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2. 6. 11일
*탐방지 : 충북옥천 소재 육영수생가, 옥천향교 및 정지용문학관
*동행 : 나 홀로
금강을 따라 걸으며 자주 들른 지방도시는 전북의 무주, 충북의 영동과 옥천입니다. 세 도시 중에 가장 많이 들른 도시는 옥천으로 이번이 여섯 번째입니다. 다음번에는 대전역에서 하차해야해 금강을 따라 걷기 위해 옥천을 찾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웬만하면 강 따라 걷는 길에 지방도시의 인근 명소를 둘러보고자 하는 것은 우정 다시 찾아가는데 따른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무주에서는 인근의 최북미술관/김환태문학관을 찾아갔고, 영동에서는 황간의 월류정을 다녀왔으며, 이번에는 옥천 구읍 지역의 육영수여사생가와 옥천향교, 그리고 시인 정지용문학관을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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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옥천 구읍의 '육영수 생가'로 향했습니다. 꽤 큰 규모의 고택인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둘러보고 시인 정지용선생의 생가로 가는 길에 '옥천향교'를 들렀습니다. 옥천향교를 일별한 후 정지용선생의 생가를 찾아가 문학관도 둘러보았습니다. 2시간 가까이 세 곳의 순방을 마친 후 금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1.육영수 생가
제가 육영수여사를 직접 뵌 것은 딱 한번 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박정희대통령의 영부인인 여사께서 1971년5월15일 저녁에 큰 따님 박근혜양을 데리고 대통령과 영부인 두 분이 건물과 이름을 지어주신 서울대의 종합기숙사인 정영사(正英舍)를 내방하셨습니다. 그 때는 여사께서 정영사의 개소기념일인 5월15일에 내방하셔서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사생들을 격려해주시곤 했습니다.
1971년 5월이면 부군이신 박정희대통령이 3선개헌 후 치른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 승리한 직후여서, 대다수의 사생들이 여사의 내방을 반기지 않았으며, 당시 4학년생이었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사와의 저녁식사에 모두가 불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 사생의 반(?)만 참석하기로 했는데, 저는 참가 조에 속해 저녁식사에 참석했고, 그래서 가까이에서 여사를 뵐 수 있었습니다. 여사를 직접 뵙고 나서 참석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여사의 자태가 참으로 단아해 국모로서 손색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인자하셔서 박대통령은 처복이 참 많으신 분이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저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1979년 서거하신지 한참 후였지만,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는 그 때 한 번 뵙고 바로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사께서는 1974년8월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저격범 문세광의 총격을 받고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날 모친께서는 자비로운 국모께서 대통령을 대신해 세상을 뜨셨다며 눈물을 보이셨는데, 저 또한 생전에 뵙던 일이 생각나 애도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여사의 생가를 찾아간 것은 단아하신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충북기념물제123호로 지정된 '육영수생가'는 대로 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사께서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육영수생가'는 1918년 부친이신 육종관씨가 매입하여 개축한 것으로, 1999년 철거되었다가 2010년 복원공사를 완료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중문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사랑채의 대청에 걸린 초상화 속의 여사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사랑채 오른 쪽 연못에는 수련이 보였는데 아직은 수면을 다 덮지는 않았습니다. ‘ㄷ’자형의 안채 중 육영수여사가 기거한 뒷방은 책상 하나 넣고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정도로 작았습니다. 안채 왼쪽으로 연자방아와 뒤주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의 규모는 꽤 컸던 것 같습니다. 제 눈을 끈 것은 마루에 전시된 사진들이었습니다. 결혼식 사진과 약혼식사진, 가족들과 윷놀이하는 사진과 군부대시찰 사진 등 전시된 사진 모두가 흑백사진으로, 두 분을 함께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장독간 위에 들어선 대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렀고, 넓은 후원의 단출한 정자를 보자 넉넉하면서도 화려함을 쫓지 않는 절제가 읽혀졌습니다. 명문가의 저택이라 해도 너무 큰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저택 곳곳에서 절제가 느껴져 육씨가문은 과연 명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925년 이곳에서 태어난 여사께서는 1938년 옥천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서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하셨고 1950년 박대통령과 결혼했습니다. 1963년12월 영부인이 되신 후 1974년 8월 유명을 달리 할 때까지 여사께서는 영부인으로써 내조에 힘쓴 것은 물론하고, 청와대 안의 야당역할도 훌륭히 해내신 것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2.옥천 향교
육영수생가의 탐방을 마치고 '정지용문학관'으로 이동하는 길에 홍살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저 만치 앞에 높은 건물이 보여 무언가하고 찾아가본즉 '옥천향교'였습니다.
향교란 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지방의 교육을 맡았던 곳입니다. 서원이 오늘날의 대학교라면 향교는 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으로 규모도 서원보다 작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교의 배치는 앞 쪽으로 교육장소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중간의 내삼문 뒤 쪽으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인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태조 7년(1398)에 창건된 '옥천향교'는 강당인 명륜당이 뒤늦게 세워져 세종22년(1440)에야 준공되었으며, 지금 보고 있는 향교의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한 것이라 합니다. 계단을 올라가 만난 명륜당은 2층 건물이었는데, 아래층에 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2층만 교육장소로 쓰인 것 같습니다. 명륜당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학생들의 거처인 홍도당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 내삼문은 굳게 닫혀 있어 안쪽의 대성전은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담 밖에서 발돋움을 하고 대성전을 사진찍어, 안내판의 배치도와 같이 문묘인 대성전 양 옆으로 동무와 서무가 들어선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기 '옥천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모시고 그 양편에 안회, 증자, 자사, 맹자 등의 사성과 우리나라 18명 성현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고 합니다.
향교가 들어선 지대가 높아 골목길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이 저만치 보였습니다.
3. 정지용문학관
옥천향교를 출발해 '정지용문학관'에 이르기까지 10분 남짓 걸렸습니다. 사립문을 지나 정지용선생의 생가로 들어서자 정면3칸과 측면3칸의 초가집 두 채가 보였습니다. 나지막한 돌담에 볏짚으로 지붕을 씌운 것은 제 고향 파주에서 보지 못해 사진을 찍었 습니다.
선생의 생가가 초가집으로 시골의 풍취를 물씬 풍겼다면, '정지용문학관'은 양옥건물로 생가보다 훨씬 모던해보였습니다. '정지용문학관'에서 가장 제 눈을 끈 것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생의 조각상이었습니다. 검정색의 두루마리와 흰색의 깃이 잘 대비되었고, 안경을 끼고 정면을 응시하는 선생의 모습은 말수가 적고 이지적으로 보여. ‘향수’ 같은 향토색 짙은 구수한 시를 선생께서 지었으리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동상이 너무 좁은 뜰에 들어서 있어, 선생께서 답답해 하실 것 같았습니다.
'정지용문학관'은 문학전시실 및 영상실과 문학교실로 짜여져 있습니다. 문학전시실에서는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가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정지용 시집』 , 『백록담』 , 『지용시선』, 『문학독본』 과 『산문』 등 선생의 시와 산문집 원본이 전시된 곳이 바로 문학전시실입니다. 영상실은 선생의 삶과 문학, 인간미등을 서정적이며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타리 형식의 영상이 상영되는 곳인데 금강 따라 걷기로 시간여유가 없어 영상실을 들르지 못했습니다. 정지용문학관이 시끌벅적한 것은 여성문학도들이 많이 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배치된 문학교실은 강좌, 시, 토론, 문학 동아리의 공간이며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 열린 문학공간입니다.
정지용선생은 청록파 시인 박두진, 박목월과 조지훈 님을 배출한 분입니다. 소월 김정식선생과 동년배이지만, 문단에 늦게 등단해 많은 사람들이 정지용 선생께서 소월선생보다 한참 나이가 적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소월선생의 시가 향토적이고 서정적이라면 정지용 선생의 시는 보다 모던하고 이지적인 느낌이 듭니다. 노래로 작곡되어 널리 애송되는 시 <향수>는 선생의 많은 시들과 많이 다르다 싶은 시입니다.
정지용선생의 일생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납북되어 갔으나, 자진월북으로 오해를 받아 선생의 시집은 꽤 오랫동안 금서로 지정되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에야 비로소 금서목록에서 해금되어 마음 편히 선생의 시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생의 시 중에는 1939년4월에 발간된 『文章』 3호에 실린 「白鹿潭」이 있습니다.
<白鹿潭>
1.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境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2. 嚴古蘭, 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울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白樺 옆에서 白樺가 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4. 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海拔六千呎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百里를 돌아 西歸浦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山客을 보고도 마고 매여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色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것을 나는 울었다.
7. 風蘭이 풍기는 香氣,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濟州회파람새 회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년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耳 별과 같은 방울을 담은 高山植物을 색이며 醉하며 자며 한다. 白鹿潭 조찰한 물을 그리며 山脈우에서 짓는 行列이 구름보다 莊嚴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에도 白鹿潭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더니라. (『文章』 3호, 1939. 4월)
위 시는 정지용선생이 휘문고 동문인 김영랑 시인과 함께 1938년 8월에 한라산을 오른 후 지은 것입니다. 이성부 시인은 백두대간 종주의 전 과정을 두 권의 시집 『지리산』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에 그려냈으나, 이는 여러 편의 시로 여러 산의 등정을 담은 것입니다. 한편의 시로 하나의 산을 오르는 등정과정을 「백록담」처럼 핍진하게 묘사한 시를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백록담」은 등정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느라 산문시로 쓰여 압축미는 덜 느껴집니다. 시 「白鹿潭」은 정상을 오르면서 정신적 승리를 즐기는 선생의 적극적인 산수관을 엿볼 수 있는 빼어난 시라 하겠습니다.
1969년7월 저는 관음사를 출발해 한라산 정상을 오른 후 백록담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야영한 후 서귀포로 하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백록담에서 연못(?) 물과 여러 마리의 소들이 노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백록담의 물은 시 「白鹿潭」」의 내용과는 달리 결코 맑지 않았으니, 방목한 소들이 살고 있어 그러했을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라산을 오른 1938년에도 소들을 백록담에다 방목했는지는 시 「白鹿潭」만으로는 확인하기 쉽지않습니다. 소가 서귀포 쪽으로 달아났다는 것도 그렇고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는 문구만 본다면 과연 백록담에 소를 방목했나 의문이 가기도 합니다. 한라산의 백록담은 백두산의 천지와 달라 수량도 적고 사방이 꽉 막혀 증발되거나 땅 밑으로 스며드는 것 외에는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어 선생이 묘사한 대로 백록담의 물이 과연 맑았는지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선생께서 백록담으로로 내려가지 않고 정상에서 내려다보았다면 물의 색깔을 판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탐방사진>
1.육영수생가
2.옥천향교
3.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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