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3. 1월31일(화)
*탐방지 : 충남부여소재 정림사지와 수북정
*동행 : 나 홀로
백제의 26대 성왕이 재위 16년(538)에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여기 지명이 부여(扶餘)가 아니고 사비(泗沘)였습니다. 사비가 부여로 지명이 바뀐 것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후의 일로 신라의 35대 경덕왕 때인 8세기에 들어서입니다.
그렇다고 부여라는 이름이 경덕왕 때 처음 쓰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애당초 부여는 땅 이름이 아니고 나라 이름이었습니다. B.C 450년 동이족의 한 갈래인 맥족(貊族)이 백두산 북쪽의 송화강 상류의 기름진 땅에 터 잡아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 이름이 부여(扶餘)였습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부여와 관련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첫째, 고구려의 건국설화입니다. 부여왕 해부루(解夫婁)는 갖은 노력 끝에 늙어서 아들 금와(金蛙)를 낳아 태자로 삼습니다. 부여왕은 재상 아란불의 요청에 따라 가섭원에 도읍을 정하고 동부여를 세우며, 옛 도읍지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새 나라를 세웁니다. 해부루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금와는 하백의 딸 유화(柳花)가 해모수와 사통한 것을 알고 은밀한 방에다 유화를 은폐시킵니다. 유화는 알을 낳았는데, 이 알을 깨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몽(朱蒙)입니다. 주몽은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가 주몽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아챈 어머니 유화가 권하는 대로 부여에서 도망가 비류수 위에 초막을 짓고 삽니다. 주몽은 스물두 살이 되어 성을 고씨로 정하고 백두산 밑의 험준한 지역인 압록강의 중류일대에 고구려를 세웁니다.
둘째, 백제의 건국설화입니다. 온조설화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 주몽(朱蒙)은 북부여에서 고난을 피해 졸본부여로 나옵니다. 딸만 셋을 둔 부여(졸본부여) 왕은 둘째 딸을 주몽에게 시집보냅니다. 부여(졸본부여)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주몽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습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태자로 삼습니다. 이에 반발한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백제의 건국에 관한 또 다른 설화인 비류설화에는 비류왕(沸流王)의 아버지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優台)이고, 어머니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라 합니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습니다. 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 와 졸본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우태가 죽어 졸본에서 과부로 혼자 살고 있는 소서노를 왕비로 삼습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아들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물려줍니다. 이렇듯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와의 밀접한 관련 하에 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은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부여를 처음 찾아간 것은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1978년의 일입니다. 1977년 결혼해 그 이듬해 6월에 큰아들을 낳았습니다. 중학교 교사인 며느리를 대신해 어머니가 아이를 맡아 돌보아주셔서 저는 주말에 가끔 집사람과 같이 가까운 명소를 다녀오곤 했는데, 그해 10월에는 일요일에 집사람과 함께 당일치기로 부여를 다녀왔습니다. 45년 전의 일이라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버스를 타고 부여로 가서 부여박물관을 둘러본 후 부소산을 올라가 백마강을 내려다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 세 차례 더 부여를 찾아갔지만, 백제시대의 5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정림사지를 들르지 못한 것이 자못 아쉬웠습니다. 이번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부여 시내 정림사지와 강 건너 언덕의 정자 수북정을 탐방해 그간의 아쉬움을 풀었습니다.
부여는 약 2,500여년 전(前)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송국리 문화가 개화(開花)했던 유서 깊은 도시(都市)라고 부여군의 홈페이지는 안내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26대 성왕은 국가중흥의 원대한 뜻을 품고 풍요로우면서도 국가정책의 융통성이 많은 사비, 즉 부여로 천도하였습니다. 부여군은 부여를 123년간 국력신장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쳐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던' 고대문화를 꽃 피웠던 역사문화의 고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부여는 7백년 가까이 존속해온 백제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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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경기도 군포의 산본 집을 출발해 전철로 이동한 곳은 오산터미널입니다. 아침 7시10분에 오산터미널을 출발하는 부여행 시외버스에 올랐습니다. 세종시와 공주를 거쳐 부여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40분경으로, 버스에서 하차하자 겨울 특유의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정림사지까지는 멀지 않는 거리지만 택시로 이동한 것은 정림사지와 수북정 두 곳을 탐방한 후 금강을 따라 강경까지 걷기로 예정되어 있어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정림사지(定林寺址)
주차장에 하차해 택시기사분에 대기를 부탁드린 후 얼마간 떨어진 정림사지 입구를 찾아 정림사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내 안내판에는 사적 제301호인 부여정림사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 유적을 대표하는 중요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축조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림사지 안내판 바로 옆에 세워진 정림사지 조감도에는 남회랑 중간에 중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문을 지나 경내 안으로 들어서면 양 옆의 동회랑과 서회랑 사이에 자리한 오층석탑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오층석탑을 지나 금당이, 금당 뒤로 양 옆에는 동승방과 서승방이, 그 중간에 강당이, 그리고 그 북쪽으로 북승방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조감도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오층석탑과 금당, 금당 안에 안치된 두 개의 석불좌상 뿐이어서 초라하고 허전한 느낌도 들지만, 그 옛날의 정림사를 옮겨 놓은 조감도와 가람배치도를 보고나자 정림사가 과연 사비시대의 중심 사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양 옆으로 물이 꽁꽁 얼은 네모반듯한 사각형의 연못을 지나 중문지에 이르자 오층석탑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7백년 역사의 백제가 우리에게 남긴 귀중한 유산입니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습니다. 여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지석탑에 비하여 잘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된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부여군의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인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 상찬하는 글을 안내전단은 덧붙였습니다. 이토록 유서 깊고 자랑스러운 오층석탑의 1층 탑신에 당나라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승전기공문을 새겨넣은 것은 오층석탑으로서는 씻지 못할 상처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탑신이 깔끔하고 산뜻해 보이는 오층석탑은 겨울 특유의 냉랭하고 새파란 하늘을 닮아서인지 좀처럼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이 느껴졌습니다.
탑 뒤에 자리한 금당은 세월의 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중수된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일자형의 금당 안에 안치된 두 개의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보물 제108호로 지정된 유물인 석불좌상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축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이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 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을 표현한 것이라 하는데, 제게는 조금 익살스럽게 보여 해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정림사지 박물관을 들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대기중인 택시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강 건너 수북정으로 향했습니다.
2. 수북정(水北亭)
두 주전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부여의 백제교를 건너면서 수북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부여터미널을 출발하는 오산행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수북정을 들르지 못하고 길 건너서 사진만 찍었습니다.
이번에 정림사지와 수북정을 묶어 탐방에 나선 것은 따로 짬을 내 다시 찾아오기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동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대절해 정림사지를 들러 둘러본 후 백제교를 건너 여기 수북정으로 이동했습니다.
수북정(水北亭)은 부여팔경의 하나로 백마강변의 자온대 위에 세워진 정자를 이릅니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자이름을 조선 광해군 때 문신인 김흥국(金興國, 1557-1623)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보아 광해군 때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흥국은 1596년 북평사(北評事) 등을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602년 형조정랑이 되었습니다. 1605년 한산·양주 등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낙향해서는 백마강가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글과 술로 소일하였으며, 스스로를 강상풍월주인(江上風月主人)이라 칭하였다고 합니다. 김흥국이 교유한 인물은 김장생(金長生)·신흠(申欽)·황신(黃愼)·서성(徐渻) 등의 이름난 거유였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돌계단을 걸어올라 언덕에 이르자 팔작지붕의 수북정이 두 팔을 벌려 저를 반기는 듯 했습니다. 언덕 마루에 자리 잡은 수북정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여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바로 아래 백마강과 이 강 위에 놓인 백마교, 강 건너 부소산과 구드래 일원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수북정 건물의 특징은 “기둥배치가 외부 기둥과 내부 기둥을 가로줄에 맞추지 않았고, 내부는 별도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 모습이다. 천정도 가운데 기둥 부분의 서까래를 감춘 우물천정이고, 주변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았고, 지붕은 겹치마 팔작지붕이다.”라는 것입니다. 안내문의 글이 복잡하기는 해도 수북정에 올라가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자에 올라서자 한시가 쓰여진 편액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현장에서 한시를 해독할 정도에는 제 한문 실력이 못 미쳐 집에서 다시 보고자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수북정에서 내려가 대기 중인 택시로 강을 건너자마자 하차해 금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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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나라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494년의 일입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내정을 다지면서 북위, 송, 남제와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으며, 백제를 웅진으로 쫓아보내고 한강일대를 차지하였습니다. 장수왕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의 동맹으로 막혀 장수왕은 백제와 신라를 남해로 밀어붙이지는 못했습니다. 장수왕을 이어받아 즉위한 고구려왕은 손자인 문자명왕입니다. 영토확장에 주력하고 있는 고구려에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 왔으니, 그것은 바로 문자명왕 3년인 494년에 부여 왕이 투항한 것입니다. 이를 동부여와 구별하여 북부여라고 합니다. 나라이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긴 부여는 동쪽의 물길에 쫓겨 같은 피붙이인 고구려에 투항했습니다. 투항을 거부한 부여의 일부 세력은 동쪽의 바닷가로 진출해 러시아 땅이나 일본 땅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부여의 투항이 실익은 별로 없으나 상징적 의미는 컸다고 합니다. 부여 계통의 나라에서 정통성을 확보했고, 중국쪽 나라들에게 북쪽을 대표한다고 표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백제의 성왕은 538년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여명소탐방기를 남길 수 있는 것은 부여라는 나라이름은 사라졌지만 땅 이름은 오늘에도 남아 있어 가능했음을 기록하면서 이만 글을 맺습니다.
<탐방사진>
1. 정림사지
2. 수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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