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3. 1. 1일(일)
탐방지 : 경기도 화성시소재 용주사 및 융건릉
동행 : 나 홀로
황구지천을 따라 걷는 길에 경기도 화성시에 소재한 명찰 용주사와 왕릉 융릉과 건릉을 탐방했습니다. 두 곳 모두 조선후기 비운의 왕세자인 사도세자를 기리는 화성의 명소입니다. 이번에 황구지천 따라 걷기를 조금 일찍 마치고 이들 명소를 다녀온 것은 사도세자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李愃, 1735-1762)은 영조와 영빈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동갑내기인 혜경궁 홍씨와 결혼했습니다. 15세인 1749년에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기도 한 사도세자는 부왕과의 불화로 병을 얻었고 노론세력과 정치적 대립을 계속하다가 1762년 폐세자가 된 후 끝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 영조는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고, 아들 정조는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칭호를 올렸으며, 고종은 1899년 장종대왕(莊宗大王)으로 추존했다가 다시 황제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조라 하였다고 문화재청궁능유적본부의 안내전단 『화성 융릉과 건릉』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선생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 따르면 영조는 1742년 사도세자가 8세가 되어 시강원에 입학하자 탕평책을 널리 알리려고 성균관 입구 반수교 안쪽에 탕평비를 세웠습니다. 영조는 이 탕평비에 “신의가 있으면서 아첨하지 않음은 군자의 공변된 마음이요, 아첨하면서 신의롭지 못함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心).” 라는 예기(禮記)의 글귀를 새겨 넣었습니다. 영조는 초기에 채제공 등 일부 남인과 소론을 등용해 대탕평을 도모했으나, 말기 들어 장인 홍봉한과 그의 일가 등 척족들을 중용했습니다. 이는 사도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고는 하나, 탕평책을 무색하게 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영조는 15세에 불과한 어린 사도세자에게 정치경험을 쌓게 하고자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사도세자가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영조가 등용한 외척들이 권세를 부렸습니다. 사도세자는 이 외척들을 눈에 띄게 미워했고, 그들과의 사이도 차츰 벌어졌습니다. 영조는 채제공의 만류로 세자 폐위 분부를 거두어들였으나, 세자의 비행이 계속 고발되자 사도세자를 불러들여 직접 문초를 해 죄를 추궁했습니다.
사도세자의 밝혀진 죄상은 1761년 부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평안도로 여행을 떠나 3개월 동안 머물다 돌아온 것, 여러 사람을 죽인 것, 비구니를 궁 안으로 불러들인 것, 사전 상인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않은 것 등이었습니다. 영조는 1762년 사도세자에게 자살을 권유했다가 끝내는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의 산물이라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위에서 열거한 세자의 비행이 죽임을 당할 만큼 큰 것이었는 가입니다. 그 정도 죄라면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저지른 죄보다 크게 중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세자 자리에서 폐위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내쳐도 충분했을 것인데 사도세자를 죽였습니다. 둘째, 사도세자가 소론과 남인 등과 밀착하여 지내다 외척 홍봉한과 노론 홍계희의 음모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폐세자 이선을 사후에 “사모하고 추모한다”는 뜻을 붙여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부르는 등 부왕 영조도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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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용주사(龍珠寺)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수원의 오목천역에서 용주사까지 황구지천을 따라 걸었습니다. 15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용주사는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의 휴일이어서인지 들고 나는 사람들로 조금 붐볐습니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854년)에 갈양사로 창건된 천년고찰입니다. 고려의 광종임금은 갈양사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수륙도량이라 칭하고 이 절에서 최초의 수륙재를 봉행했다고 합니다. 1790년 조선 국왕 정조는 고려 때 잦은 병란으로 소실된 이 절의 빈터에 절을 다시 짓고, 경기도 양주의 배봉산에 묻힌 사도세자의 묘를 이 절과 멀지 않은 화산으로 옮겨와 현륭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으로 천장했습니다. 정조가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꾼 꿈에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용주사라 불리는 이 절에 다른 절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홍살문이 세워진 것은 이 절이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願刹)로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의 위패를 모시는 능침사찰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생각보다 단청색이 선명한 사천왕문을 지나자 홍살문이 보였습니다. 길 왼쪽의 효행박물관은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하고 곧바로 삼문(三門)에 다가섰습니다. 좌우에 행랑이 붙어 있는 중앙의 맞배지붕 건물 아래에 3개의 문이 나 있었는데, 중앙의 문은 닫혀 있고 양 옆의 2개의 문만 열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3개의 문이 나있는 것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궁궐의 양식이라 합니다. 삼문을 지나자마자 2층 누각의 천보루와 그 앞쪽의 5층석탑의 전면(前面)을 사진 찍은 것은 위층의 누각을 받쳐주는 아래층의 석조기둥에서 느껴지는 단순미와 정교해 보이는 5층석탑에서 감지되는 세련미가 잘 대비되어서였습니다. 천보루를 밑으로 지나 마당에 올라서 바라본 대웅보전은 이 가람의 중심으로, 그 안에 중앙의 석가여래와 양 옆 협시불인 동방의 약사여래와 서방의 아미타여래 등 삼불이 모셔졌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융 · 건릉을 들를 뜻에서 서두르느라 대웅보전 안에 봉안된 삼세여래후불탱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웅보전 뒤편의 호성전과 지장전, 그리고 이 절의 맨(?) 뒤편에 자리한 전강대종사탑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가 융 · 건릉으로 향했습니다.
제 고향 파주에도 원찰이 있습니다. 영조대왕의 생모 최숙빈의 묘지인 소녕원이 자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광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고향 집에서 가까워 초등학교 때 몇 번 소풍을 갔던 곳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보광사가 최숙빈을 기리는 원찰이라 하는데, 보광사에서 홍살문을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영조가 소녕원을 왕릉으로 승격시키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묘가 원으로 바뀐 것은 화산으로 천장한 정조 때였고, 왕릉으로 승격된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고 몇 년이 지나서입니다.
2. 융릉(隆陵)과 건릉(健陵)
용주사에서 약 2Km를 걸어 융 · 건릉입구에 다다른 것은 16시20분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역사문화관(관리소)에서 받아 든 안내 전단 「화성 융릉과 건릉」을 일별한 후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1)융릉(隆陵)
관리소를 지나 오른 쪽에 자리한 융릉(隆陵)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융릉은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사후 현경황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를 모시는 왕릉입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사도세자의 유해를 양주의 배봉산에 묻고 묘지를 수은묘라 하였습니다.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높여 부른 것은 정조가 한 일이고, 영우원을 높여 융릉으로 승격시킨 것은 고종이 한 일입니다.
재실을 막 지나 다다른 사거리에서 흙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융릉이 보였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왼쪽으로 수복방이, 정면에 정자각이, 그 뒤편으로 왕릉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여느 왕릉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자각을 조금 비껴 그 오른 쪽의 비각으로 다가가자 조금 높은 언덕에 자리한 묘지가 잘 보였습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의 왕릉을 보전하기 위해 정자각 바로 뒤에 목책이 쳐져 있어 올라가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봉분과 문석인과 무석인, 그리고 장명등을 올려다보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용주사와 달리 내방객이 별로 없어 텅 비어보이는 왕릉이 더욱 넓게 느껴졌습니다. 하얀 눈이 살짝 덮인 정자각 앞과 눈이 다 녹아 황갈색의 잔디가 석양을 받아 더욱 돋보이는 정자각 뒤편의 묘역이 선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저 봉분에 묻혀 있는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홍씨도 새해 첫 날에 융릉을 찾아온 몇 쌍의 젊은 연인들을 보고 살아생전 애틋하게 사랑을 나눴을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흐뭇해했을 것 같습니다.
2)건릉(健陵)
융릉을 돌아보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 서쪽편의 건릉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건릉으로 가는 길의 야산은 온 산이 희었습니다. 햇살이 약해지면서 어둠이 내려앉는 것이 감지되자 건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건릉은 조선22대 정조와 효의황후의 왕릉입니다. 정조(正祖, 1752-1800)는 사도세자와 헤경국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영조35년인 175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영조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1775년(영조51년)에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보기도 했습니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1800년 붕어하기까지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해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으며, 규장각을 두어 학문진흥에 힘썼고,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수원 화성을 건축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고 안내 전단 『화성 융릉과 건릉』에 소개되었습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뜨자 융릉 동쪽 언덕에 건릉을 조성하였고, 1821년에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나 건릉에 함께 모시려 했는데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건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동쪽의 융릉을 보고 온 터라 건릉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홍살문과 정자각, 수복방과 비각, 그리고 정자가 뒤편 언덕에 자리한 봉분 등이 눈에 익다 했는데 융릉에서 보았던 병풍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안내전단을 다시 읽어 본즉, 효의황후와 합장하려고 건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길 때 문석인과 무석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 등은 그대로 옮겨 사용했지만,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른 것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입구 쪽으로 되돌아가 역사문화관을 들러 정조와 정조의 가계도 등을 살펴본 후 입구의 「조선 왕릉 세계유산」 기념비를 사진 찍는 것으로써 사도세자에 관한 역사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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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헌륭원(지금의 융릉)에 여러 번 거둥했습니다. 역사문화관의 전시물에 따르면 정조가 융릉을 찾아간 것은 모두 12회였습니다.
정조가 융릉을 찾아 가는 헌륭원 거둥길은 세 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길은 헌륭원천장길입니다. 이 길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의 영우원에서 화산의 헌륭원으로 옮길 때 걸은 길입니다. 뚝섬에 놓은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과천 행궁을 지나 화성에 도착했던 이 길을 정조는 두 번 걸었습니다. 두 번째 길은 과천행궁경유원행길입니다.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고 한강을 건넌 후 과천행궁을 경유해 화성에 도착했던 길로 정조는 다섯 번 이 길을 걸었습니다. 세 번째 길은 시흥행궁경유원행길입니다. 이 길은 어머니인 헤경궁홍씨를 모시고 다닌 길로 시흥행궁을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정조는 다섯 번 이 길을 걸어 헌륭원을 찾아 갔습니다.
45년 전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 재직 중일 때 정조의 능행차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 행사는 수원시에서 개최한 화홍문화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정조가 헌륭원으로 거둥하는 길에 수원을 지나는 행렬을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를 주관한 동료선생님의 요청으로 저의 반 학생들을 인솔해 북문에서 남문까지 행진했었습니다.
정조의 헌륭원 거둥은 화성행궁이 자리했던 오늘의 수원을 효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데 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정조의 효심은 헌륭원 거둥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수도를 한양에서 오늘의 수원인 화성으로 천도할 뜻도 있었다고 합니다. 축성 후 단 한 번도 전쟁에 쓰이지 않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느라 큰돈을 쓴 것은 지금 돌아보면 낭비임에 틀림없지만, 천도를 염두에 두었을 정조는 수원화성의 축성을 바로 도성을 쌓는 일이하며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정조가 선정을 펼쳤다고는 하나 백성들이 살 만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학정으로 원지에 사는 백성들이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는 1792년 북청부사로 있던 성대중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갑민가」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갑민은 원래 서울의 문벌 좋은 집안 출신으로 변지로 쫓겨나 향직도 빼앗기고 서민으로 몰락한 사람들을 이릅니다.
윤덕진 · 손종흠 두 교수는 저서 『고전시가강독』에 「갑민가」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습니다.
“신역을 물려고 채삼과 사냥 나가서 겪는 고초를 실감나게 제시한다. 산삼을 캐어 왔으나 관에서는 신역을 돈피 외에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다시 돈피를 사러 간 새에 아내는 관가에 끌려가 옥 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노부모는 기절하고 아이들은 울부짖는 참상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고을(북청)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말한다. 그리고 결사를 통해 본사에서 제시한 갑산고을의 학정을 재확인한다.”
갑산고을의 학정을 고발한 가사 「갑민가」는 정조가 재위 중에 지어졌습니다.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는데 들인 거금을 백성들의 구휼에 쓰고 실학의 장려와 실천을 위해 사용했다면 아들 순조가 나라를 다스리느라 겪은 어려움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탐방사진>
1)용주사
2)융릉
3)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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