 특이한 것은 거실이 곁들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1967년에 중수된 봉양정은 아직은 세월의 때가 끼지 않아서인지 편액이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양산팔경의 5경인 함벽정(涵碧亭)은 봉양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금강과 얼마간 떨어져 있는 봉양정과 달리 함벽정은 금강에 면해 있어 잔잔히 흐르는 강물 소리도 잘 들렸습니다. 햇살이 퍼져 함벽정에서 맞는 한낮의 겨울이 따사로웠습니다. 위치가 하도 좋아 시 읊고 글 쓰는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는 함벽정에는 편액이 걸려 있어 사진을 찍어 왔는데, 한자가 작고 빽빽이 차 있어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강안(江岸)에 자리해 풍광이 수려한 함벽정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하고 싶은 사대부들의 욕망은 이 정자에 거실을 들이는 것으로써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영동군에서 향토유적물 제35호로 지정하고 관리를 잘해서인지 함벽정은 더할 수 없이 깔끔해 보였습니다.
함벽정을 출발해 슬레이트 지붕의 폐옥에 이르는 길은 야자매트 길로 오른 쪽 아래 금강을 내려다 볼 수 있어 걷기에 참으로 좋았습니다. 방문이 다 떨어져 나가 을씨년스러운 폐옥을 뒤로 하고 동진하다가 수원에서 오셨다는 중년 여성 한분을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영동역에서 버스를 같이 탄 이 분은 강선대에서 출발해 저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하다 송호국민관광지로 건너가는 현수교 앞에서 만났습니다. 저처럼 혼자서 여행길에 오른 이분의 이야기인즉, 여성 혼자서 길 떠나기가 두려워 코스선정에 제약을 많이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광용으로 놓은 인도 전용의 현수교를 지나 강선대로 가는 길에 강 한가운데 자리한 바위를 사진 찍었는데, 이 바위가 바로 양산팔경의 8경인 용암(龍巖)입니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강선대와 목욕하는 선녀를 보느라 승천하지 못하고 강가에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용암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노라니, 뜬금없이 울산 개운포의 처용암(處容巖)이 생각났습니다. 외황강이 동해와 만나는 포구 개운포 앞 강물에 반쯤 잠긴 처용암은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유서깊은 바위입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세죽마을 바로 앞의 바위섬에서 처용이 나타나 처용암으로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용암과 처용암 모두 아무런 손상 없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강물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용케도 개발을 피해갈 수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양산팔경의 마지막 탐방지인 강선대(降仙臺)는 영동군 향토유적 1호로 지정된 영동의 명소입니다. 강선대(降仙臺)를 오르려면 등선대(登仙臺)를 거쳐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다리 건너 강선대 앞의 안내문에 “금강 기슭의 기암절벽과 노송이 울창한 곳으로 대(臺) 밑을 감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과 멀리 퍼진 넓은 들의 경관은 사람의 마음을 만들어 주는” 강선대는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으로 “동악 이안눌과 백호 임제의 훌륭한 시가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오른 육각정의 강선대가 1956년 여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안내문에 적혀 있습니다. 중수가 아니고 건립이라면 이안눌과 임제는 정자가 세워지기 전에 여기를 찾아와 시를 지은 것인데, 과연 그러한지는 확인해볼 일입니다.
강선대에서 양산팔경 탐방을 마치고 강가로 내려가 금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봉곡교를 지나며 뒤를 돌아보자 소나무들이 받쳐 주는 암벽 위의 강선대가 발사를 얼마 앞둔 우주발사체처럼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듯이 날렵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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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지난 양산(陽山)이라는 지명이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제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양산이 신라의 고전시가(古典詩歌)인 「양산가(陽山歌)」의 본거지라는 것입니다. 고전시가(古典詩歌)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19세기말까지 우리 민족이 만들고 불렀던 노래 문학 중에 문자로 기록된 것을 일컫는 것으로, 시대를 달리하며 상대시가(上代詩歌) · 향가(鄕歌) · 속요(俗謠) · 경기체가(景幾體歌) · 악장(樂章) · 시조(時調) · 가사(歌辭) · 잡가(雜歌) 등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양산가(陽山歌)」는 향가에 앞서 불렸던 신라의 상대시가(上代詩歌)입니다. 신라의 29대 태종무열왕 2년인 655년에 낭당대감(郎幢大監) 김흠운이 백제를 치다가, 양산 아래에서 백제군의 야습을 받아 죽었는데,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도 같이 전사했습니다. 김흠운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도 나아가 전사했습니다. 이를 애도한 사람들이 지어 부른 노래가 바로 「양산가」입니다.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데는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양산가」 같은 노래가 전파된 것도 한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작자 미상의 「양산가(陽山歌)」는 가사가 전해지지 않지만, 어떻게 불리게 되었는가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습니다.
<탐방사진>
1.월류정
2.양산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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