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4. 6. 25일(화)
탐방지 : 경북구미시상모동 박정희대통령 생가 및 역사자료관
동행 : 나 홀로
이 땅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건국된 것은 1948년8월15일의 일입니다. 해방된 지 3년 만인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덕분에 같은 해 11월24일에 태어난 제가 영광스럽게도 건국동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76년 동안에 이 나라를 이끌어온 대통령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과 윤석렬 등 모두 13분입니다. 이분들 중 제가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제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공화국으로 건국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공화국으로 건국하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인민공화국이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 국민의 삶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들과 다르지 않아, 여전히 인권이 유린되고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가 어렸을 때인 초등학교 6학년 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안타깝게도 생각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정치지도자로 생생하게 기억하는 분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입니다. 제가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간신문 동아일보를 구독한 중3 때부터였습니다. 그 후로는 박정희대통령 집권 중에 겪은 여러 일 들을 거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구미시의 박정희대통령생가를 찾아 간 것도 박대통령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처음부터 박정희대통령을 존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대통령에 비판적인 언론의 영향을 받아 저 역시 줄곧 박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한일국교정상화나 월남파병에 반대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3선개헌과 교련에 반대해 거리시위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박대통령에 대해서 여전히 비판적이었던 것은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때문이었습니다. 1979년 박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도 박대통령에 대한 저의 부정적 평가는 한동안 바뀌지 않았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박정희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존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박정희대통령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이 나라가 나아갈 길로 조국근대화를 제시했고, 이를 위해 4차에 걸쳐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그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박대통령은 서거하신 1979년에 1인당GNP 1,000불과 연간수출액 100억불 목표를 초과 달성해 이 땅에서 빈곤을 추방했습니다. 박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은 자주국방 기반구축, 중화학공업 육성, 고속도로 건설, 식량 자급자족 구현, 새마을운동 전개, 자연보호운동 전개 등 수없이 많지만, 제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우리도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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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경상북도 구미시의 상모동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생가를 탐방했습니다. 구미역에서 박정희대통령 생가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는데 떨어진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대통령생가는 대통령 생가, 민족중흥관과 역사자료관 외에도 동상이나 숭모동산 등 둘러볼 만한 곳이 더 있었지만, 시간이 넉넉지 못해 앞의 세 곳만 둘러 보았습니다.
박정희대통령 생가는 1917년에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간 살았던 집으로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선산군구미면상모리였습니다. 생가는 원래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1964년에 안채는 기와집으로, 사랑채는 초가집으로 다시 지었고, 추모관은 1978년에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생가는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초가집보다 크지 않아 그 당시 대통령네 살림살이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사랑채에 있는 작은 공부방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대통령의 공부방에는 옛날 밥상 높이의 책상 및 책장과 호롱불이 놓여 있었습니다. 비좁기는 해도 공부방이 따로 있고, 책상과 책꽂이, 그리고 밤에 불을 밝혀 책을 볼 수 있는 호롱불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책상을 갖게 된 저보다는 박대통령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한 것 같았습니다. 다듬이돌과 디딜방아, 키, 탈곡기, 써래, 멍석 등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은 제 세대가 마지막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돌아본 후 대통령의 집무실을 재현해 놓은 민족중흥관을 들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서 희망에 찬 우리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자는 제5대 대통령의 취임사도 읽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천명한 대로 희망에 찬 새역사를 창조했기에 저희가 오늘날 이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다 싶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바로 옆 기념품판매소를 들러 박정희대통령의 일화를 담은 "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와 "박정희와 고속도로" 등 두 권의 책을 사갖고 왔습니다.
박정희대통령생가를 둘러본 후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으로 이동했습니다. 3층 건물의 자료관에는 평일이어서인지 관람객이 적었지만, 외국인이 보여 의외이다 싶었습니다. 역사자료관의 전시물 중에서 제 눈을 끈 것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관한 전시자료였습니다. 박대통령은 4차에 걸쳐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추진했는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은 자립경제 달성을, 제2차 계획(1967-1971)에서는 산업구조 근대화를, 제3차 계획(1972-1976)에서는 지역개발의 균형을, 제4차 계획(1977-1981)에서는 기술혁신과 능률향상을 목표로 설정해 추진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관된 목표는 자립경제구조의 실현이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으로 연평균경제성장률은 7.8%, 1인당 GNP는 83달라에서 125달라로 괄목할 만하게 증가했습니다. 제2차 개발계획 기간 중 연평균경제성장률은 9.6%, 수출은 10억달라를 달성하였으며, 1977년에는 수출이 100억달라, 1인당 GNP는 944달라가 되었다고 전시자료는 설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4월15일 제6대 대통령선거연설에서 ”일하는 대통령“이 될 것을 국민앞에 약속했습니다. 박대통령은 이 약속을 지켜 정말 열심히 일했기에 싸우면서 일하자는 대통령의 호소가 온 국민들에게 먹혀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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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많은 분들이 비판하는 것은 장기집권입니다. 박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집권한 기간이 1961년에서 1979년까지로 18년에 이르니 장기집권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집권 과정도 민주적이지 않았는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3선개헌을 했고, 그에 더하여 평생 집권이 가능토록 10월 유신을 감행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박대통령의 3선개헌을 막기 위해 데모에 나섰다가 붙잡혀 즉결심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박정희대통령은 장기집권을 했으면서도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기집권을 했으면서도 부패하지 않은 것은 박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것이 사적 이익이 아니고 국가발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법이 명시한 대로 8년마다 정권이 바뀌었다면 민주화는 당겨졌겠지만, 일관된 경제정책을 펼 수 없어 지속적인 경제발전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박대통령이 독재정치를 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저 역시 비판해왔습니다. 박대통령의 독재정치는 10월 유신 후 더욱 심화되어 집권 말기에는 민란에 까까운 부마사태도 있었습니다. 언론을 탄압했고, 계엄령을 발동해 반대세력에 재갈을 물린 것도 몇 번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 되돌아보니 박대통령의 독재에도 변명할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박대통령이 독재를 하지 않고 중의를 따랐다면 한일국교정상화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월남파병도 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경제발전의 종자돈을 확보할 수 없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무위로 그쳤을 것이고, 그 결과로 국민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고생하고 있을 것입니다.
박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했고 독재정치를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만, 그런 이유로 박대통령의 치적이 몽땅 부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먹고살만해 경재발전보다 민주화가 중요한 가치가 되었지만, 하루 세끼 끼니를 잇는 것을 걱정해야했던 선배세대와 저희 세대에게는 경제가 발전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고, 교육을 제대로 받아 잘 사는 것이 민주화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박대통령의 목표지향적이고 권위적인 통치스타일이 유효한 것은 저희 세대가 마지막일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해, 박대통령을 다시 소환해 짐을 지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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