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 2024년5월1일(수)
탐방지: 경북예천군풍양면우망리 소재 쌍절암
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경북 예천의 쌍절암(雙節岩)을 들렀습니다. 쌍절암은 임진왜란 당시 이 지방 사대부인 정영후(鄭榮後)의 부인과 오누이가 정절을 지키고자 왜적을 피해 낙동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곳입니다.
정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택한 것은 고려의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고려의 여인이 조선의 여인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고려의 여인은 경제권을 가지고 있어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유지된 것은 조선 전기까지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와 인종적민족주의파 등 5개 유형으로 분류한 함재봉교수는 저서 『한국사람 만들기 I』에서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 이후 조선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주자성리학 근본주의는 조선 여성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격하시켰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선의 여인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 것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병자호란 중 강화도가 함락되자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끊은 여인들이 하도 많아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 라는 이야기가 떠돌 았습니다. 정작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조정의 중신들이나 사대부들은 목숨을 끊지 않았는데, 애꿎게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여인들이 죽음을 택한 것은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가 조선의 여인들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도 불사하라는 묵시적 강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의 사대부들은 “환향남(還鄕南)”이라며 비하하지 않으면서, 조선의 여인들에게는 ‘환향녀(還鄕女)’라며 멸시한 것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효종의 장인인 장유(張維, 1587-1638)는 병자호란이 끝나자 “외아들 장선징(張善澄)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이에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만일 속환녀들을 시집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누가 돌아오려고 노력하겠는가?” 라고 물으면서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정절을 지키려고 목숨을 끊었고 포로로 잡혀가서도 정절을 끝까지 지킨 경우가 많은데, 확인할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씌워 모두 이혼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 라면서 따졌습니다. 인조 임금은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고 장유의 아들이 한이점의 딸과 이혼하는 것을 불허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실제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실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사회에서 ‘환향녀(還鄕女)’인식은 더욱 강화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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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예천군풍양면에 자리한 낙동강 좌안의 청감제 제방이 끝나는 곳에서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곳에서 삼강주막에 이르기까지 낙동강변을 따라 데크 길이 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도에는 이 길이 나와 있지 않아 산길로 이 더위에 대동산을 오르내려야 한다고 걱정했는데, ⌜낙동강쌍절암(삼강주막) 생태숲길⌟로 명명된 잔도가 나 있어 그 길로 질러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낙동강쌍절암(삼강주막) 생태숲길⌟ 길에서 백미는 산 중턱에 자리한 쌍절암입니다. 쌍절암(雙節岩)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 대동산 아래 대대로 이어 살던 동래정씨 19세 사재감 참봉인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부인인 청주한씨와 오누이인 정처녀(鄭處女)가 왜적을 피해 정절을 지킨 곳입니다. 왜적이 침공하자 한씨(韓氏)는 시누이인 정처녀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 정영후에게 " 적병의 분탕과 노략질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을 피하기는 어렵고 중도에서 적병의 손에 죽게 될 터인데 어찌 스스로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순절을 온전히 합만 같으리오"라고 말하고서, 적병이 가까이 오자 깎아지른 듯한 쌍절암에서 천길 절벽 아래 검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켜냈습니다. 조정에서는 조상의 얼이 서린 옛 마을 우망동(憂忘洞) 어귀에 쌍절각(雙節閣)을 세우고 돌을 깎아 그 사연을 새겨 쌍절(雙節)을 현양하였는데, 그 쌍절비명(雙節碑銘)은 대사성이이었던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경성판관 매호 조우인(曺友仁)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잔도에서 40-50m가량 계단을 걸어 다다른 쌍절암 위에 세운 정자 대동정에 올라가 조선의 두 여인이 쌍절암에서 몸을 던져 떨어진 낙동강을 조망했습니다. 제방길을 걸을 때는 풍지교-청곡제-청감제에 이르기까지는 강변의 넓은 습지가 연초록의 무성한 나무들로 가려져 낙동강의 물흐름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쌍절암에서는 시야가 탁 트여 낙동강의 도도한 물흐름이 눈에 잡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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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후의 부인 한씨와 오누이 정처녀처럼 임진왜란 때 강으로 투신해 죽은 조선의 여인으로는 논개(論介)가 있습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왜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에 왜군은 최경회 등 조선군 장수들의 머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도요토미에 보내고 촉석루에서 진주성 승전의 축하잔치를 벌였습니다. 논개는 이 잔치에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밑 바위로 꾀어내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려 의롭게 죽었습니다. 논개의 죽음은 정절만 지킨 것이 아니고 의롭기까지 하여 그녀가 진주 남강으로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장수현감 최경회는 아버지를 여의고 힘들게 사는 논개 모녀를 관아로 데려와 돌봐주다가 첫 아내를 잃고 나서 장성한 논개를 내실로 삼았다 하니 논개를 의기(義妓)라면서 기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논개는 최경회의 정실은 되지 못했지만 해주최씨 족보에 부실로 기록되었다고 하니 기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1923년 시인 변영로는 잡지 『신생활』 3호에 시 「논개」를 발표해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찬양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르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충의와 절개가 저절로 느껴지는 이 시를 처음 읽고 가슴이 뛰었던 것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5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이 시를 다시 읽고 만약에 이런 시가 조선시대에 발표되었다면 절개를 지키라면서 조선의 여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를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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