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 2023년12월16일(금)
탐방지: 경북안동시도산면동부리 소재 월천서당
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안동의 월천서당(月川書堂)을 다녀왔습니다.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조선중기의 문인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이 1539년(중종 34)에 건립하여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던 서당으로 1982년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입니다. 월천 조목은 경상북도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횡성(橫城)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月川)입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낙동강을 따라 걸어 월천서당에 이르는 길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날 큰비가 내려 도로가 젖은 데다 바람이 드세게 불고 눈보라가 휘날려 우산을 받쳐 들고 긴 강을 따라 걷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중간에 물이 불어 다리가 넘친 개울을 맨발로 건넌 다음 눈을 맞아가며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야산을 넘어 부포리선착장에 다다른 시각은 14시20분경이었습니다. 부포리선착장에서 전화를 걸어 배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 후 월천서당으로 건너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별안간 눈발이 하늘을 덮어 불안했습니다. 2-3분 가량 지나자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가 더욱 거칠게 일어 마치 안개가 짙게 낀 듯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날씨가 나빠 배를 띄울 수 없다고 전화가 걸려 왔는데 밧테리가 다 되어 바로 끊겼습니다. 보조밧테리를 연결해 충전을 시도했지만 날씨가 추워 이마저 여의치 못했습니다. 한데서 휘몰아치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대책 없이 배를 기다리는 동안은 초조하고 두렵기조차 했습니다. 한참 후 다행히도 배가 건너와 이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15시30분경에 월천서원 앞 동부리선착장에 도착해 하선했습니다.
서당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서 이 일원에 월천선생구택과 월천서당, 그리고 팔우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월천선생구택은 월천서당 앞에 새로 지은 한옥으로 복원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월천선생께서 학동들을 가르친 월천서당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0자형 목조 단층의 기와집으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通間房)을 배치한 홑처마집으로 소개했는데,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담밖에서 퇴계 이황 선생이 쓴 현판 ‘月川書堂’은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마루 오른쪽 벽면 중앙에 성산 이묵재의 글씨로 '날마다 바르게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쓴 '시재(是齋)' 두 글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서당 앞에 자리한 거목의 은행나무는 그 수령이 450년이 더 되어 긴 세월 월천서당의 부침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것 같습니다. 월산서원 뒤쪽의 팔우정(八友亭)은 방이 들여진 정자로 월천선생께서 찾아온 벗들과 함께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즐기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가슴 뿌듯했던 것은 월천 조목 선생을 다시 뵙게 된 것입니다. 15년 전 도산서원을 탐방할 때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들중 유일하게 이 서원에 배향된 분이 조목 선생임을 알고 이분은 과연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월천서당 안내판에 조목선생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얼마간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월천서당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이 중종 34년(1539)에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조목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명종 7년(1552)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특히 조목은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만 매진한 대학자로 존경받았다. 특히 조목은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만 매진한 대학자로 존경받았다. 조목의 위폐는 퇴계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 상덕사에 모셔졌다. '월천서당 이라는 현판은 퇴계 이황이 썼으며, 마루 오른쪽 벽면 중앙에는 성산 이묵재의 글씨로 '날마다 바르게 사는 집'이라는 뜻인'시재(是齋)'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목 선생은 위폐가 퇴계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 상덕사에 모셔졌을 만큼 퇴계 이황 선생을 가장 오래 스승으로 모신 분으로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서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와 지산 조호익과 더불어 퇴계문하육철(退溪門下六哲)로 선정된 분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통하지 않은 월천선생의 존재가 중앙정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선조6년 이지함, 정인홍, 최영경, 김천일 등과 함께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천거되면서부터였습니다. 정만조는 그의 글 ⌜월천 조목의 생애와 학문⌟에서 “선생은 다섯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혔으며 단번에 벼슬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에 종2품인 가선대부로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은 대개 벼슬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선생께서 관직생활을 한 것은 봉화현감과 합천군수를 2년씩 한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퇴계 문하의 동문인 안동출신의 유성룡과 예안출신의 조목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서애 유성룡은 출사해 영의정이 되어 임진왜란의 난국수습에 힘썼고, 월천 조목은 거의 출사하지 않고 의병을 조직하고 왜군과 맞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월천 조목이 얼마나 퇴계선생의 의 조술자(祖述者)로 충실히 역할을 했는가는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아래 신도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先生美質, 得退溪而有成,
退溪之道學, 得先生而有光
非先生, 何以受退溪之磨琢
非退溪、何以 保先生之發明也."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를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제자로 거둠으로써 빛나게 되었도다.
선생이 아니라면 어찌 퇴계의 마틱磨琢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었다면 어찌 선생의 깨우침을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인가.
저는 그동안 서원(書院)은 여러 곳을 다녀왔는데 서당(書堂)은 몇 곳 밖에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서당이란 향촌 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面) · 동(洞) · 이(里)를 기본단위로 설립한 초 · 중등 단계의 사설교육기관을 이릅니다. 이번에 확인한 것은 서원에는 강당과 사당인 묘(廟)가 함께 있는데 서당에는 강당만 있고 사당인 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당에서 어떤 선현도 배향하지 않는 것은 서당이 오로지 강학소(講學所)로서만 기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당이 존재한 것은 서원보다 훨씬 전인 고려 시대부터로 알려졌습니다.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들이 두셋씩 마주 바라보이고, 이곳에 백성의 자제들이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책을 배우며, 조금 장성하게 되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글을 익힌다. 그리고 아래로는 코흘리개 어린이까지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라는 글이 적혀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이미 조선 시대의 서당 제도와 같은 민간교육기관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중종 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언급됐습니다. 이는 서당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서원이 세워질 즈음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도 제가 아쉬워하는 것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십수 년 전 서당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산에 미쳐 백두대간과 정맥들을 종주하느라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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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 조목선생이 공자의 제자 안연에 비유되는 까닭은 월천이 다른 제자들보다 학문이 못하지 않은 뿐만 아니라 조행(操行)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윤사순은 논고 ⌜월천 조목의 주자학적 심학⌟에서 말했습니다. 월천 선생은 모친상을 당했을 때 나이가 23세였는데, 상례(喪禮)를 치를 때 일일이 퇴계 선생께 문의하여 실행했다고 합니다. 윤사순은 월천의 남달리 뛰어난 조행의 근저에는 심학(心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윤사순은 그의 글에서 심학에 매진하는 목적이 ‘올바른 행위’를 위한 ‘바른 심성수양’을 하려는 데에 있다고 했는데 제가 심학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 부끄러웠습니다.
월천선생도 문인인지라 다른 문인처럼 여러 수의 시를 남겼습니다. 월천에게 청량산을 오르는 것은 곧 신선이 세계에 오르는 일이었다고 이종호는 논고 ⌜월천조목의 문학세계⌟에서 말했습니다. 이러한 언급이 틀리지 않아 월천선생은 하계하면서 소산(疏散) 산수(山水)의 흥취를 아래와 같이 읊었습니다.
偶然乘興過江皇 우연히 홍이 나서 강 언덕을 지나
舊跡重尋石逕高 옛 자취 거듭 찾으니 돌길이 높구나.
半日閒談成野趣 반나절 한담하며 들놀이 정취 이루니
村翁溪老總吾曹 촌옹 · 계로가 모두 우리 무리일세.
청량산도 두 번 올랐고, 안동으로 흐르는 낙동강도 한번 따라 걸은 적이 있어 위 시가 더욱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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