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37. 서울명소 탐방기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시인마뇽 2024. 7. 21. 10:34

탐방일자: 2024. 3. 1()

탐방지 : 서울시 마포구소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동행 : 서울사대 원영환 동문

 

 

 

  한국의 수도인 서울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한 데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도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칠흑 같은 암흑기였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잊지 않고 그들의 영혼이 이 땅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수도 서울의 양지바른 한강변에 묘원을 마련한 것은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의 헌신에 감사할 줄 아는 문명국가이고, 이러한 문명국가의 수도인 서울 또한 선진국의 수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어엿한 국제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이란 1890년 조선시대 양화진(楊花津) 나루터를 수비하던 양화진영이 있던 곳인 서울시마포구양화진길46번지에 조성된 외국인묘지를 이릅니다. 이 묘원이 자리한 양화진은 조선 시대에는 수운의 중심지이자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제물포로 입하되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여기 양화진을 통해 도성과 궁궐로 출하되는 수운의 중심지였던 것은 강물이 깊어 대규모 선박들이 하역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물류의 중심지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양화진은 국방의 취약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양화진 앞 한강의 수심이 깊어  외적들 또한 대규모 군함을 이끌고 양화진을 침범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 국왕 영조는 1754년에 임 · 병 양란을 치르면서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된 여기 양화진에 군사적 주둔지로서 군진(軍陣)을 설치했었습니다. 그 후 18663월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하고자 프랑스군은 군함 3척을 이끌고 양화진을 침범했고,  이 침범은 그해 10월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교전하는 신미양요로 발전했었습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그 면적이 약 4천평에 불과해 공원묘지로는 비좁은 편입니다. 1890년에 조성된 이 묘원에 묻힌 외국인은 그해 728일 최초로 안장된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사 헤론(1856-18900, J. W. Heron)을 위시해 모두 417명이며, 그중 개신교 선교사는 가족을 포함해  147명이 묻혀 있습니다. 이 묘원에 안장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1900년 전후에 언론창달의 기수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의 어니스트 베델,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를 세운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배재학당 설립에 공이 큰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그의 가족들, 세브란스 의대를 세운 더글러스 B. 에비슨, 한국의 은인으로 추앙 받는 호머 헐버트 박사,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 등이 있습니다.

 

  개신교가 조선에 처음 전해진 것은 네델란드 선교회소속의 선교사 귀츨라프가 충청도의 섬인 고대도에 상륙해 성서를 전해주고 돌아간 1832년의 일입니다. 1866년 셔먼호를 타고 와 서해 연안에서 성서를 전해준 영국인 목사 토마스가 대동강에서 순교해 돌아가지 못한 것이 개신교 최초의 순교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94년에 이르러 미국 선교사의 선교활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884년 선교사 신분을 숨기고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앨런은 의사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 때 칼을 맞은 민영익을 치료해주어 시의로 임명되고 다음해 광혜원(뒤에 제중원)의 설립허가를 받아냈습니다. 188545일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조선 땅에 발을 들였고, 뒤따라 감리교의 스크랜턴도 들어와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의 남장로교, 영국의 성공회, 침례교, 구세군, 호주의 장로교 등의 선교사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1904년 개신교 목사들은 황해도, 평안도와 함경도 등 천주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은 서북지방을 공략해 전도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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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정역에서 원영환 대학동문을 만나 걸어서 묘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묘원에 도착해 정문을 지나자 왼쪽에 양화진홍보관과 그 위쪽으로 선교기념관이 자리했고, 오른쪽으로 양화진 봉사관이 보였습니다.

 

 

  봉사관을 들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소개하는 영화를 관람하고 묘역참배에 대한 안내사항을 들은 후 곧바로 선교사묘역으로 올라갔습니다. 아직도 겨울이 끝나지 않은데다 강바람이 차가워 손끝이 시렸습니다.

 

  A~I 까지 9개 묘역으로 조성된 이 묘원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우뚝 선 비석이 눈에 띈 영국인 기자 E. T. 베델(裵說, 1872-1909)의 묘입니다.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한국인의 억울함을 대변하느라 애쓴 베델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여기 양화진에 안장되기까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국인들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글들을 많이 실었습니다.

 

  미국 북감리회의 H. B. 헐버트는 여기 묘지를 찾기에 앞서 수년 전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를 통해 먼저 만났습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헐버트는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위해 헤이그로 가서 조선 대표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헐버트는 1906년에 창간된 대한제국 멸망사의 서문에서 한국인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숙하지 못하고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하는 민족이 아니고 극동에 사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한 민족이라면서 한국인에 애정을 표했습니다. 저는 이분께 그동안 품어온 감사의 뜻을 전한 후 다른 묘지로 옮겼습니다.

 

  묘비에 얼굴이 새겨진 H. F. 에케르트(1852-1916)는 독일출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서양음악, 특히 독일군대음악을 알리는데 주력한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말년에 인후두암으로 사망해 이곳에 안장되었습니다.

 

  눈여겨본 또 하나는 M. F. 스크랜턴(1832-1909) 대부인의 묘비입니다. ‘이화의 창설과 초석을 놓으신 스승이라는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설립한 근대여성교육의 선구자로 24년간 조선의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77세에 타계했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여기 묘원에 안장됐습니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내한한 H. G. 아펜젤러(1858-1902)는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세운 미국의 선교사입니다. 아펜젤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배제학당을 세워 훗날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대통령을 배출한 것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아펜젤러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개척자로 추앙받는 분은 H. G. 언더우드(1859-1916)입니다. 1885년에 내한하여 연세대학을 설립한 언더우드는 평생을 성서번역위원장으로 일하면서 한글을 다듬는데 헌신했습니다. 여기 묘원에는 자신과 아내를 비롯하여 7명의 가족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동행한 친구의 안내로 묘지를 찾아가 만난 여성 선교사는 미국 북감리교회의 R. S. (1865-1951)입니다. 로제타 홀 의료선교사는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45년 동안 꿋꿋이 견뎌내면서 장장 45년 동안 한국인들을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이 땅에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해 계몽운동을 벌인 인물이 바로 로제타 홀의 아들인 아들 셔우드 홀입니다. 여기 묘원에는 홀 가족이 3대에 걸쳐 6명이 합장되어 있습니다.

 

  개인 묘를 둘러본 후 찾아간 곳은 집단 묘역(?)G묘역, H묘역과 프리메이슨회원 묘역입니다. G묘역은 태어난 지 1년 이내에 사망한 어린이무덤으로 총 64기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이 묘역은 194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조성되었는데, 어린이 무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39기의 묘가 들어선 1960년대입니다. 63기의 묘가 들어선 H묘역에는 선교사로는 데니오와 엘리슨 등 단 2명만 안장되었고, 나머지 묘에는 대다수가 미군들이 묻혀 있습니다. 이 묘역이 조성된 것은 1950년대에서 2000년대로 1960년대에 가장 많은 23기의 묘가 들어섰습니다. 프리메이슨회원 묘역에는 이신론에 기반한 사교클럽인 프리메이슨 멤버들이 묻혀 있는데, 어떤 경위로 이곳에 묻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안장된 한국인은 구한말 정삼품 직급의 시종에 오른 김희동(金熙東)이 유일합니다. 원래 함경도 주민이었으나 러시아에 귀화한 것으로 알려진 김희동은 오랫동안 러시아 경내에 살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익혀 러시아공사관에서 공사의 통역을 맡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조선 궁중을 출입하게 된 김희동은 중추원 의관을 거쳐 역관으로서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정삼품의 궁내부 시종에 임명되었습니다. 김희동의 종교가 개신교가 아니고 러시아정교회라는 것은 제 친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한때 정동의 러시아정교회에 나가기도 이 친구는 큰할아버지인 김희동에 관련된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이 친구의 전언에 따르면 김희동의 부친은 구한말 단성부사를 역임했던 것 같습니다. 

 

  자료를 찾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김홍륙이 물러난 역관의 자리를 김희동이 이어받은 것입니다. 1898421일자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김홍륙은 러시아공사관 통역사에서 면직되고 후임으로 김희동이 임명되었습니다. 함경도 출신으로 1894년 이범진-베베르 조약체결 때 통역을 맡아 시종원 시종으로 임명된 김홍륙은 아관파천 직후 정2품(?)인 귀족원경 자리에 올랐습니다.  각종 비리로 면직된   김홍륙은 같은 해 10월에 고종과 순종을 커피로 독살하려다 들통나 사형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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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함재봉 교수의 역저 한국인 만들기를 읽고 나서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인의 유형으로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인종적 민족주의파5개 유형을 제시했습니다. 오늘날 조선인이 한국인으로 다시 만들어지면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한 한국인의 유형은 친미기독교파가 아닌가 합니다. 친중위정척사파는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반중감정이 고조되어 점점 약화되었고, 친일개화파는 친일매국노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해 이 땅에서 발 붙이기 어려우며, 친소공산파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하고 공산주의를 건국이념으로 한 북한이 몰락위기에 있어 주사파가 아니면 드러내놓고 표방하기가 쉽지 않으며, 인종적 민족주의파는 페쇄적이고 고립적이어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기가 힘들어 그 세를 불리기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앞으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할 한국인의 유형은 친미기독교파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친미기독교파가 주류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개신교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빨리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처음 도착한 시점이 주자성리학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던 때여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청과 일본 및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정치 · 경제적으로 경쟁하던 때에 미국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 병원을 설립해 병을 고쳐주는 등으로 조선사람들을 위해 노력해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함재봉 교수가 저서 한국인 만들기 III에서 언급했듯이 칼뱅주의와 복음주의가 혼합된 미국 특유의 개신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체화하고 있어, 미국 개신교의 지속적인 선교활동이 친미기독교파인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공화국으로 건국하는데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리라 사료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