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11(월천서당-선성수상길-오천유적지)

시인마뇽 2024. 1. 17. 02:01

탐방구간: 월천서당-선성수상길-오천유적지(군자마을)

탐방일자: 2024. 1. 4()

탐방코스: 월천서당-수변데크길-선성수상길-선성현문화단지-보광사

                 -당고개-오천유적지(군자마을)-오천1리정류장

탐방시간: 1029-1610(5시간41)

동행       : 나 홀로

 

 

  안동댐 축조로 낙동강 양안(兩岸)의 골짜기들이 강물로 채워져 만들어진 안동호(安東湖)의 호안을 따라 걸으며 명()과 암()을 같이 보았습니다. 안동호는 낙동강하구로부터 340Km 떨어진 경북안동시의 성곡동에 위치한 안동댐의 담수(湛水)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입니다. 1971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완공된 이 댐은 우리나라 최초로 양수(揚水)겸용 발전소가 설치된 댐으로, 그 높이가 83m이고 저수용량이 약125천만톤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소양댐, 충주댐, 대청댐 다음으로 큰 국내 4위의 다목적 댐입니다. 안동호가 얼마나 큰 호수인가는 지난번 부포리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월천서당으로 건너가면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 있습니다.

 

  안동호의 명()이 오늘날의 것이라면 암()은 지난날의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명만보고 암은 잘 보지 않습니다. 저도 다르지 않아 안동댐이 빚어낸 안동호의 비경에 감탄만 했지, 이 호수에 수몰된 지역의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외지로 나가 살아야 했을 아픔은 이제껏 생각지 못했습니다.

 

  절경의 안동호에 암()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선성수상길에 전시된 수몰마을의 사진을 보고 알았습니다. 선성수상길이란 선성문화단지 아래 안동호에 설치된 부교로 된 물위의 길로 그 길이는 1Km 가량 됩니다. 이 수상길을 따라 걸어 중간쯤에 자리한 자그마한 쉼터에  이르자,  1971년에 찍은 예안면 서부리의 항공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수몰 전의 이곳 서부리는 집들이 꽉 들어선 것으로 보아 꽤 큰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쉼터에 전시된 것은 서부리 마을의 사진만이 아닙니다. 예안국민학교의 풍금과 운동회 사진, 책걸상, 그리고 교가의 악보와 가사가 적힌 액자가 같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반세기 전에 이곳 서부리에 살았던 주민들은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여기 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살든 먹고 살만해진 요즘이야 고향을 떠나 타관으로 이사를 가서 산다는 것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주 산업이 농업이었던 반세기 전에는 집과 논밭이 수몰되어 어쩔 수 없이 이농을 해야 했던 것은 엄청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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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들어 첫 번째 나들이인 낙동강 따라 걷기는 안동시도산면의 월천서당에서 시작했습니다. 아침 650분에 청량리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안동역에 도착한 것은 936분이었습니다. 안동역에서 하차해 이번 탐방길의 출발점인 월천서당까지 4만원을 들여 택시를 타고 이동해,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는 것보다 월천서당에 도착하는 시간을 2시간 반 가량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월천서당은 퇴계 이황선생의 빼어난 제자 중의 한 분인 월천 조목선생이 건립해 후생들을 가르쳤던 서당으로, 바로 아래 드넓은 안동호가 시원스레 펼쳐져 경관이 매우 빼어난 명소입니다.

 

  1028분 월천서당을 출발했습니다. 맞은편의 부포리 선착장으로 건너가는 손님을 기다리는 카페리 도선을 사진 찍은 후 서부리를 향해 북진했습니다. 10분가량 걸어 다다른 데크 길 쉼터삼거리에서 왼쪽아래 수변데크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데크 길은 끝났고 한국문화테마파크 아래쪽에 낸 야자매트길을 따라 하수처리시설을 지난 다음 임도였던 것 같은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월천서당 출발 한 시간 쯤 지나 낙동강 우안의 수변데크길에 들어섰습니다. 산자락에 낸 수변데크길을 따라 걸으며 계단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힘든 줄 몰랐습니다. 오른 쪽 아래 낙동강은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꽤 넓은 강을 가로질러 부표를 연결해 띄운 것이 눈에 조금 거슬렸지만, 낙동강은 여전히 비경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월천서당1.6Km/부유데크2.7Km’ 지점에 설치된 데크 쉼터에 앉아 점심을 들면서 십 수분 쉬었습니다.

 

  1216분 산자락에 낸 데크길에서 벗어나 월천서당 2.6Km/오천유적지 11.1Km’의 표지목이 세워진 시멘트 길로 들어섰습니다. 데크 쉼터에서 점심식사를 끝내고 반시간 남짓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바로 아래 안동호를 조망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수면이 잠잠했습니다. 19일 전 부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며 바라본 안동호수는 눈보라가 휘날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고, 파랑이 거칠게 일어 배가 운항하지 못할까보아 걱정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더 할 수 없이 잠잠해 제 마음도 같이 평온했습니다. 시멘트길로 조금 걸어 올라가다 이내 외딴집 바로 위에서 왼쪽으로 꺾어 다시 데크길로 들어섰습니다. 앞이 탁 트여 훤히 보이는 안동호를 사진 찍은 후 수변데크길을 이어가다가, 문이 망가지고 지붕이 벗겨졌는데도 회벽만은 멀쩡한 거의 붙어 있는 두 채의 폐가를 사진 찍었습니다. 조금 더 걸어 오른쪽 위로 호반하우스로 가는 데크길이 나 있는 삼거리를 지나자 12년전 낙동정맥을 종주할 때 보았던 까치집 같은 겨우살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겨우살이가 매달려 있는 나무 아래에서 연인과 입을 맞추면 생전 헤어지지 않는다는 서양의 설화를 떠올린 것은 24년 전에 먼저 간 집사람이 생각나서였습니다.

 

  1356분 도산면서부리의 예끼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머리에 부딪혀 다칠까보아 데크길 옆 나무줄기를 스폰지(?)로 싸놓은 것을 보자 안동시의 배려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산자락에 낸 수변데크길이 끝나고 선성수변길이 시작되는 중간쯤에 세워진 사방댐 비석을 보고 여기가 도산면 동부리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걷고자 하는 선성수상길이 바로 도산면 동부리와 예끼마을의 서부리를 부교로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선성수상길이란 안동호의 수위변동에 상관없이 수상을 걸을 수 있는 부교를 말하는 것으로 총 길이는 1,011m이고, 연결부를 제외한 부전교의 길이는 925m입니다. 이런 부교 다리는 난생 처음 걷는 것으로 흔들림이 심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물결이 크게 일지 않아서인지 이렇다할 만한 흔들림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중간쯤에 설치된 원형의 데크 광장은 폭이 10m라고 하는데,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서인지 조금은 비좁게 느껴졌습니다. 선성수상길을 건너 경북 3대 문화권(안동의 유교, 고령의 가야, 경주의 신라) 사업의 일환으로 선성현 옛 관아를 복원하고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한옥 숙박 체험시설을 갖추어 놓은  선성현문화단지를 주마간산 격으로 휘 둘러본 후 한 달 전에 들렀던 서부리의 벽화촌인  예끼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얼핏 보아도 오늘의 예끼마을이 사진으로 본 수몰전의 마을보다 그 세(勢)가 많이 줄어든 것 같았습니다.

 

  1522분 오천유적지 주차장에 도착해 11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예끼마을을 출발해 안동시내와 청량산을 이어주는 퇴계로를 따라 남진했습니다. 나지막한 고불고개를 넘어 보광사 앞에 다다랐습니다. 이 절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과 복장유물(腹藏遺物)은 보물1571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역사적 가치 높은 문화유산이라는데, 시간이 넉넉지 못해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예안교를 건너 눈여겨 본 안동호수상레저마린의 선착장에 정박한 배가 눈에 띄지 않아 겨울철이라서 휴업중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고개 정류장에 이르러 월천서당10.5Km/오천유적지3.2Km'의 표지목을 보고서야 서두르지 않으면 오천유적지 정류장을 16시40분쯤에 지나  안동시내로 들어가는 512번 버스를 놓칠 수 있겠다 싶어 걱정되었습니다. 당고개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 오천유적지로 향했습니다. 10분가량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서 오천유적지로 가는 길은 오른 쪽 산길로 이어졌습니다. 광산김씨 묘를 지나 올라선 봉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능선을 따라 남진했습니다. 다행이다 싶었던 것은 동네 앞 야산이라서 길이 잘 나있었고, 거리도 표지목의 3.6Km보다 훨씬 짧아 반시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예상보다 40분가량 일찍 도착해 200m가량 떨어진 오천유적지(군자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안동김씨의 본산인 안동의 오천리에 광산김씨가 모여 살아 명문가를 이루고 있었으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광산은 호남의 광주광역시에 속해 있는 지역이어서 그랬습니다. 오천유적지인 여기 군자마을은 조선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가 약 20대에 걸쳐 600 여년 동안 살아온 세거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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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 주민이 겪는 애환을 핍진하게 그려낸 소설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담양 태생의 소설가인 문순태 선생의 연작소설 징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성방울재라는 수몰지구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거대한 장성댐 건설로 고향을 잃어야 했던 1970년대 수몰민들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칠복은 장성댐이 건설되면서 농토를 잃어버리고 아내마저 달아나자 어린 딸을 데리고 호숫가로 돌아와 징을 울립니다. 마을사람들은 낚시를 못하게 하려고 징을 크게 울린다면서 장사를 망치게 하는 칠복을 버스에 태워 내쫓습니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빗소리에 뒤섞인 귀기어린 징소리를 듣게되고 칠복이의 한에 떨려 뒤척이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납니다.

 

  저는 이 소설을 15년 전에 읽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장성호를 몇 번 차를 타고 지난 적이 있고, 이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된 백암산도 호남정맥 종주 차 지난 일이 있어 이 소설의 내용들이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런 슬픈 일들은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허구이기는 해도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고 있음직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댐이 건설된 지 반세기가 지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잊혀져버린 이야기일 수 있지만, 수몰민 당사자들은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한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이야 나라가 살만해져 보상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나라살림이 넉넉지 못했던 그때는  정부의 보상도 턱없이 부족해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들이 감당했을 고통을 단순히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성장통 쯤으로 치부해서 안 되는 것은 경제성장의 수혜에서 철저히 외면된 사람들도 바로 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