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42. 상주명소 탐방기2 (경천대)

시인마뇽 2024. 8. 7. 10:22

탐방일: 202459()

탐방지: 경북상주시 소재 경천대 및 무우정

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상주 제1의 관광지인 경천대(擎天臺)를 탐방했습니다. 하늘이 지은 절경이라 하여 자천대(自天臺)라고도 칭해졌던 경천대는 빼어난 경관의 자연과 충신의 입절지(立節地)라는 인문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낙강제일경(洛江第 - )입니다.

 

  경천대(擎天臺)란 경북상주시사벌국면삼덕리에 소재한 무지산 동쪽 자락의 앞을 흐르는 낙동강 좌안의 바위로 된 대()를 이릅니다. 이 대는 대 밑에 기우제 터 우담(雩潭)이 있어 상산(商山)의 신성지로도 알려졌습니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채득기(蔡得沂, 1604~1647) 선생의 호가 우담(雩潭)인 것은 선생께서 여기에 무우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경천대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여생을 보낸 채득기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역학, 천문, 지리, 복서, 음률과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신묘한 침술로 국난(國難)에 특채된 명의(名醫)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상주인 상산(商山)의 무지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심한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천대 옆에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마음에서 강가 대()의 꼭대기에 大明天地 崇禎日月 (대명천지 숭정일월)" 이라는 글을 새긴 비를 세웠고, 그 후 사람들은 자천대를 경천대라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선생은 1637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심양으로 잡혀갈 때 재학지사(才學之士)로 천거되어 왕자들의 몸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그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사양해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1639년 방면되어 재차 부름을 받자 충신연주지사 봉산곡(鳳山曲(일명 天臺別曲)을 짓고 섣달에 심양으로 달려갔습니다. 봉림대군과는 군신 이상의 지기(知己)로서 사생을 같이하며 충분의기(忠憤義氣)를 시로 주고받아 한국 시사(詩史)에 희귀한 시첩(詩帖) 군신언지록(君臣言志綠)도 남기었다고 경천대의 안내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1645년 청나라에서 환국한 선생은 봉림대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천대로 돌아갔습니다. 효종께서 충신이 사는 곳이나마 보고 싶어 화사(畵師)를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 갔을 만큼 임금의 신뢰는 견고하고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이만하면 채득기 선생이 즐겨 오른 경천대는 안내문에 실린 바와 같이 가사문학의 산실이며 충신의 입절지(立節地)요 효종의 은택지(恩澤地)로서 자연과 인문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낙강제일경(洛江第 - )”으로 상찬받을 만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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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같이 서둘러 서울의 경부고속터미널을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상주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9시 반 경 상주터미널에 도착해 10분여 기다렸다가 945분에 시내버스로 환승해 상풍교로 향했습니다. 시골길을 반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물갓매호 정류장에서 하차해 지근거리의 상풍교로 이동했습니다.

 

  1020분 상주시의 사벌국면과 예천군의 풍양면을 이어주는 상풍교를 출발해 낙동강 우안의 제방인 매협제로 들어섰습니다. 6곳의 배수문을 지나 제방길이 끝나는 지점의 삼거리에 다다라 왼쪽의 낙동강강바람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경천대를 1.7Km 앞둔 삼거리에서 시작된 낙동강 강바람길은 산길로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자전거 길을 벗어나 데크 길로 들어섰습니다. 잠시 옥주봉전망대를 들러 이제껏 걸어온 낙동강의 물흐름과 제방길을 조망했습니다. 데크 계단을 지나 해발195m의 무지산 정상에 설치된 3층 건물의 경천대전망대에 올라서자 강 건너 시원스레 펼쳐진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들판은 곡류 안쪽에 토사(土砂) 쌓여 만들어진 충적평야로 반원 모양을 하고 있어 보기에도 아름다웠습니다.

 

  경천대 전망대에서 내려가 낙동강변의 경천대에 올라선 시각은 1240분이었습니다. 경천대에 오르자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어져 흐르는 낙동강과 강변에 곧추서 있는 깎아지른 절벽이 한눈에 잡혀 그 절경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예로부터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빼어나 낙동강의 제1경으로 알려진 이곳은 채득기 선생이 하늘을 떠받친다는 뜻에서 경천대로 이름을 바꿔 짓기까지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 하여 자천대(自天臺)로 불렸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역암(礫巖)이 뚜렷하게 보이는 경천대에서 내려가 바로 아래 홀로 서 있는 정자 무우정(舞雩亭)을 들렀습니다. 채득기 선생이 심양에서 환국한 후 상주로 돌아와 머물었던 이 정자에 한시의 편액이 많이 걸려 있는 것은 이곳에서 낙강시회가 자주 열렸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무우정 앞 소공원에서 점심을 들면서 반 시간 가까이 쉬었습니다. 바로 옆 드라마 상도의 촬영장은 시간이 넉넉지 못해 입구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상주보를 향해 낙동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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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득기 선생이 심양에서 환국해 머문 곳은 무우정입니다. 무우정(舞雩亭)은 선생이 1636년 병자호란을 예견하고 자연에 귀의하려고 지은 정자입니다. 이 정자는  소설 설공찬전』을 창작한 채수(蔡壽, 1449-1515) 선생의 현손인 우담 선생이 국난에 목숨 바쳐 신하의 도리를 다하리라 맹세한 충신연주지사인 봉산곡(鳳山曲, 일명 天臺別曲)을 지은 창작의 산실이요()의 볼모가 되어 망국의 한을 품은 왕자들과 7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 우담선생이 천추에 고절(高節)을 세운 충절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청음 김상헌 · 택당 이식 · 계당 유주목 같은 고매한 문사들이 기문을 지어  강산이 절사(節士) 만나 그 무게를 더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 기록해두고자 하는 것은 후대에 경천대 무우정이 낙강시회(洛江詩會)의 중심이 되어 문향(文鄉) 상주를 전국에 알리는 종루(鐘樓)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우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몇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습니다. 1748년 상주목사 이협이 중건하였고 1948년과 2005년에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듯이 무우정은 앞으로도 뜻 있는 지역민들의 보살핌으로 경천대와 더불어 낙강제일경(洛江第 - )’의 명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참고로 우담 채득기 선생의  가사 작품 <봉산곡( 鳳山曲) >을 아래와 같이 부기합니다. 

 

가노라 玉柱峰아 잇거라 擎天臺

遼陽 萬里 길이 머다야 얼마 믈며

北關 一周年이 오다 하랴마

翔鳳山 別乾坤을 쳐음의 드러올 졔

魯連을 계워 塵世을 아조

발 읍신 동솟 하나 젼나귀의 시러

 

秋風 石逕斜臥龍崗 차자 와셔

天柱峰 巖穴下茅屋 數間 지어 두고

鼓瑟壇 杏花坊亭子 터을 손조 닥가

기돌 읍신 거젹 문과 울 읍신 가시 삽작

寂寞山谷間自作村이 더욱 좃타

生涯分內事淡泊한들 어이하리

大明天地 一片土의 바린 百姓 도야 잇셔

 

松菊을 씨다듬고 猿鶴을 벗졀

어위야 이 江山景槩고 만타

萬丈 金芙蓉半空의 소사올나

龜巖을 압페 두고 鏡湖上의 셧양은

三神山 第一峰六鰲頭의 버럿

紅霞白雲이 곳곳지 근늘이요

琉璃 千萬 景이 빈 여씨니

龍門을 엽페 두고 鶴汀頭의 버러심은

 

八疊 雲母屛玉欄干의 둘너난 닷

明沙白石이 구뷔구뷔 이로다

그 즁의 조흔 거시 무어시 더 나흔이

龜巖이 물을 굽펴 千百 尺이 소올나

雲宵間特立太空을 괴와씨니

어위야 自天臺야 네 일홈이 果然 虛得 아니로다

文章富贍한들 뉘 로 다 써

畵工神妙들 한 붓스로 다 그릴가

 

秋風이 건듯 부러 입입히 불거씨니

물 드린 織女錦鏡面의 거럿 

花香擁鼻百果익어

梅花盆 梔子器黃白菊이 셕겨셔라

空山 子規聲瀟湘竹

平沙 落雁影衡浦夕구난 닷

江心 子夜半玉浮圖을 거러씨니

 

蘇仙赤壁趣을 져 혼자랑할가

天寒 白屋玉屑霏霏

千巖 萬壑中瓊瑤窟이 되엿셔라

蒼髥 丈夫 捧日亭孤節을 구지 가져

石上特立歲寒의 더옥

漁翁이 나을 불너 고기잡이 거날

夕陽을 빗겨 苔磯로 나려가셔

孤舟을 손조 져어 氷網을 거더

 

銀鱗 玉尺마도 걸여셔라

鸞刀을 치고 고기 파라 비진 슐을

깁푼 의 가득 부어 토록 머근 후의

天臺山 爛柯石을 놉피 베고 지여씨니

長松落雪醉眠

蕭索秋冬의도 景物이 이러커든

花月 三春 綠陰夏야 한 입으로 다 이르랴

 

物外 烟霞 조와 富貴 功名 이져씨니

人世上 黃梁은 몃 번이나 익언난고

幽靜門 나졔 다다 人跡쳐씨니

天崩地坼들 그 뉘라셔 할손고

薇蕨을 손됴 石泉의 씨셔 먹고

崇禎 日月 保全軀命이나 라나면

長城 萬里 밧게 白骨이 싸엿신들

이거시 桃源이라 綠髮을 불을손야

 

五絃琴 쥴을 골나 紫芝曲 

비듭밥 풀쥭의 부를風景이야

是非 榮辱 다 더지고 白鷗 偕老럇더니

무삼 才德 잇다 고 나라조차 아라시고

읍신 이 한 몸을 차즈시기 窮極

商山 季冬月瀋陽 가라 부르시니

뉘 일이라 頃刻인들 머물손가

 

君恩感激行裝顚倒

三年 입은 겹즁치막 이불 요 겸엿다

南州 더온 도 치움이 이러커든

北極 窮陰 깁푼 고우리 님 계신 데야

다시곰 바라보고 우리 님

五國 寒月을 뉘 이라 바라시며

異域 風霜을 어이 그리 격그신고

旄邱의 버든 칠기 三年이 되야셔라

 

倒懸이 이러커든 屈膝을 언졔 펼고

漢朝의 사읍셔 犬羊臣이 되야시니

三百年 禮樂 文物 로 가단 말고

오늘날 降虜妾이 다 옛날 觀周賓이라

堯天久閑宋日이 잠겨시니

東海水 어이 둘너 이 羞辱 련가

吳宮의 셥흘 싹코 越山의 씨단이

主辱臣當死古今常經이라

 

하물며 우리 집이 世世 國恩 오니

아모리 溝壑인들 大義을 이질손가

平生의 어린 계교 旣倒狂瀾 마그랴

조 읍신 몸이 大厦將傾 어이

안의셔 눈물 兒女子態度로다

怨讐 못 갑푸면 어面目 다시 들

岳手의 춤을 밧고 祖楫盟誓

몸의 쥭음 一鴻毛의 빗겨 두고

 

東西南北 萬里 밧게 을 좃단이리라

닛거라 가노라 가노라 잇거라

無情白鷗더른 盟誓 期約 웃건마

이 하 罔極시니 갑고 다시 도라오오리라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