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 2024년6월5일(수)
탐방지: 경북구미시 소재 월암서원, 금오서원, 동락서원
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구미시의 월암서원(月巖書院)과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구미시는 신라 초기에 일선군으로 불린 후 조선 초기 1413년에 선산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78년 선산군의 구미읍이 구미시로 승격되어 선산군과 구미시가 분리되었다가,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되어 오늘의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의 일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중환이 언급한 일선(一善)은 선산(善山)으로 오늘의 구미시를 이릅니다. 이중환은 같은 책에서 “선산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맑다” 라고 호평했습니다. 산천이 깨끗하고 맑은 선산은 충절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외에도 고려 말의 김주(金澍), 조선 시대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 이맹전(李孟專) · 장현광(張顯光)이나 구한말의 장지연(張志淵) 같은 고매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금오서원은 영남학파의 태두인 야은 길재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이고, 월암서원은 사육신의 한 분인 단계 하위지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며, 동락서원은 17세기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장현광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1.월암서원(月巖書院)
탐방일: 2024년6월5일(수)
탐방지: 경북구미시도개면월림리산48-1
아침 일찍 강남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낙동강 의성휴게소(하행)에서 하차해 낙동강 죄안의 월림제 제방길로 이동했습니다. 자전거쉼터를 지나 월림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강변길로 들어섰습니다. 보라색의 갈퀴나물꽃이 활짝 핀 강변을 지나 다시 제방길로 올라서 뒤를 돌아보자 산비탈에 세워진 월암서원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월암서원은 1630년(인조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산이 배출한 농암(籠巖) 김주(金澍) ,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가 1694년(숙종20)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 서원이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복원된 것은 2001년의 일입니다. 월암서원은 상주의 낙암서원처럼 사당과 강당만 복원된 것이 아니고 부속 건물들도 모두 복원되어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다 싶었습니다. 다만 여기 월암서원이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어 상주의 도남서원처럼 공간이 넓지 못해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서원을 대표하는 건물인 강당 구인당(求仁堂)은 가운데 마루와 양쪽에 공부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규모가 작아 학생들이 많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뒤쪽 축대 위에 자리한 사당은 문짝이 모두 단청색으로 칠해져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서원이 빼어난 점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서원에 배향된 농암(籠巖) 김주(金澍, 생몰연도 미상) 선생은 예의판서의 자리에 올랐던 고려말의 문신입니다. 선생은 1392년(공양왕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길에 압록강에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조선을 향해 통곡하면서,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 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할 것과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고, 조복과 유품을 보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명의 태조가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했지만 끝내 사양하고 중국에서 낳은 3명의 자녀와 함께 여생을 보냈습니다. 조선의 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을 기일로 삼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1636년 이 서원에 배향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선생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死六臣) 중 한 분입니다. 『고려사』 개찬과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선생은 1456년 단종복위를 꾀했다가 두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습니다. 남효온(南孝溫)은 저서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선생의 인품에 대해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라고 호평했습니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선생도 가슴 속 한구석에 자연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아래 시조를 남긴 것이 아닌가 싶어 여기에 부기합니다.
손님이 떠난 뒤 문을 닫으니 바람은 물러가고 달이 지는구나
술독을 다시 열고 시 한수 흩어 부르니
아마도 소인이 뜻을 이룰 곳은 이 뿐인가 하노라
하위지와 같이 배향된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1392-1480) 선생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급제한 후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습니다. 1453년(단종1) 계유정란으로 시국이 소란해지자,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귀향해 30년 넘게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선생은 1781년(정조5)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따라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원호(元昊) · 김시습(金時習) · 조려(趙旅) · 남효온(南孝溫) ·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되었습니다.
2.금오서원((金烏書院)
탐방일: 2024년6월5일(수)
탐방지: 경북구미시선산읍원리산81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구미보를 건너 낙동강 우안의 차도로 들어섰습니다. 선산파크골프장을 지나 선산읍 원1리 마을에 들어서자 언덕 위에 자리한 금오서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에 들른 금오서원(金烏書院)은 1572년(선조5)에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액서원입니다. 처음에는 금오산에 세웠다가 낙동강과 제1지류 감천에 둘러싸인 여기 이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은 1602년의 일입니다. 이 서원은 다행히도 서슬푸른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피해 이건 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정학당의 안내판은 이 서원의 건물구조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정학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으로 마루를 중심으로 하여 양 옆에 온돌방이 하나씩 있는 구조이다. 마루의 기둥은 다른 기둥보다 높고, 창문틀 가운데에 기둥이 있는 쌍영창을 다는 등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들이 잘 남아 있다. 지붕의 구조와 공포(拱包,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는 절제미와 조형미가 돋보인다. 툇간은 가운데 칸보다 한 자 정도 크게 지어 쓰임새를 좋게 하면서도 미적으로 뛰어나게 지었다. 정학당은 서원의 보편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잘 살린 모습이어서 건축적 ·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펑가받는다.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조선 후기 강당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이이서 가치가 더욱 높다.”
금오서원 안내판에 실린 대로 외삼문의 역할을 하는 읍청루, 강학공간인 정학당, 상현묘로 통하는 내삼문, 위패를 모신 상현묘가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전망 좋은 이 서원에 배향된 길재 김종직 · 정봉 · 박영 · 장현광 선생 등이 살아 생전 함께 모여 낙강시회를 열었다면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을 조망하며 시를 새로 지어 읊조렸을 것 같습니다.
이 서원에 주향된 야은(冶隱) 길재선생(吉再, 1353~1419)은 여말선초의 대학자입니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3은(三隱)으로 불리는 길재 선생은 과거에 급제한 후 태학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다가 고려가 망할 조짐을 보이자 여기 선산으로 낙향해 야인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문집 『야은집』을 남겼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만 힘쓴 선생의 학통은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 조광조 같은 빼어난 유학자를 거쳐 퇴계 이황선생까지 이어졌습니다.
이택용님은 논고 ⌜경북의 선비정신과 유학자들 – 야은 길재의 삶과 문학⌟에서 “길재선생은 삶은 선비답게 올곧게 살았으며, 문학은 천리에 순응하며 진실한 문학관을 가졌다” 라고 했습니다. 또 “선생의 선비정신이 면면히 흘러서 退溪 李滉이라는 우뚝한 성리학자가 탄생하여 경북의 선비정신을 이루었고, 그 맥을 이은 유학자들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즉 이황 →김성일 →장홍효 →이현일 →이재 → 이상정 → 남한조 → 유치명 → 김흥락 · 김도화 · 이상룡 · 유인식 등의 학파와 류성룡 →정경세 · 이전 · 이준 · 전식 · 조익 · 류진 → 류원지→ 정도응→ 박손경 - 정종로→류심춘→류주목→허훈 등의 계통 또 정종로 → 이원조 → 이진상 → 곽종석 · 이승희 → 김창숙 등이 경북의 선비정신을 脈이며 그들이 경북의 유학자들이다.”라면서 길재 선생에서 비롯된 영남학파의 학통을 밝혔습니다.
아래 시는 길재 선생의 ⌜회고가(懷古歌)⌟로 다시 읽어도 선생의 충절이 읽혀집니다.
五百年來都邑地 蕭蕭匹馬夕陽還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山川依舊人何在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煙月依俙夢裹閒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3. 동락서원(東洛書院)
탐방일자: 2024. 9. 25일(화)
탐방지 : 경북구미시임수동373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경북 구미시에 자리한 동락서원을 들렀습니다. 석 달 만에 다시 나선 낙동강 따라 걷기는 구미시 산호대교의 비산네거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자전거길을 따라 낙동강 우안의 비산제 제방길을 따라 남진했습니다. 하천부지에 자리 잡은 야구장을 지나 구미대교 아래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구미대교를 건너 낙동강 좌안에 자리한 동락서원에 이르렀습니다.
동락서원은 1655년(효종 6)에 지방유림들이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입니다. 1676년(숙종 2)에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된 이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 1971년에는 부속건물도 복구하였다고 서원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 동락서원은 규모가 제법 큰 편으로 갖출 것은 모두 갖추어 조선시대 서원의 표준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강당(講堂)인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제관이 출입하는 신문(神門), 문루(門樓)와 고사(庫舍) 등이 있습니다. 중정당(中正堂)은 모두 6칸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각기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규모는 각각 3칸이고, 문루도 3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서원의 주 기능은 숭앙받는 선현들을 배향해 추모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해 수행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선현으로 배향되느냐는 사액서원으로 승격되는데 매우 중요한 평가요소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동락서원이 규모가 이 정도 되고 사액서원이 되는 데는 이 서원에 17세기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장현광이 배향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구미가 배출한 유학자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모아 전장에 보낸 장현광은 삼전도(三田渡) 굴욕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立碧山)으로 들어간 지 반년 만에 이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어떤 인물인가는 사단법인여헌학 연구회의 여헌기념관 안내전단에 잘 소개되어 여기에 옮겨놓습니다.
“17세기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여현(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인동과 선산을 포함한 구미의 유학 전통을 계승하여 조선성리학의 내용을 한 단계 성숙시킨 대표적인 성리학자입니다. 여한 선생은 퇴계와 울곡에 의해 정초된 조선 유학의 흐름을 입체화하여 한 차원 높은 논리 체계를 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유학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 등 특징적인 성리학설을 제시하여 조선 유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부각하였습니다. 특히 역학(易學)을 중심으로 구축된 여한 선생의 방대한 학문 체계는 조선 유학의 대표적인 업적이자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헌 선생은 위로는 야은 길재를 비롯하여 하위지, 이맹전 선생의 강인한 의리정신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그리고 정봉과 박영선생으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파의 중심 줄기인 송당학파(松堂學派)의 학문을 이어받아 4백여 명에 이르는 여헌학파(旅軒學派)를 일구었습니다. 여헌선생의 지속적인 강학 활동을 통해 구축된 여헌학파는 17세기 중반 이후 영남 유학을 선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유학 전반을 이끄는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이 서원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으로 보아 행사가 열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행사가 열리지 않는다 해도 이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은 낙동강이 훤히 조망되어 승경이 빼어난 입지와 이 서원의 주인공인 장현광이라는 거목이 드리운 그늘이 넓기 때문입니다. 서원 입구에서 저보다 한발 앞서 이 서원을 탐방한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을 만나보고 저의 이런 생각을 굳혔습니다.
동락서원을 출발해 인근 여헌기념관을 들른 다음 낙동강을 따라 왜관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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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구미의 서원을 탐방하면서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이 감당했을 고뇌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목은 이색은 끝내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출사를 거부했으며, 포은 정몽주는 조선건국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야은 길재는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면서 출사하지 않았으나 조선 건국은 인정했기에 아들에게 출사해 조선의 임금을 모시라고 했습니다. 농암 김주는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하절사로 방문한 명나라에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머물러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역성혁명으로 일본제국에 의한 한일병합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겠습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크게 기여한 권근이나 하륜 같은 대학자들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일본을 도와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이완용이나 박제순 등을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것은 한일병합은 단순한 역성혁명이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먹어 삼킨 합병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두 서원을 돌아보고나자 여말선초에 이 땅에서 살았던 지식인들이 번뇌가 위와 같을진데 한일병합을 지켜본 조선의 지식인들은 과연 얼마나 고뇌하고 저항했는지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탐방사진>
1.월암서원
2. 금오서원
3. 동락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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