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38. 안동명소 탐방기 3(농암종택 등)

시인마뇽 2024. 7. 25. 19:53

탐방일자: 20231030, 1216/ 2024127, 327

탐방지 : 경북 안동시 소재 농암종택, 성성재종택, 삼산종택, 남평문씨종택

동행     : 나 홀로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달아 태백산에 이르러서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 갈래인 백두대간은 서쪽으로 휘어져 지리산으로 이어지고, 또 한 갈래인 낙동정맥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나가 부산 앞바다까지 이어집니다. 두 갈래의 산맥 사이에 경상도가 자리하고 있고, 낙동강은 경상도를 좌우로 가르며 김해 앞바다까지 흘러내려 갑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저서 택리지에서 지리가 가장 아름다운 경상도라고 말한 것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감싼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로 가르며 흐르는 낙동강이 곳곳에 승경을 빚어내서가 아닌가 합니다.

 

  이중환은 위 책에서 낙동강이 황지에서 발원해 김해 앞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길을 아래와 같이 약술했습니다.

 

  “황지(潢池)는 천연적으로 된 못으로 태백산 상봉 밑에 있으며, 물이 산을 뚫고 흘러나온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예안(禮安)에 이르고, 동쪽으로 굽어졌다가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안동(安東) 남쪽을 둘러 흐른다. 용궁(龍宮)과 함창(咸昌) 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굽어지며 낙동강(洛東江)이 된다. 낙동(洛東)이란 것은 상주(尙州)의 동쪽이란 뜻이고, 강은 김해(金海)로 들어간다. 강이 온 도의 한복판을 가로 질러서 강 동쪽을 좌도(左道)라 하고 강서쪽은 우도(右道)라 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낙동강의 발원지는 태백 시내에 위치한 황지에서 북쪽으로 10Km 이상  떨어져 있는 함백산 골짜기의 너덜샘입니다만, 옛 문헌에는 모두 다 황지를 발원지로 적고 있습니다. 낙동강의 길이는 황지를 기점으로 하면 천삼백리이고, 용궁과 함창의 경계를 기점으로 삼으면 칠백리가 됩니다.

 

  제가 강원도 태백시의 너덜샘에서 약 1,300리 길의 낙동강을 따라 걷기 시작한 것은 202210월입니다. 강원도의 태백시와 경북의 봉화군, 안동시, 예천군, 문경시, 상주시를 차례로 지나 지난 달 구미시에 다다랐는데, 제가 지나온 여러 고을 중에서 유교문화가 잘 살아 있는 곳은 옛 예안과 안동을 통 틀은 오늘의 안동시입니다.

 

  안동이 유교문화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진 데는 이름난 종택이 많은 것도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예안은 퇴계 이황의 고향이며 안동은 서애 유성룡의 고향이다. 고을 사람들이 이 두 분이 살던 곳에다 각각 사당을 짓고 제사한다. 그러므로 서로 가까운 이 다섯 고을이 사대부가 가장 많으며 모두 퇴계와 서애 문하생의 자손들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위 글에서 언급된 다섯 고을은 예안, 안동, 순흥, 영천과 예천이며, 사당은 대개 서원 안에 있고, 서애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습니다. 안동에 종택이 많은 것은 퇴계와 서애의 문하생 중에서 이름난 사대부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들른 안동의 종택은 농암종택, 성성재종택, 삼산종택과  남평문씨종택 등 4개소에 불과합니다. 안동에는 이 밖에도 의성김씨종택, 퇴계종택, 귀봉종택, 허백당종택, 진성이씨종택, 의성김씨종택, 유일재종택, 도아종택, 제산종택 등 유명한 종택들이 더 있습니다.

 

 

1. 농암종택(聾巖宗澤)

1)탐방일: 20231030()

2)탐방지: 경북안동시도산면가송리

 

 

  35번 국도가 지나는  도산면 가송리의 소두들 버스정류장에서 낙동강을 따라 3Km 가량 걸어 농암종택을 탐방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농암종택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직계자손들이 650여 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고택입니다. 원래 분천마을에 있던 농암종택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이곳저곳에 옮겨졌다가. 2007년 영천이씨 문중에서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 등을 여기 가송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2007년 분강서원(汾江書院)을 여기에다 옮겨 다시 세운 후 이 마을은 분강촌(汾江村)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2천여 평의 대지 위에 터 잡은 농암종택에는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체와 금구당, 명론당, 별당 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농암 이현보(李賢輔)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입니다. 1498년식년문과에 급제한 이현보는 1504년 정언으로 있을 때 서연관의 비행을 공박했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 후 1523년 성주목사 때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 1542년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귀향해 시를 지으며 자연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이현보는 홍유달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김안국 · 정사룡 · 조광조 · 이황 등과 사귀면서 경() 사상을 바탕으로 수양에 힘쓴 문신이자 영남가단을 이끈 문인이었습니다.

 

  소두들정류장에서 농암종택으로 들어가는 약3Km의 강변로도 풍광이 일품이었습니다. 저녁나절 낯선 길을 걷느라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낙동강변의 누정 고산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르느라 왕복 1.2Km를 더 걸었습니다. 또 다른 명소인 월명담을 지나 다다른 농암종택을 휘 둘러보고 다시 소두들정류장으로 돌아가 시내버스를 타고 안동역으로 이동했습니다.

 

 

2. 성성재종택

1)탐방일: 20231216()

2)탐방지: 경북안동시예안면부포리

 

 

  생각지 않은 눈이 내려 우산을 받쳐 들고 낙동강을 따라 걷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야산을 넘어 예안으로 이어지는 935번 지방도인 부포로를 따라 걸으며  낙동강의 물흐름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부라원루를 지나  성성재종택(惺惺齋宗澤)에 도착했는데,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성성재종택은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가문의 종택으로, 18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 종택은 자 형의 본채와 사당 및 아래채로 이루어졌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건물구조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의 한 자료에 따르면 성성재는 안채 대청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고, 상방(웃방)이 대청 앞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안방 윗부분이 통다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성재 금난수는 본관이 봉화로 여기 예안면에서 태어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을 했습니다.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한 금난수는 두루 관리로 일하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임란이 끝나고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1년 만에 사임했습니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성재집(惺齋集)이 있습니다.

 

  작년 10월 농암종택을 탐방하는 길에  들른 바 있는 낙동강변의 고산정은 금난수가 지은 정자입니다.

 

 

3. 삼산종택(三山宗宅)

1)탐방일: 2023127()

2)탐방지: 경북안동시예안면주진리

 

 

 

  강바람이 차가운 주진교를 출발해 농암로를 따라 북진하다가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삼산종택이 보였습니다.

 

   삼산종택은 조선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1703~1761)의 종택으로 조선 영조 때 지어졌다고 합니다. 경상북도의 민속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이 종택은 대문간채, 안채, 사랑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똬리 집으로 집안에 연못이 자리하고 있어 이채로웠습니다.

 

  삼산 유정원은 본관이 전주로, 영조 때 형조참의 및 대사간 등의 벼슬을 지낸 문신입니다. 유정원은 높은 인품과 학문으로 목민관으로서 높이 받들여지는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산종택은 낙동강이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기에 적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남평문씨종택(南平文氏宗宅, 안동마령 기와까치구멍집)

1)탐방일: 2024327()

2)탐방지: 경북안동시남후면검암리

 

 

 

  낙동강우회자전거 길을 따라 진행해 안동시남후면의  검암리노인회관에 도착해 검바우길을 따라 몇 걸음 옮겨놓자 왼쪽산 밑으로 고택이 보였습니다. 이 고택은  안동 마령동 기와 까치 구멍집으로  대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만 찍어왔습니다.

 

  안동마령동 기와까치구멍집은 조선 중종 때 남평문씨가 종택으로 지은 고택입니다. 경상북도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 집은 원래 임동면마령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1988년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되었습니다.

 

  인터넷의 한 자료에 따르면 이 집은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겹집 평면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그 예가 매우 드문 기와지붕으로 된 까치구멍집입니다. 정면 3, 측면 2칸으로 중앙 앞쪽에 봉당이 있고 그 뒤쪽에 마루가 놓였으며 마루 좌측에 안방, 우측에 상방(上房)이 있습니다. 봉당의 좌측에는 부엌, 우측에는 외양간과 그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있다. 막돌로 기단(基壇)과 초석(礎石)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5량가(五粱架)를 꾸몄습니다. 벽은 온돌방만 토벽(土壁)을 치고 나머지는 자귀로 다듬은 두터운 판벽(板璧)으로 되었습니다. 지붕은 합각(閤閣)지붕으로 기와를 덮었는데 합각부분에 집안의 연기가 빠져 나갈수 있는 까치구멍이라고 부르는 구멍을 내었습니다. 까치구멍집의 원형(原形)을 유지한 그 예가 희귀한 기와지붕 건물이란 점에서 중요한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대구에 세거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남평문씨는 흔한 성이 아닙니다. 남평문씨 중 제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은 목화를 이 땅에 전파한 문익점선생이 유일합니다.  안동마령기와까치구멍집이 구체적으로 남평문씨 중 누구라고 특정하지 못하는 것은 남평문씨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바가 없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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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종택을 돌아보는 길에 반갑게 인사를 드린 분은 영남가단을 이끈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입니다.  이현보선생에 관해서는 제 블로그에  올린 '낙동강따라걷기 8( 명호이나리출렁다리-청량산박물관-고산정) ' 이라는 제목의  졸고에  사족으로 부기한 바  있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이현보 선생은 조선 전기에 영남가단을 만들어 강호가도를 실천하고자 도학시조 창작을 개척한 분입니다. 15-16세기 영남과 호남에서 시조를 지어 가단을 키운 사람은 그 지방의 사림파였습니다. 이들은 강호에서 노닐면서 마땅히 실현해야할 도리를 찾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구현을 목표로 삼고 도학시조를 함께 지으며 가단을 형성했습니다.

 

  영남사림 중에서 중앙정계에 처음 진출한 영남의 중심인물인 선생은 경상감사와 형조참판 등의 고위직을 지냈습니다. 줄곧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갈 꿈을 품은 선생은 귀향을 하게 되자 다시 자연과 어울리며 그 기쁨을 시조로 노래했던 것입니다.

 

  선생이 남긴 시조 3효빈가, 농암가생일가는 문집 농암집에 실려 있습니다. 3수의 시조 중 대표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자기 마을 강가에 있는 귀먹바위에 다시 오른 즐거움을 노래한 농암가라고 생각합니다.

 

           聾巖에 올라보니 老眼猶明이로다

          人事가 변한들 山川이야 가실까

          巖前某水某丘가 어제 본 듯하여라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는 저서 한국문학통사에서 이현보선생이 시조 농암가를 통해 삶에는 두 국면이 있다는 것을 인사산천이라는 말로 나타냈다.”라고 평했습니다. 인사는 시간의 흐름을 쫓아 살아가는 이해상충의 영역이고, 산천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움직이지 않는 적연부동(寂然不動)의 경지라고 했습니다. 이현보선생이 농암가한편으로 강호가도를 이끄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산천을 찾는 것이 구도의 길임을 명확하게 했기 때문으로 조동일 교수는 풀이했습니다.

 

  영남의 유학자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은 시조 오륜가를 지어 인륜도덕을 노래했고, 이황(李滉, 1501-1572) 선생은 도산십이곡을 지어 도학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호남가단을 이끈 송순(1493-1583) 선생은 이현보 선생보다 26년 연하입니다. 송순 선생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의 산수에 묻혀 지내면서 시조를 창작해 호남의 가단을 끌어갔는데, 이는 이현보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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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사진>

 

1.농암종택 

 

 

2. 성성재 종택

 

 

3.삼산종택

 

 

4.남평문씨종택( 南平文氏宗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