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10(왕모산성휴게소-부포리선착장-월천서당)

시인마뇽 2023. 12. 18. 03:20

탐방구간: 와룡산휴게소-월곡초교부포분교-부포리선착장-월천서당

탐방일자: 2023. 12. 16일(금)

탐방코스: 와룡산휴게소-원천교-도산교회-월란정사-포장도로끝점-무명산-월곡초교부포분교

                 -성성재 종택-부포리선착장-월천서당

탐방시간: 948-1527(5시간19)

 

 

  기상청의 일기예보와 달리 하루 종일 일기가 불순해 낙동강을 따라 걷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이날 안동의 날씨는 눈이나 비는 전혀 내리지 않고 내내 흐려 있다가 오후 3시부터 해가 나고, 기온도 영상2-3도를 유지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예보되었습니다. 이런 날씨라면 전날 큰비가 내려 젖었을 노면이 결빙될 우려도 없고, 비나 눈 때문에 우산을 받치고 걷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올해 마지막으로 낙동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나이 칠십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장시간 먼 곳으로 트레킹을 나서는 일은 가능한 한 피해왔습니다. 그 전에 웬만한 악천후에도 산행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체력이 뒷받침해주어서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해 걸음이 많이 느려졌고 겁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먼 곳으로 장시간 트레킹을 나설 때에는 사전에 일기예보를 점검해 날씨가 안 좋다 싶으면 다른 날로 바꿔서 했습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저는 한 겨울에 설산을 걸으려고 혼자서 고산을 산행하기도 했습니다. 201212월 전날 큰 눈이 내린 후 기온이 급강하 해 길이 얼어붙은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경북 봉화에 자리한 낙동정맥의 통고산 구간을 혼자서 종주한 일도 있습니다. 그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체력도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겁이 없어서였습니다. 요즘에는 체력과 정신력 모두가 옛날 같지 않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장시간 트레킹을 나서는 일을 극력 피해왔는데, 이번에는 아주 드물게 일기예보가 틀리는 바람에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날 큰비가 내려 새파란 낙동강이 탁류로 변했고, 수량이 늘어나 물 흐름도 거칠었으며, 강바람이 만만치 않아 물 흐름과 반대방향으로 물결이 크게 일곤 했습니다. 날씨 좋은 날 비교적 잔잔히 흐르는 낙동강만 보아왔던 제가 겨울비에 엄청 불은 탁류를 가까이서 보노라니 역동감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잠시였고, 강바람이 거세게 불어 우산을 받쳐 들고 걷기가 힘들고 사진을 찍는 일이 불편해지자, 오보를 낸 기상청이 밉살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길이 끊겨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을 넘어야 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우산을 펴들고 걸을 수가 없어 공중을 난무하다 내려앉는 눈을 그대로 맞아야 했습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부포리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전화를 걸어 배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후 몇 분이 지나자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가 거칠게 일더니 바람이 드세게 불어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는데 때 마침 밧테리가 다해 어디서 걸려온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 배가 뜰 수 없다고 전화를 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걱정됐습니다. 여분의 밧테리를 연결했지만 이 마저 표면이 차가워 안주머니에 넣고 한참 동안 체온으로 덥혔는데도 충전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우산을 펼쳐들 수가 없어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 충전되기를 기다리며 십 수분을 보내고 나서야 바짝 다가온 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나빠 운항을 할 수 없다고 알리려 제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하던 중 마침 화물차를 태운 손님이 있어 모시고 건너왔다는 젊은 기사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카페리 배를 타고 안동호를 건너 맞은편 선착장에 내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그치고 해가 나 구름을 관장해온 제우스신의 변덕이 이런 것이다 했습니다.

 

....................................................................................................................................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안동역에 도착, 역내 매점을 들러 우산을 사들고 건너 편 안동터미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안동터미널에서 213번 버스를 타고 교보생명으로 가서, 길 건너 맞은 편 정류장에서 청량산으로 가는 512번 버스로 환승해 도산면의 온혜리 정류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온혜리에서 개인택시를 타고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단천리의 왕모산성휴게소 앞에 도착하기까지 기사 분에게 물어 두 가지 필요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포장도로인 왕모산성로가 끝나는 곳의 민가를 들러 산길을 확인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시사단 앞의 잠수교는 물에 잠겨 있어 도산서원 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전948분 허름해 보이는 왕모산성휴게소가게를 출발했습니다. 이 가게는 지난번에 이육사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한 번 지났던 곳이어서 눈에 익었습니다. 눈발이 그치지 않아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느라 사진을 찍기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이내 안동영화에술학교를 지나 원천교에 이르러 전날 내린 큰 비로 물이 많이 불고 탁류로 변해버린 낙동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상류 쪽으로 저만치 떨어져 강변에 곧추선 칼선대를 조망한 후, 강을 건너 나지막한 언덕 위로 올라서자 내살미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안동선비순례길의 약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서 있는 이 언덕에는 전장 11.5Km원천교-번남댁-게상고택-성상재종택-부포리선착장’ 코스인 역동길을 알리는 작은 표석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도로가 포장된 왕모산성로를 따라 걸어 규모가 작아 조촐해 보이는 도산교회를 거쳐 내살미 마을을 벗어났습니다.

 

  1040분 월란정사를 들렀습니다. 내살미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월란정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잠시 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230m 떨어진 산중의 월란정사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여 지난번에 들렀던 강 건너 이육사문학관과 그 앞의 넓은 들판, 그리고 그 들판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였고 농암 이현보선생께서도 시문을 읊은 곳으로 알려진 월란정사(月瀾精舍)1860년 김사원의 후손들이 지었다고 합니다. 지붕에서 풀들이 나서 높이 자랐을 만큼 많이 낡은 월란정사와는 달리 그 앞의 월란암칠대기적비(月瀾庵七臺紀蹟碑)는 비문이 명료한 것으로 보아 세워진지 얼마 안된 것 같았습니다. 전날 내린 비로 지척대는 길을 따라 내려가 다시 왕모산성로로 복귀하자 길 우편의 바로 아래로 강물이 흘러 잠시 멈춰 서서 낙동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지켜보았습니다. 낙동강 좌안 길인 왕모산성로를 따라올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자 평평한 길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얼마 후 왕모산성로가 끝나는 지점의 민가 앞에 다다르자 길이 끊어진데다 부포리선착장으로 가는 역동길을 안내하는 어떤 표지판이나 리본도 보이지 않아 당혹스러웠습니다. 택시기사분이 물어 가라는 곳이 바로 이 집이다 싶어 큰 소리로 누가 계시냐고 물었으나 답은 없고 개만 짖어대어 별 수 없이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나서야 했습니다.

 

  1139분 맨발로 2-3m 폭의 작은 개울을 건넜습니다. 마지막 민가 앞에서 물이 불어 징검다리를 그냥 건널 수 없는 작은 개울을 구두를 벗고 건넜습니다. 트레킹을 하느라 한 겨울에 맨발로 하천을 건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물이 차갑지 않아 견딜 만 했습니다. 개울을 건넌 후 밭을 관통해 산속으로 들어서자 잡목이 앞을 가로 막아 능선으로 올라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산을 배낭에 넣고 걷느라 내리는 눈은 그대로 맞고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전날 비가 많이 내려 지표의 토양이 물을 머금고 있어 혹시라도 미끄러질까봐 두 손으로 스틱을 잡고 보폭을 적게 해서 아주 천천히 걸어올랐습니다. 한참 후 능선에 올라서자 희미하나마 길이 보여 이 길을 따라 진행했습니다. 얼마간 걸어 묘지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은 것은 산 너머 마을로 묘지를 오르내리는 길이 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지도와 나침판을 보고 제가 걸어가는 길을 몇 차례 점검하면서 진행해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았습니다.

 

  1316분 월곡초교부포분교장에 다다랐습니다. 왕모산성로 끝점의 민가를 출발해 산을 넘어 월곡초교부포분교에 이르기까지 1시간 반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산속에서 끝내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것이 아닌 가해 두렵기도 했지만, 남한 땅의 9개 정맥을 혼주서 종주한 경험이 있어 잘 해내리라고 스스로를 격려했습니다. 산을 넘어 내려가 만난 첫 건물은 폐교된 월곡초교부포분교로, 교문에는 안동사진창작스페이스한미사진미술관등의 문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몇 채의 민가가 들어선 가름마을을 지나 공사 중인 935번 지방도의 끝점인 가름정류장에 이르러 지도를 살펴보고나서야 번남댁과 의촌리를 건너뛴 것을 알았습니다. 역동길의 명소인 계상고택을 들를 욕심에서 의촌리로 가고자 북쪽으로 진행하다가 이러다가는 시간이 늦어 배를 탈 수 없을 것 같아 이내 되돌아가 935번 도로를 따라 남진했습니다. 조선시대 예안현에 설치된 부라원역의 누정(樓亭)인 부라원루 (浮羅院樓)를 분명 지났을 텐데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강 건너 월천서당 앞에서 찍은 사진을 확대해 희미하게 나오는 이 건물을 보고나서야 도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부라원루를 지난 것을 알았습니다.

 

  1451분 부포리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부라원루를 지나 다다른 길옆의 성상재종택은 문이 닫혀 있어 밖에서 사진 몇 장만 찍었습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전번에 들렀던 고산정(孤山亭)을 지은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선생 가문의 종택으로, 18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종택은 자 형의 본채와 사당 및 아래채로 이루어졌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건물구조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여기 예안면에서 태어나 생원시에 합격하고 두루 관리로 일해 온 금난수 선생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운 분입니다. 성성재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자 먼발치로 안동호를 건너오는 배 한척이 보였습니다. 배가이 운항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자 안도되어 길옆의 정자에 올라 마음 편히 꽤 넓은 안동호를 사진 찍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 부포리선착장에 이르자 바람이 드세게 불어 크게 물결이 출렁이는 안동호의 풍광이 볼 만했습니다. 그새 배가 떠나 기사분에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와달라고 요청하자 기다리라고 답을 해와 안심했습니다. 따끈한 커피를 꺼내들고 잠시 쉬는 동안 전화가 걸려왔는데 밧테리가 다 나가 받지 못했다는 것과 그 후의 일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1527분 월천서당을 바깥에서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여정을 마쳤습니다. 부포리 선착장에서는 강바람이 하도 강하게 불어 우산을 펴들 수가 없었습니다. 밖에서 배를 기다리면서 펄펄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고 나자 몸이 떨려 배에 오르고 나서는 훈훈한 실내에 앉아 차가워진 몸을 덥히느라 안동호의 승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부포리선착장 건너편의 동부선착장에 도착해 하선하자 이내 눈발이 그치고 해가 났습니다. 퇴계 선생의 제자인 조목(趙穆, 1524~1606)선생이 건림하여 제자를 가르쳤던  월천서당(月川書堂) 역시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찍었습니다. 택시를 불러 온혜리 정류장으로 이동해 1630분에 이곳을 지나는 512번 버스를 타고 안동시내로 들어가 1817분에 안동역을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호에 탑승하는 것으로써 하루 여정을 마쳤습니다.

 

....................................................................................................................................

 

  눈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불어 고생은 조금 했지만, 하루 여정을 무탈하게 끝내고나자 온 몸이 개운했습니다. 산을 넘어 도착한 913번 도로 끝점에서 이 길을 따라 부포리선착장으로 향하느라 역동길의 명소인 번남고택과 의촌리 고택, 그리고 역동 우탁선생을 배향하는 역동서원이 있었던 곳에 자리 잡은 계상고택을 들르지 못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강 길을 따라 걸으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넌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놀랐고 고마웠던 것은 배를 타고 안동호를 건넌 것입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승객의 도선요금은 어린이 100, 청소년150, 대인300원으로 책정되어 거의 공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승객만 있으면 아침8시에서 저녁6시까지 하루 10시간을 수시로 운행하는 이 배는 동절기에는 저녁 5시까지만 운항하고 기상이 악화되고, 수위가 저하되며, 동절기에 결빙 시에는 운항이 불가능 해 사전에 전화로 확인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제가 고마워하는 것은 공지된 서비스가 정확히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혼자서 기다리는 저를 태우려 배를 띄웠고, 승선한 저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65세가 넘은 것을 확인하자 공지된 대로 도선요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배를 운항하는 젊은 기사분도 혼자 타서 미안해하는 제게 더할 수 없이 친절히 대했습니다.

 

  이 배를 운영하는 곳은 개인회사가 아닌 안동시이고, 이 배를 운항하는 기사분도 공무원입니다. 그럼에도 기사 분들이 승객들에게 친절을 다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선진국대열에 합류했음을 의미한다 싶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부를 쌓아 가능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광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어서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북한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많은 공무원들이 부패해 호적등본을 떼는 데도 급행료를 얹어주어야 했습니다. 나라가 부유해지자 공무원들의 월급도 올라갔고 행정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어 부패가 상당히 사라졌습니다.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필요한 각종 제도를 완비하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지도자는 제가 젊었을 때 그토록 반대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아닌가 합니다. 나이 들어 제가 생각을 고쳐먹은 것은 최고의 인권은 매일 안심하고 끼니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민주화의 제1과제 역시 모든 국민이 세끼 끼니를 이어갈 수 있도록 경제적 부를 이뤄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만년 지속되어온 가난에서 벗어나게 만든 산업혁명을 이 땅에서 일궈낸 박대통령은 집권 중에 독재를 해 국민의 인권 신장과 민주화에 역행한 과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저는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부하는 안동을 여행하고 나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