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32. 공주명소 탐방기1(우금티전적지)

시인마뇽 2023. 8. 12. 17:34

*탐방일자: 2022. 12. 11

*탐방지 : 충남공주시소재 우금치전적지

*동행 : 나 홀로

 

 

  공주시가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세계유산도시로 이름난 도시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큰 싸움터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3년 전 대학동창들과 함께 전북고창의 무장읍성을 들러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를 둘러본 것이 계기가 되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주의 우금치가 1894년 수많은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패해 전사한 전적지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1894년의 우금티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과 교전한 공주전투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18일간 계속된 공주전투는 1892년 공주에서 시작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교조신원운동이란 1860년 동학을 창시해 포교하다가 1864년 처형된 수운 최제우선생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기위해 동학교도들이 벌인 운동을 이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1892년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 시작된 곳은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였습니다. 교조신원운동이 동학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 운동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교조의 명예회복과 함께 관리들의 불법수탈 금지, 그리고 왜와 서양세력을 배격하는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요구했기에 동학에 민심이 모였고 동학조직이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공주시에서 발간한 안내책자 공주동학농민혁명이야기에 따르면, 189210월에는 동학교도 1천여 명이 공주의 충청감영에 집결해 교조신원을 청하는 진정소를 제출했으며, 18947월에는 이인역에 모여 집회를 했습니다. 8월에는 임기준이 지휘하는 동학도 1만여 명이 정안면의 궁원에 모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집회들은 10월의 이인전투로 이어졌습니다.

 

  1894년의 공주전투에는 전국에서 남접농민군과 북접농민군이 참여했습니다. 공주사람들은 공주창의소의병대장 이유상과 공주동학접주 장준환과 함께 참여하여 일본군 관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18941023일 이인전투로 시작된 일본군과의 전투는 1024~25일의 효포전투, 1024일의 대교전투, 1025일의 옥녀봉전투, 118일의 이인전투가 있었고,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119~11일 사이에도 송장배미산자락전투와 오실마을산자락전투가 있었습니다.

 

  여러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19일의 우금티전투입니다. “1만여명의 동학농민군이 500여 명만 남을 정도로 오전10시부터 오후 2~3시 경까지 40~50차례 화승총과 신식소총의 대결이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었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및 관군을 뼈가 떨리고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전투였다고 공주시의 안내전단 우금티전적은 알려주었습니다. 우금티를 넘지 못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아쉬움을 무릎팍으로 내밀어도 나갈 수 있었는데, 주먹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었는데라고 사람들이 말한 것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일본군과 싸운 동학농민군의 간절한 충정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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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큰맘 먹고 짬을 내어 벌써부터 별러온 공주의 우금티전적지를  찾아갔습니다. 저의 금강 따라 걷기는 작년 6월 발원지인 전북장수의 뜬봉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북 장수-진안 용담댐-무주-충북 금산-영동-옥천-대전 대청댐-충북 청주-세종시를 거쳐 공주시의 공주교에 이른 것은 1123일이었습니다. 금강 따라 걷기의 이번 구간을 공주 금강교에서 시작해 공주보를 거쳐 대학2리 정류장에서 끝내는 것으로 구간을 짧게 잡은 것은 공주시내 우금티의 전적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후 3시반경 일찌감치 대학2리 정류장에서 금강 따라 걷기를 마치고 공주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우금티전적지를 들렀습니다.

 

  1620분경 우금치 터널을 막 지나 S-oil 주유소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길 건너 공주우금티전적(公州牛禁峙戰蹟)’으로 이동해 맨 먼저 찾아간 곳은 동학혁명위령탑입니다. 128년 전 동학농민군이 반봉건과 반외세를 기치로 내걸고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싸운 최대격전지가 여기 우금치고개였습니다. 이 고개에서 일본군에 패해 희생된 동학군의 영령을 달래고자 세운 동학혁명위령탑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동학군의 넋을 달랜 후 우금치 터널 바로 위 여러 장승들이 서있는 우금치고개에 올라서자 공주성을 향해 저 아래에서 이 고개로 진격해 올라오는 동학농민군들이 눈에 선했습니다. ‘공주우금티전적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입니다. 우금치고개에서 다시 위령탑으로 내려가 탑 주위를 천천히 돌아본 후 야외광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우금티추모예술제 회고사진전에 전시된 사진들을 일별한 후 우금티전적알림터 건물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여성근무자 한분이 저를 반겨 맞으며 친절히 안내를 해준데다, 동학혁명에 관심을 표하는 제게 동학소설 은월이와 안내책자 공주농민혁명이야기를 챙겨주었습니다. 저를 안내한 이 분께 감사의 뜻으로 최근에 읽은 신복룡교수의 저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녁 시간이어서인지 넓은 주차장이 텅 비었고, 내방객도 저 이외에는 달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는 해를 뒤로 하고 우금티전적알림터를 출발해 공주터미널로 이동하는 것으로써 한 시간이 채 안 걸린 공주우금티전적탐방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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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명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은 관군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조선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같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공주전투가 벌어졌고, 그 마지막 전투인 우금티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참패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청군과 일본군의 조선주둔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청나라의 조선지배는 끝났지만, 청나라에 승전한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해나갔습니다. 10년 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조선은 일본에 외교권을 뺏기고, 1910년에는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동학혁명운동이 일본의 강점을 초래했다고 해서 동학농민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주체인 농민들은 보국안민(報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운동을 전개했지만, 조선의 정치 외교를 좌지우지할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해 혁명운동을 성공으로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배층에 항거한 반봉건농민운동이고, 신분철폐와 사회개혁을 앞세운 근대화운동이며, 일본 식민지 침략에 맞선 항일운동에 그 의의가 있다고 공주시의 안내전단 우금티전적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렇듯 동학혁명이 활발했던 공주 땅에 조선말기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알려진 조병갑의 묘가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병갑과 그 집안은 공주의 신풍면 평소리에서 살았고, 이 마을에 조병갑의 묘도 함께 있다고 안내책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 고부부사 조병갑의 부패와 학정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고부 봉기의 책임을 지고 귀양 갔다가 얼마 후 대한제국의 판사로 복귀해 동학의 2대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조병갑에 대한 역사의 단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