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39. 안동명소 탐방기4(고산정)

시인마뇽 2024. 7. 29. 23:55

탐방일: 20231030(월요일)

탐방지: 안동시도산면가송리 소재 고산정(孤山亭)

동행   : 나 홀로

 

 

  이 땅의 하천을 따라 걷노라면 자연경관이 빼어난 승지(勝地)에 자리한 누정(樓亭)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누정이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식으로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만든 건축물로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입니다. 넓은 의미로 누정에는 누()와 정()뿐만 아니라 당() · () · () · () 등이 포함됩니다.

 

  누각은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혹은 흙으로 쌓아 올린 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누각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정자는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있습니다. 누정은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경관이 뛰어난 자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어 주로 사대부들의 교유와 휴식공간으로 이용됐습니다.

 

  한두 칸의 방이 딸려 있는 누정은 영산강을 따라 걸을 때 담양의 송강정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강학소(講學所)나 재실(齋室)로 쓰고 자는 방을 두는 누정도 그 구조가 마루를 위주로 되어있는 것은 누정의 주 기능이 강학보다는 자연경관을 완상하며 휴식을 취하는 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정이 사대부들의 독점물이라면 모정(茅亭)은 농경지를 배경으로 터 잡고 있어 주로 현지의 농민들이 쉬어가는 휴식처입니다. 모정에서 편액이나 현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사대부들이 찾는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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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군에서 안동시로 들어선 후 1시간 반 가량 낙동강 우안의 35번 도로를 따라 걸어 안동시도산면의 가송리마을 입구인 소두들버스정류장에 다다랐습니다. 이 정류장에서 안동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려면 2시간가량 기다려야 해, 그 사이 고산정(孤山亭)을 다녀왔습니다. 소두들정류장을 출발해 가송정류장을 지나자 강 건너 깎아지른 암벽 아래 다소곳하게 자리한 고산정이 보였습니다. 세월교를 건너 6m 가량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고산정에 다다르자 주변 풍광이 빼어나 들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고산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명종 19년인 1594년에 가송협(佳松峽)의 단애(斷崖) 아래에 지은 정자입니다. 이 정자 뒤쪽으로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건너편에는 송림과 독산(獨山)이 솟아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납니다. 가송협은 청량산의 계곡물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낙동강이 가송리에 이르러 만난 양안의 산들과 어우러져 빚어낸 승경으로 안동팔경의 한 곳이기도 합니다.

 

  고산정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 글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고산정은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고산정은 자연석으로 축대를 높게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다. 주두(柱頭)의 상부에는 보아지를 끼웠으나 외부에는 초각(草刻)을 하지 않고 내부에만 초각을 하였다. 가구(架構)5량가(五樑架)인데 종량(宗樑) 위에는 키 큰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여기에 소로(小累)를 끼워 장여(長舌)와  창방(昌枋, 대청 위의 장여 밑에 단 도리 )을 받게 하였으며, 좌측 마루 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귀에는 선자연(扇子椽, 부채살같이 댄 서까래 )을 걸었다. 평면은 가운데 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 · 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좌측방은 통으로 틔워 한 칸으로 하였으나 좌측 방은 뒤쪽의 1칸 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마루는 ㄱ자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자각 (鷄子脚) 난간(欄干)을 둘렀는데 정자로의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다.”

 

  이 정자는 온돌방이 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잠시 들러 풍광만 즐기려고 지은 것은 아니고, 오래 묵으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수양을 쌓을 뜻에서 지은 것 같습니다.

 

  고산정을 지은 금난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습니다. 본관인 봉화에서 출생한 선생은 김진(金進)에게 글을 배운 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했습니다. 선생은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제릉(齊陵)의 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集慶殿)과 경릉(敬陵)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가 되었습니다. 그 뒤 직장(直長)과 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많은 선비들은 이에 호응해 의병으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일하다가 1년 만에 사임하고 야인으로 돌아갔습니다. 금난수는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으며, 저서 성재집(惺齋集)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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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문을 즐겨 짓는 사대부들이 누정에 모여 친교를 나누고 풍류를 즐기면서 남겨 놓은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이른바 누정문학을 대표하는 누정제영들은 대개는 한시들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

 

  평소 제자 금난수(琴蘭秀)를 아낀 퇴계 이황은 고산정을 자주 찾아와 강줄기와 협곡의 빼어난 경관을 즐기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아래 시 ⌜ 서고산벽 (書孤山壁)은 퇴계 이황이 창작한 누정제영으로 고산정에 걸려 있습니다.

 

日洞主人琴氏子 일동 주인 금씨를 한 번 만나 보려고

隔水呼問今在否 강 건너에서 지금 계시는지 물어보네

耕夫揮手語不聞 농부는 손을 저어 들리지 않는다 하니

悵望雲山獨坐久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네

 

  안동의 젖줄인 낙동강 본류에 설정한 도산구곡(陶山九谷)은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퇴계 이황이 학문하고 사색하며 거닐던 굽이입니다. 도산구곡이 언제 누구에 의해 설정됐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도산구곡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라고 합니다.

 

  ⌜도산구곡(陶山九曲)은 도산구곡(陶山九谷)을 노래한 한시로, 고산정을 노래한 고산곡(孤山曲) 외에 운암사곡, 월천곡, 오담곡, 분천곡, 탁영담곡, 천사곡, 단사곡, 청량곡 등 9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산구곡(陶山九曲)이 본격적으로 창작된 것이 18세기 말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이 시를 퇴계 이황이 짓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최석기교수는 논문 도산구곡정립(陶山九曲定立)과 도산구곡시(陶山九曲詩) 창작배경에서 도산구곡(陶山九谷)은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1800년 처음으로 설정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이야순은 도산구곡(陶山九曲)의 제8곡인 고산곡(孤山曲)’에서 낙동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인 고산곡의 아름다움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八曲山孤玉鏡開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

惺惺心法此沿洄 또렷또렷한 심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

停歌爲向蒼厓問 멈추어 노래하다 푸른 절벽 향해 묻노니

能記題詩杖屨來 지팡이 짚고 시 지어 노닐던 분 기억하는가

 

  고산정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직접 와서 보니 과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찍고도 남을 만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