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1. 11. 22일((월), 2022. 1. 14일(금)
탐방지 : 1차 노성산성-약수역-정동굴-봉산지씨 묘역-절개산
2차 빙허루- 강원감영-강소사 정려각 - 춘수당
동행 : 서울 사대 안승렬 · 원영환 · 이상훈 동문 및 평창문인 정원대선생
조선왕조가 오백년 동안 치러낸 크고 작은 전쟁 중에서 가장 오래 끌은 전쟁은 임진왜란입니다. 1592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1598년 주군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조선에서 철수하기까지 지속되어, 조선 땅은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전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참혹한 전화(戰禍)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이번 탐방의 주인공은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 1543~1617)입니다. 권두문은 이 분이 지은 임란실기 「호구일록(虎口日錄)」을 읽기 전까지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생소한 인물입니다. 권두문은 고려태사 권행의 후예로, 1543년 장악원주부 권유년과 상원 권극제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72년 병과에 합격해, 교서관의 교감감찰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권두문은 1592년3월에 평창군수로 부임합니다. 그해 8월 모리길성(毛利吉成)이 이끄는 일본군이 평창에 진입하자, 군민을 이끌고 천혜의 요새인 응암굴로 피란을 가 항전했으나, 끝내 패하고 아들과 함께 생포됩니다. 권두문은 평창에서 영월을 거쳐 원주감영으로 이감되기까지 온갖 고초를 겪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야음을 틈타 왜군의 진영을 탈출해, 평창을 거쳐 고향인 영천(지금의 영주)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해 선조를 알현해 환도하는 어가를 호종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고, 그 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쳐 정3품인 좌통례를 마지막으로 봉직하다 1617년 타계했습니다. 이 분이 남긴 「호구일록(虎口日錄)」은 임란 최초이자, 지방수령이 저술한 유일한 전쟁실기여서 사료적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권두문이 8월7일 응암굴로 피난을 떠나 9월13일 영주의 본가로 귀환하기까지 36일간의 행로는 평창군청을 출발해 응암굴- 약수역- 영월노산묘- 제천-주천빙허루-원주단구 - 원주신림- 약수역- 영월상동 - 봉화 선산을 차례로 거쳐 영주본가로 귀향하는 것으로써 끝납니다. 권주문의 행로를 따라 나선 두 번의 탐방이 임란실기 「호구일록(虎口日錄)」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적지 아니 도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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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탐방
탐방일자: 2021. 11. 22일
탐방코스: 평창소재 노산산성-약수역-정동굴-봉산지씨 묘역-절개산
동행 : 평창문인 정원대, 서울사대 안승렬, 원영환, 이상훈 동문
어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해 겨울이 다가왔음을 실감한 하루였습니다. 평창읍내에서 평창의 문인 정원대선생과 사대동문들을 만나 점심을 같이한 후, 응암굴을 직접 탐사한 정원대 선생의 안내로 역사현장의 탐방에 나섰습니다.
1)노성산성
군청 뒷산인 노성산에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쌓은 노성산성은 전장이 400m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산성입니다. 안내문에는 조상들이 이곳에서 피 흘려 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평창군수 권두문은 이 성에서 일본군과 싸우지 않고 절개산의 응암굴로 피난을 갔다가 그곳에서 붙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노성산성에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아들 진사공 주(𪐴)와 중방경인 고언영 등이 군수 권두문에게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고 말한 8월7일자 「호구일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험난한 곳에 의지해 있는 것은 비록 지키고 방어하기에 편리하나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형세를 혜량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3경 고수에 실패했고, 여러 성들이 전란의 바람에 휩쓸려 넘어졌습니다. 잔병들을 돌아보니 수레바퀴에 항거하는 씽씽 매미와 같아 보입니다.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합니다.”
노성산 꼭대기에 자리한 임진노성전적비와 사당(?)을 사진찍은 후 남아 있는 산성을 둘러보고 나자. 평창강이 이 산을 에워싸고 흘러 과연 천험을 이용해 성을 쌓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2)약수
두 번째 탐방지는 약수입니다. 권두문 일행은 왜군의 잦은 이진(移陳)으로 온 몸이 묶인 채 끌려 다녀야 했습니다. 약수는 포로 권두문이 일본군을 따라 이동하다가 지나간 곳입니다. 권두문은 그 날의 고통을 8월16일자 일기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약수(弱水)를 지날 적에 돌길에 바위가 가파르게 솟아 있었으니, 타고 있던 아마가 발을 헛디뎌 고꾸라져 일어섰다 넘어지기를 반복하였다. 나는 오른발이 등자(鐙子)에서 빠지지 않아 말의 복부 아래에 깔려 개 이빨처럼 돋아 있는 길 위의 돌부리에 부딪혀 엄지손가락이 꺾이고 말았으니, 고통이 극심하여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묶여 있는 신세라 몸을 가눌 수 없었기에 수직왜가 부축하고 말을 발로 차서 일으키니, 말이 곧장 일어났다. 그런데 또 다른 말이 길을 달려오다 내 다친 발을 차고 지나가니, 나는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오랜 뒤에야 다시 깨어났다. 이 다른 말은 곧 인솔해 가는 왜적이 탄 것이었다. 주인이 이미 흉악하고 말 또한 사나우니, 그 모습이 마치 범과 같아 매우 두려웠다.”
약수에서 유명한 곳은 약수터입니다. 옛날에 이 약수터에서 솟아오르는 약수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낳고, 마시면 나병이 치유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살기가 힘들어져 불만이 많았는데, 힘센 장수가 큰 바윗돌을 들어다가 약수 물을 덮어버려, 그 후로는 약효가 없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막상 찾아가 보니 약효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약수 물도 고갈되어 전혀 흐르지 않았습니다.
약수터에서 조금 떨어져 느티나무(?)가 서있는 약수역의 옛 터에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3)절개산 응암굴
팬션이 자리한 평창강 제방에서 바라본 강 건너 절개산은 영화에 나와도 좋을 만큼 천애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솟은 산입니다. 이 절벽 한 가운데 자리한 응암굴은 몸소 이 굴을 답사한 정원대 선생이 위치를 짚어주지 않았다면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두문은 8월7일자 일기에서 응암굴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군민을 인솔하고 군 남쪽 15리쯤 되는 정동(井洞)에 위험에 대비한 설비를 했다. 천길 절벽에 깎아지른 것이 병풍과 같았다. 아래로 깊은 못에 임해 있고 가로로 10리가 끊어져 있었다. 벽의 한 가운데 위 아래로 두 개의 굴이 있었다. 아래 굴은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위쪽 굴은 십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평지에서 오려다 보았는데 그 위에 굴이 있다는 것은 이제껏 알지 못했다. 굴을 올라가 내려다 보니 앞쪽 반대편에 봉우리가 없었고, 형세는 텅 빈 곳에 기대는 것 같았다. 배는 못으로 통해 물길을 따라 빙돌아 1-2리를 가서 언덕에 이르렀다. 언덕에서 동쪽으로 작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십수보를 걷고 돌 틈을 붙잡고 올라갔다. 처음에는 발을 붙여 올라갔다. 십여장의 사다리를 만들어 걸어놓고 붙잡고 올라갔다.”
저런 천험의 동굴도 안전한 피난처는 되지 못했으니, 권두문 일행은 이 굴에서 며칠 버티지 못하고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4)봉산지씨 묘역
정원대 선생이 안내해준 마지막 탐방지는 봉산지씨 묘역입니다. 권두문과 함께 응암굴로 피신한 사람들 중에는 봉산지씨 일가의 인물도 여러분 있었으니, 지사함, 지대성, 지대용, 지대명, 지대충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권두문이 대장(代將)으로 삼은 지사함(智士涵)은 별시 병과에 급제한 인물로 평창에 거주했으며, 아버지는 정략장군을 지낸 분입니다.
‘봉산지씨시조 정령공송곡채문사당’의 비가 세워지고 그 뒤 높은 언덕에 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묘역이 꽤 넓은 것으로 보아 오늘의 후손들은 선조의 은덕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
지사함, 지대공 등은 응암굴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총알을 맞기도 했습니다.
5)절개산
절개산으로 가는 길은 이상훈군이 안내했습니다. 이 산은 응암굴에서 절개를 지키려고 투신자살한 권두문의 소실 강여인의 죽음을 기리고자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응암굴이 자리한 절개산의 서사면(西斜面)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그쪽으로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다행히 그 반대편인 동사면(東斜面)에 주차장도 있고 오름길도 경사가 완만한데다 코스도 짧아 산 오름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구만리봉에서 시작하여 아랫골 적벽에 이르는 해발876m의 절개산은 그 앞을 흐르는 짙푸른 평창강과 자연동굴이 있고 온갖 기암괴석이 자리해 중국의 계림을 연상케 한다고 안내 글은 적고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강 건너 충적평야와 이 평야를 에도는 평창강을 바라보면서 저 뜰에 자리 잡은 강변의 팬션에서 하루 묵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2차 탐방
탐방일자: 2022. 1. 14일
탐방코스: 평창군청터-원주 빙허루- 원주 강원감영 -영주 강소사 정려각 및 권주 춘수당
동행 : 서울사대 원영환, 이상훈 동문
한 겨울에 떠나는 답사는 나뭇잎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좋습니다. 힘들게 찾아간 곳이 높은 산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곳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시내를 조망하기에 충분할 만한 높이의 야산이어서, 겨울철 답사의 효과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가 평창역에서 하차했습니다. 평창역에서 이상훈 군의 차로 이동해 평창읍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평창군의 관아가 자리했던 땅에 지금은 평창읍사무소가 들어서 관아로서의 명맥은 이어왔다 싶습니다. 읍사무소를 출발해 영월 주천의 빙허루로 향했습니다.
1) 빙허루(憑虛樓)
권두문 일행은 이진(移陣)하는 일본군을 따라 옮겨가 8월23일 영월군 주천면의 빙허루에 도착했습니다. 주천현의 관아 서쪽 망산의 산꼭대기에 자리한 빙허루는 그 아래로 주천강이 흐르고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9월2일밤 빙허루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권두문은 「호구일록」에 탈출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떨고 있을 즈음 갑자기 천둥이 치며 큰 소낙비가 쏟아진다. 캄캄하여 지척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때 왜병 2명이 다가와서 무언가 지껄이며 우리를 살펴보고는 등을 들고 곡식을 쌓아둔 곳으로 내려가고 다른 왜병 군졸들은 마루바닥에서 잔다. 파수지기 왜병들은 뇌우가 심하니 우리가 도망치지 않으리라 믿고 간 듯하다. (-중략-) 모두들 나의 발의 상처를 염려하기에 나는 끈을 풀며 말했다. “하늘이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는데 발의 상처가 심하다 하더라도 못할 일이 무엇이냐 만약 왜병에게 들키게 되면 지붕위에서 떨어져 자결하면 될 것이다.” (-중략-) 벽의 구멍으로 나가서 긴 마루를 지나 이번엔 다시 성주기둥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 까치구멍을 통하여 지붕으로 나왔다. 기왓장을 몇 장 걷어내고 우리를 결박했던 줄을 풀어 이어서 줄을 타고 내려갈수 있도록 묶었다. 흙이 떨어지는 소리가 야간 났으나 빗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적들이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지붕의 기왓장을 밟고 줄을 타고 내려와 문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아프던 발도 가벼워지고 아픈 줄조차 몰랐다. 동쪽 벽에 붙어서 살펴보니 아들 주가 따라온다. 무사히 내려왔다 한다. 서로 손을 잡고 대문밖을 나오니 그 때의 부자의 정은 형언할 수 없었다.“
탈출에 성공한 권두문은 평창을 들러 영주 본가로 돌아갑니다.
2)강원감영
원주시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강원감영은 관아건물이 매우 커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강원감영은 권두문의 피난행로에 들어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곳을 들른 것은 피난 중에 권두문이 강원감영의 호소사 · 관찰사 · 조방장에게 글을 올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강원감영에 보내는 글을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했던 가는 8월29일자 일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언영(彦英)의 항쇄(項鎖)가 중간에 끊어졌다. 적군이 만약 이것을 본다면 반드시 저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므로 크게 두려웠으니, 손으로 그 죽통을 잡아 떨어지지 않도록 지지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장차 우리들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이니, 이는 그 조짐이다.” 호소사(號召使) 이기, 관찰사 강신(姜紳), 조방장(助防將) 등이 있는 세 곳에 마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이에 잡혀 들어온 주의 관리에게서 종이와 붓을 구해 경진(景鎭)에게 글을 쓰게 하였으나, 경진은 손이 아파 글씨를 단정하게 쓸 수 없다고 하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내가 “우리들이 있는 곳이 어떠한 곳인가. 잘 쓰지 못하여도 괜찮다.” 하니, 경진이 마침내 글을 썼다.”
권두문은 이 글에서 일본군은 밤에 공격해야 소기의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합니다.
3) 강소사 정려각 및 춘수당
이번 탐방의 마지막 행선지는 권두문의 본가가 있었던 영천(지금의 영주)입니다. 권두문은 본가를 찾아가 노모를 뵙고 눈물을 훔치며 위로를 드린 일을 9월13일자 일기에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원당(圓塘)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노모께서 사립문 밖으로 나와 나의 손을 잡고 울었다. 나는 노모께서 지나치게 상심하실까 염려하여 소리를 삼켜 내지 않고 다만 눈물을 훔치며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 드렸다. 눈물을 흘리는 처자식과 노복에게도 모두 그치도록 하였다.”
영주시에 도착해 찾아간 곳은 구성공원입니다. 이 공원 꼭대기의 2층누각 가학루에 올라 영주시내를 조망한후 계단을 따라 내려가 강소이의 정려각을 먼저 들렀습니다. 강소이는 평창군수 권두문의 부실로 함께 응암굴로 피난을 갔다가 일본군에 붙잡히게 되자 그 아래 평창강으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정조를 지킨 조선의 여인입니다. 권두문은 8월11일자 일기에서 강소이의 죽음을 아래와 같이 전했습니다.
“적은 나를 먼저 묶고 강녀(康女)를 잡으니 강녀의 평상시 안색과 말투로 ‘내가 어디 가리오?’ 하며 나를 따라 굴을 내려오다가 왜병이 손을 잡으려하니 장차 왜병에게 욕볼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사다리에서 천인절벽으로 떨어지니 왜적도 탄식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정려각은 출입이 금지되어 밖에서 사진만 찍고 춘수당(春睡堂)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춘수당은 권두문의 차남인 권주가 살던 곳입니다. 평창에서 피난을 가 영주 본가로 귀환하기까지 서른 엿새동안 내내 아버지 권두문을 지킨 둘째 아들 권주는 효성이 지극하고 지혜로워 감옥을 탈출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입니다. 구성공원 중턱에 자리한 춘수당은 3칸짜리 조기와집으로 조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권두문의 「호구일록」을 읽다보면 권주의 효심에 감탄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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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문의 「호구일록」은 임란 초기 강원도의 오지인 평창 일원에서 현직의 지방수령이 몸소 겪은 임란체험을 서사화한 포로실기라는 점에서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호남의 사대부들이 남긴 여타 포로실기와 구별됩니다. 임란실기 중에서 충(忠)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포로실기입니다. 이는 포로실기가 다른 실기와 달리 적군에 붙잡혀 적진으로 끌려가 포로로 생활했다가 귀환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군에 붙잡혀 살다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불충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처지여서, 포로로 끌려가 살다 돌아온 사대부들은 불충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드러내고자 자신들의 전란체험을 기억을 통해 재구해 충(忠)을 드러내는데 주력해야 했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나자, 권두문도 다르지 않아 「호구일록」의 지면을 자신의 충을 드러내는데 보다 많이 할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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