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6 (현동역 - 갓바위교-임기교)

시인마뇽 2023. 11. 5. 00:11

낙동강 따라 걷기6 (현동역-갓바위교-임기교)

 

탐방구간: 현동역-갓바위교-임기교

탐방일자: 2023. 10. 23()

탐방구간: 현동역-현동교-대율교-임기3리 거네정류장 -갓바위교- 두음교

- 선당정류장-임기교

탐방시간: 12시정각 - 1545(3시간45)

 

 

 

  작년 가을 강원도태백시에서 시작한 낙동강 따라 걷기는 지난 4월 경상북도봉화군의 현동역에 이르러 일단 중단했습니다. 무더운 여름 동안은 쉬었다가 걷기에 최적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낙동강 따라 걷기를 재개하고자 현동역으로 가는 기차 편을 알아보았습니다. 지난여름 폭우로 법전 - 춘양간 선로의 노반이 유실되어 영주 - 석포 구간의 기차운행이 중단됨에 따라 기차로는 현동역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거리를 여행할 때 제가 이제껏 주로 이용한 교통편은 기차였습니다. 보다 안전하고 정확하게 운행되는데다 교통비도 적게 들어 기차를 많이 타고 다녔습니다. 백두대간과 9개 정맥을 종주하고 섬진강과 영산강 및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걷느라 산간벽지도 많이 찾아다녔는데, 주로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기차가 닿는 곳이면 우선적으로 기차를 탄 것은 버스보다 공간이 넓어 장시간 타고 가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원거리를 여행할 때 밤을 도와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 숙박비도 절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전740분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한 춘양행 직행버스가 시간 반쯤 지나자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해 조금은 불안했습니다. 단양 근처에 이르러 기사 분은 고속도로 갓길에 버스를 세우고 4명밖에 안 되는 승객들을 하차시켰다가 10여분 후에 도착한 동서울터미널-영주를 운행하는 버스에 태웠습니다. 이 버스를 타고 영주터미널로 가서 춘양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가느라 춘양에는 예정보다 1시간 늦은 1140분경에 도착했습니다. 춘양에서 하차하자마자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현동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번에는 기차가 운행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버스와 택시를 이용했는데, 비용은 비용대로 들면서 시간은 시간대로 잡아먹어 이번 탐방의 끝점인 임기교까지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습니다.

 

 

....................................................................................................................................

 

 

  지난 4월 역사 안에서 점심을 들었던 현동역은 기차가 운행되지 않아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원래가 무인역인데도 역사 안의 대합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졌는데, 그 안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그냥 떠나야 해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12시 정각에 현동역을 출발했습니다. 낙동강 좌안길을 따라 6m가량 걸어 풍광이 훌륭한 현동천과 낙동강의 합류점에 놓인 현동교 앞에 이르렀습니다. 현동교를 건너 진행하면 낙동강 좌안길을 걷게 되는데 그리하지 않고 우측으로 진행하다 바로 터널 왼쪽 길로 들어선 것은 춘양버스가 1시간 늦게 도착해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외씨버선길로 명명된 외진 길로 들어서 현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길가에 앉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심하게 굴곡진 감입곡류의 현동천을 거슬러 시계반대방향으로 진행하다 마을 어귀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율교를 건너 현동천과 헤어졌습니다. 차도를 따라 올라가 레미콘공장(?)이 들어선 고갯마루를 넘어 얼마간 내려가자 낙동강이 다시 보여 반가웠습니다. 현동교에서 현동천의 물을 받아들여 수량이 늘어난 낙동강을 왼쪽으로 끼고 우안길을 따라 걸어 세월교를 지났습니다. 낙동강 우안의 곧게 뻗은 차도 옆으로 나란히 밭들이 자리하고 있어 가물 때는 바로 아래 낙동강이 한 몫 할 것 같았습니다.

 

  1323분 임기3리 정류장을 지났습니다. 임기3(거네마을) 정류장에서 7-8분을 걸어 임기3리마을회관에 다다랐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출하가 끝나  텅 빈 배추밭을 바라보노라니 왠지 모르게 허전함이 느껴졌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배추를 출하하느라 바쁘게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몇 분들이 보였습니다. 저도 국민학교를 다닐 때 가을걷이에 바쁜 이맘때가 되면 누님과 형수님의 일손을 덜어드리고자 밭으로 따라 나가 일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은 다 돌아가시고 작은형님 한분만 살아계신데, 이 형님마저 폐암으로 입원해 계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따라 걷고 있는 낙동강은 죽마교를 지나자 낙동시계방향으로 휘돌아 흘러 감입곡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얼마간 더 걸어 갓바위교를 건넜습니다. 20여 년 전 낙동강을 따라 걸은 신정일님은 저서 낙동강역사문화탐사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갓바위라고 부르는 낙동강 가에는 깊디깊은 갓바우소가 있고 갓바위다리를 지나자 음내마을에 이른다.” 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미리 읽었다면 갓바위를 찾아보았을 텐데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확인해본 즉 갓바위소로 보이는 것은 찾았는데 갓바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1446분 두음교를 건넜습니다. 농어촌생활용수 개발을 위해 아스콘포장공사 중인 구간의 차도를 지나자 차도 아래쪽에 사과들이 쌓여 있어 아깝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가 내다팔 수 없는 흠집 난 것들이었습니다. 강폭이 넓어지면서 모래톱이 드러난 낙동강을 따라 걸어 덕산천이 합류되는 두음교 앞에 이르자 산자수명 두음리를 한자로 쓴 비석이 서있었습니다. 안내판에 마을 앞에 도시천이 흐른다. 마을이 움푹 들어간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군매로하였으며 마을이 서향이어서 음매로 라고도 부른다라고 소개된 두음리(頭吟里)는 봉화군 오지에 속한 곳으로 청정지역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두음분교장으로 향하는 직진 길을 버리고 임기분교장으로 향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 두음교를 건넜습니다. 이내 소천초등학교임기분교장에 이르러 운동장에 다가가 교정과 절정에 달한 단풍을 사진 찍었습니다.

 

  1545분 작은 임기교에서 6구간탐방을 마쳤습니다. 임기분교에서 조금 더 걸어 일월과 현동쪽으로 길이 갈리는 31번 도로상의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큰 임기교를 건너 31번 도로를 따라 걸으면 골마을을 지나가게 되는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바로 길을 건너 낙동강의 우안길로 들어섰습니다. 큰 임기교에서 이번 탐방의 끝점인 작은 임기교까지 이어지는 1.7Km 거리의 낙동강 우안길이 이번에 걸은 길 중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길은 산자락에 낸 소로여서 차들이 다니지 않아 마음 편히 걸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자 비로소 화사하게단풍이 든 길가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바위 아래 세워진  벤치에 앉아 낙동강의 물 흐름을 지켜보면서 정호승님의 시 강물을 읊조려도 좋았을 텐데 그리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이번 탐방의 종점인 작은 임기교에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다음 구간의 초입을 살펴본 후 다리를 건너 31번 도로상의 골마을정류소로 이동,  3-4분 기다려 춘양 가는 버스에 오름으로써 6구간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

 

 

  제가 여행을 좋아한 데는 옆자리의 여행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대학을 다닐 때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누가 옆 자리에 앉든 상관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1969년 여름 한라산을 오른 후 배를 타고부산으로 가서 통일호를 타고 상경했을 때는 옆자리에 여대생이 앉아 밤새도록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971년 여름 지리산을 종주하고 마천에서 남원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때 옆자리에 약간 술이 취한 40대의 남성분이 동석했습니다. 이분과 나눈 대화는 이 분이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활동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그 시대에는 여행을 할 때 동석한 사람들과 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 목소리가 커져도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잘 들 참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친해져 여행 중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1970년 덕유산을 등반하고 무주에서 남원까지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 버스의 차장은 남자였습니다.  이분이 도와주어 남원에서 기사님들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 여관비를 절감한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지금도 여전히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차는 버스와 달리 객실에서 홍익회가 먹거나 마실 것을 팔아 대화를 이어가기가 한결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행을 하며 동석한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코로나를 겪은 후 마스크를 쓰는 일이 일상화되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음식을 건네는 일은 삼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에티켓이 되어버렸습니다. 스마트 폰과 함께하면 굳이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나누는 일은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입니다.

 

  앞으로는 옆자리의 여행객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