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43. 상주명소 탐방기 3 (도남서원 및 낙암서원)

시인마뇽 2024. 8. 9. 09:58

탐방일: 202459()/2024521()

탐방지: 경북상주시 소재 낙암서원과 도남서원

동행   : 나 홀로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고 했습니다. 상주는 2백 년 가까이 경상감영이 자리했던 영남의 대표도시로 부유한 사람이 많았고 또 이름난 선비나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식산( 息山 ) 이만부( 李萬敷 ) 등은 조선시대에 상주가 배출한 저명한 유학자들입니다.

 

  서원(書院)이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사립 교육기관으로 오늘의 사립대학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본관이 상주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 중인 1543년에 교학을 진흥하고, 고려중기의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을 배향하고자 영주의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입니다. 1550년 명종 임금이 퇴계 이황에게사액(賜額)을 내리어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상주에는 고매한 유학자들을 배향하는 서원이 많이 있습니다. 도남서원의 안내판에 따르면 상주시에 위치한 서원이 20개소나 됩니다. 그 중 5곳의 서원은 아직 복원이 안 되었고, 복원된 서원 중에도 낙암서원처럼 부분적으로 복원된 서원도 있습니다.

 

  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들른 서원은 정몽주(鄭夢周, 1337- 1392) 선생 등을 배향하는 도남서원(道南書院)과 김담수(金聃壽, 1535-1603) 선생 등을 배향하는 낙암서원(洛喦書院) 등 두 곳으로, 시간이 없어 소설 설공찬전의 작가인 채수(蔡壽, 1449-1515) 선생을 배향하는 임호서원을 들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도남서원은 그 규모가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에 겨룰 만했는데, 낙암서원은 사당(祠堂)과 강당(講堂)만 복원되어 그 규모가 아주 작았습니다.

 

 

1.도남서원(道南書院)

탐방일: 202459()

탐방지: 경북상주시도남동175번지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을 둘러보고 경천섬 입구를 지나 도남서원(道南書院)을 탐방했습니다.

 

  도남서원(道南書院)1606년에 창건되어 1676년 사액되었으며, 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2년에 복원된 상주의 대표적인 서원입니다. 이 서원의 이름인 도남(道南)은 송나라 정호(程顥)가 제자 양시(楊時)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吾道將行於南方)” 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 유학의 전통이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명명된 것이라 합니다. 이런 자부심이 도남서원을 영남의 수학궁(首學宮)으로 인식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도남서원에 배향된 유학자들을 살펴보면 도남서원이 과연 영남의 수학궁이다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16061차로 배향된 분들은 포은 정몽주를 제1위로 봉안하여 한훤당 김광집, 일두 김일손, 화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 선생 등으로, 사림오현(士林五賢)에서 정암 조광조 대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봉향한 것이 눈에 띕니다. 그 후 소재 노수신(1617), 서애 유성룡(1631), 우복 정경세(1636)와 창석 이준(2005) 등이 차례로 추배되어 지금은 이 서원에서 9분의 유학자들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여기 도남서원은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묘우, 강당, 동재와 서재를 복원했으며, 정허루와 일관당 등을 복원하여 옛 서원의 면모를 갖춘 것은 2002년부터라 합니다. 정문인 입덕문이 닫혀 있어 쪽문인 영귀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산서원의 만루대에 비할만한 정허루는 규모가 크고 앞이 탁 트여 낙동강을 조망하기에 좋았습니다. 그 뒤로 강당과 그 양 옆으로 의재(義齋)와 경재(敬齋)가 자리했고, 강당 뒤편으로 사당이 자리했는데, 사당은 문이 닫혀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도남서원은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보다 넓게 자리를 잡아 서원 안이 시원스레 보였습니다. 도남서원의 정허루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의 승경이 병산서원의 만루대에서 조망하는 낙동강의 풍광에 못지않은 것은 두 서원 모두 낙동강 강가의 승지(勝地)에 자리하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도남서원에 남겨진 자랑할만한 사적으로는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 일명 壬戌泛月錄가 있습니다. 낙동강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짓는 모임인 선유시회(船遊詩會) 중 으뜸은상산선유시회(商山船遊詩會)라 하겠습니다. 1622년 창석 이준 등 상산 선비 25명이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짓는 등 상산선유시회(商山船遊詩會)의 시작(詩作) 활동은 꾸준했습니다. 상주의 제1경인 경천대에서 여기 도남서원을 거쳐 관수루에 이르는 30여 리의 구간에서 시행된 이 시회는 1607년부터 1778년까지 171년간 총 8회가 열렸는데, 이 기간에 지은 시 모두가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시첩에 차곡차곡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강()을 제재로 한 공동시집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인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는 창석 이준이 이 책 서문에서 이 책은 반드시 도남서원에서 영구히 보존하라고 당부한 바와 같이 여기 도남서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2. 낙암서원(洛嵓書院)

탐방일: 2024521()

탐방지: 경북상주시중동면죽암리292-1

 

 

 

  상주터미널에서 강창교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신상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10분이 채 안 걸려 도착한 강창교를 건너 낙동강 좌안의 제방인 중동제에 들어섰습니다. 진황색의 금계국과 연보라색의 갈퀴나물이 꽃을 활짝 피워 환해진 제방길을 따라 걸어 이 제방 끝 지점의 강변에 자리한 정기룡장군활터(국궁장)’에 이르렀습니다. 국궁장을 지나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도로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낙암서원(洛嵓書院)으로 다가갔습니다. 마침 대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담장이 낮아 서원 안을 들여다볼 수 있어 사진 몇 장을 찍어 왔습니다.

 

  낙암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인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 선생과 두 아들인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 양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1796년에 창건한 서원입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毀撤)된 낙암서원이 복원된 것은 1988년의 일입니다. 훼철되기 이전의 낙암서원은 웬만한 서원 못지 않게 그 규모가 꽤 컸던 것 같습니다. 창건 당시 이 서원에는 사당 상덕사, 강당 정도당, 신문 소수문, 동재 관성, 서재 함영, 강당의 동실 연탁, 서실 존양 외에도 장판각, 전사청, 고사(庫舍) 등 여러 채가 들어섰는데, 와서 보니 1988년에 복원된 사당(祠堂)과 강당(講堂)만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이 서원에 주향된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 1535-1603) 선생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인으로, 김우옹, 정구, 조목, 김부륜, 금남수 등 제현들과 교유(交遊)하여 퇴계의 학통과도 연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1564년 사마시에 급제한 선생은 학문에만 진력해 이정구, 이덕형, 이항복 등이 유일(遺逸)로 천거(薦擧)하여 1591(선조24)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제수(除授)되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이 서원 외에도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서도 봉향(奉享)하고 있다고 합니다.

 

  낙암서원에 함께 배향된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 1561~1619)과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 1576~1645)은 서계 김담수 선생의 아드님들입니다. 김정룡은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5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성균박사를 거쳐 이조 정랑 등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 예안현감으로 군량미 수송에 공이 커 선조께서 황감(黃柑)을 하사했다고 서원 안내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김정견은 한강 정구와 우복 정경세의 문인으로 1621년에  생원시에 합격했습니다. 김정견은 성균관 생원이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했으며, 효자로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제가 서계 김담수 선생을 주목한 것은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인인 선생께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제자인 정구, 조목, 금남수 등과도 교유한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했으면서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기에 당파를 초월해 교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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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 서원을 창립할 때 건원(建院)의 목적으로 삼은 것은 입묘이상덕(立廟而尚德)의 상덕(尚德)입원이돈학(立院而敦學의 돈학(敦學)입니다. 이러한 건원의 뜻이 서원에 구현된 것이 존현(尊賢)의 묘()와 양사(養士)를 위한 강학(講學)의 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덕(尚德)과 돈학(敦學)이 끝까지 잘 지켜졌다면 조선의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毀撤)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서원은 600개소가 넘고, 남은 서원은 47개소에 불과했습니다. 철폐된 서원 중에는 사액서원도 있었으니 서원철폐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저항을 이겨내고 대원군이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원들이 상덕(尙德)과 돈학(敦學)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서원들은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과다하게 제사 비용을 징수했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린치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탈세를 하고 군역을 회피하는 등 서원을 중심으로한 각종 횡포가 도를 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먹혀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건국된 1948년에 태어났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공산독재국가인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자유만주주의국가인 남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에 집안이 가난했어도 국립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유력한 양반계층의 자제들에게만 열려 있었던 조선시대의 서원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대학교는 전국민들에게 똑같이 문이 열려 있어 가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남서원 안내판에 실려 있는 상주 소재 20개소 서원의 명단을 아래와 부기합니다.

 

1) 도남서원(道南書院) 상주시 도남동 175

2) 흥암서원(興巖書院) 상주시 연원동 769(경상북도 기념물 제61)

3)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국가 사적 제532)

4) 귀호서원(龜湖書院)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미복원)

5) 기양서원(岐陽書院)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미복원)

6) 낙암서원(洛喦書院)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 292-1

7) 도안서원(道安書院)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458-3

8) 봉강서원(鳳崗書院) 상주시 신봉동 230-6

9) 봉산서원(鳳山書院)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584-3

10) 서산서원(西山書院) 상주시 연원동 산140 연악서원

13) 우산서원(愚山書院)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미복원)

14) 운계서원(雲溪書院) 상주시 화서면 달천리(미복원)

15) 임호서원(臨湖書院)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산 21-1

16) 장천서원(長川書院)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37

17) 지강서원(芝岡書院)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63 18)

18) 청암서원(清巖書院) 상주시 공검면 예주리 산19-1

19) 화암서원(花巖書院) 상주시 낙동면 화산리(미복원)

20) 효곡서원(孝谷書院)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 324

 

 

 

<탐방사진>

 

1.도남서원

 

 

 

 

2.낙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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