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44. 의성명소 탐방기1(관수루)

시인마뇽 2024. 8. 10. 20:02

탐방일: 2024521()

탐방지: 경북의성군단밀면낙정리 소재 관수루

동행    : 나 홀로

 

 

  경상북도 의성 땅은 올해 들어서야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처음 밟아 보았습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의성군의 117면 중 낙동강의 본류와 만나는 읍면은 서쪽의 다인면과 단밀면뿐입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의성 땅을 밟은 것은 지난달 풍지교를 건너 삼강합수점으로 가는 길에 다인면을 살짝 지났고, 이번에 낙단보를 건너 낙동강의성휴게소로 이동하는 길에 단밀면을 지난 것이 전부입니다.

 

  의성 땅에 세워진 최초의 나라는 삼한 시대에 세워진 조문국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성현은 본래 조문국인데 신라가 취했다. 경덕왕이 문소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의성부로 승격하여 현종 9(1018) 안동부에 내속되었다.“ 라고 쓰인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문소군이 의성부로 승격된 것은 문소군의 성주가 견훤 군을 막다가 전사하자 이를 기리기 위해 문소군을 의로운 고장이라며 의성(義城)이라 부르면서부터였습니다. 의성부가 의성군으로 개편된 후, 오늘의 117면으로 행정구역이 확정된 것은 1990년의 일입니다.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한 의성군은 북쪽의 안동시, 동쪽의 청송군, 서쪽의 구미시, 상주시와 예천군, 남쪽의 대구시와 군위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의성군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1지천인 위천이 의성군내를 관통하여 본류인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만들어진 충적평야가 꽤 넓습니다. 의성군 서부의 안계평야는 경주의 안강평야, 영천의 금호평야와 함께 경북에서 손꼽히는 넓은 평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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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의 강창교를 건너 좌안의 제방길로 낙동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낙암서원을 지나 중동교를 건넌 다음 낙동강 우안 길을 따라 걸어 낙단보에 이르렀습니다. 낙단보를 건너 낙동강 좌안의 언덕에 자리한 관수루에 다다른 시각은 1630분 경입니다.

 

  의성의 명소 괸수루(觀水樓)가 태백산, 일월산과 팔공산의 세 산과 낙동강과 위수강의 두 강 등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정령기맥(精靈氣脈)이 모여드는 낙동강 연변의 층암절벽에 세워진 것은 고려 중엽의 일입니다. 동서남북을 왕래하는 큰 길목에 자리한 관수루는 원래 위치가 낙동강 서안(西岸)이었는데, 조선 초엽 수해를 입어 오늘의 자리인 낙동강 동안(東岸)으로 이건(移建)되었습니다. 관수루는 서안에서 동안으로 이전된 후 몇 차례 중수 또는 중건을 거치면서 유지되어 오다가 1874년에 유실되어 한동안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1990년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오늘의 관수루로 복원했다고 의성군수 명의의 관수루연혁기안내문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관수루가 위치한 의성군 단밀면은 조선시대 내내 상주의 관할구역었다가 1907년 상주군에서 비안군으로 옮겨진 후 1914년 비안군에서 의성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언덕 위에 자리한 2층 누각의 관수루(觀水樓)에 올라가 이 정자의 이름이 뜻하는 '강물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겼습니다. 누대에 오르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강 건너 넓은 벌이 조망되었습니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낙단교를 조망하며 다리 아래 자리했던 낙정나루터의 위치를 어림짐작해보았습니다.  낙정나루는 1986년 낙단교가 개통되고 도선 운행이 종료되자  폐쇄되었습니다.

 

  일명 낙동나루로도 불렸던 낙정나루는 낙동강에서 가장 큰 나루터로, 부산의 구포에서 세곡(稅穀)을 싣고 강을 따라 올라온 배들이 이 나루에서 짐들을 하역했습니다. 이 나루에서 하역한 세곡은 낙정리의 창고 가흥창으로 옮겨졌다가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영남의 유생들은 과거 보러 갈 때 대부분 죽 미끄러진다는 죽령이나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을 피해 문경새재로 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배를 타고 오가는 선비들이 많았고 하역하는 짐도 많아 낙정나루는 항상 붐볐다고 합니다관수루에서 내려가  낙동강좌안의 낙단교 아래  낙정나루터로 보이는 강가의 한 곳을 사진을 찍어  다행이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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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수루에 걸려 있는 한시(漢詩)의 편액(扁額)을 보고 고려의 이규보, 조선의 김종직, 김일손, 이황 등 뛰어난 문신들이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았습니다. 이들 선비들이 관수루를 다녀간 것은 옛 상주의 선비들이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경천대-도남서원-관수루 구간을 오르내리며 뱃놀이를 하면서 개최한 시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선비들이 뜻을 같이 하는 지기들과 즐기는 여락(與樂)의 풍류는 시회(詩會)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선비들은 풍광이 빼어난 자연 속에서 뜻을 같이하는 지기들과 시회를 열고 시를 지었습니다. 대체로 시회는 누정에서 열었지만, 강이 흐르는 지역에서는 놀잇배, 즉 유선(遊船)을 띄워 열기도 했습니다.

 

시회는 누정에서  열리는 누정시회(樓亭詩會)와 놀잇배에서 열리는 선유시회(船遊詩會)로 나뉩니다. 조선시대 누정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집중된 것은 두 지방에 유림들이 많아서였습니다. 1929년 이병연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누정조에 따르면 누정이 강원도에 174개소, 충청도에 219개소가 있었는데 경상도는 1,295개소, 전라도에는 1070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제껏 몰랐던 것은 낙강시회(洛江詩會)입니다. 낙강시회는 낙동강에 배를 띄워놓고 열었던 선유시회를 말합니다.  이는 경천대에서 관수루까지 강물이 깊어 배를 띄울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낙동강을 기반으로 하는 선유시회인 낙강시회는 고려 중기 내로라하는 문인인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1168-1241)1196년  낙동강시(洛東江詩)를 창작한 시회(詩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낙강시회는 1862년 계당(溪堂) 류주목(柳騎睦)의 시회까지 666년 동안 52회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낙강시회로 알려진 상산선유시회(商山船遊詩會)상주의 제1경으로 알려진 경천대(擎天臺)에서 도남서원(道南書院)을 거쳐 관수루(觀水機) 에 이르는 30여 리의 구간에서 시행되었고, 1607년부터 1778년까지 171년 동안 총 8, 1663년부터 1798년까지 135년 동안 총 18회에 걸쳐 지속되었다.” 라고 정우락 교수는 논고 조선조 선비들의 여가와 풍류에서 밝혔습니다.

 

  이규보가 낙동강 상류를 지나며 지은 한시의 편액이 관수루에 걸려 있어 엄청 반가웠습니다. 이 시가 낙강시회에서 발표된 것인지는 확인해 볼 뜻입니다.

 

過洛東江上流 낙동강 상류를 지나며

百轉靑山裏 청산 속 백번 돌아

閒行過洛東 한가로이 낙동강 지나도다

草深猶有露 숲은 깊고 아직 이슬에 젖어있는데

松靜自無風 소나무 고요해 바람 한점 없도다

秋水鴨頭綠 가을 강물 오리머리처럼 푸르고

曉霞猩血紅 새벽 하늘 성성이 피처럼 붉도다

誰知倦遊客 누가 피곤해 하는 나그네를 알리오

四海一詩翁 온 세상 떠도는 늙은 시인인 줄을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