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13(주진교-도목선착장-호반로/산야길삼거리)

시인마뇽 2024. 2. 1. 12:16

탐방구간: 주진교-도목선착장-호반로/산야길 삼거리

탐방일자: 2024. 1, 27()

탐방코스: 주진교-서당골 삼거리-기사교회-토목선착장-자곡선착장-산야2리정류장

                -호반로/산야길 삼거리-와룡사-우송정-가구리정류장

탐방시간: 1014-1621(6시간7)

동행       : 나 홀로

 

 

  우리나라에는 댐의 담수(湛水)로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여럿 있는바, 한강의 소양호와 충주호, 낙동강의 안동호와 임하호, 금강의 용담호와 대청호, 섬진강의 옥정호, 그리고 영산강의 담양호와 장성호 등이 그것들입니다.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강줄기를 따라 걷노라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인공호수는 다목적댐의 건설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인공호수의 수자원 역시 생활용수는 물론 농업용수나 공업용수 등 산업용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공호수는 각종 용수를 공급하는 것 외에도 주변의 산들과 어우러져 여기저기에 경관이 빼어난 승경을 빚어내기에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발원지에서 강 하구까지 강줄기를 따라 걷는 제게는 이런 인공호수가 마냥 고마운 것만은 아닙니다. 인공호수가 아니었다면 웬만한 강변은 홍수 때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싸놓은 제방을 따라 걸으면 되기에 강줄기를 따라 걷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댐의 담수로 인공호수가 만들어진 후로는 주변의 산골짜기들이 강물에 잠기는 바람에 강변(江邊)이 들쭉날쭉해져 따라 걷기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다목적댐의 담수로 수변의 길이가 엄청 길어지고 꾸불꾸불해진 인공호수를 따라 걷는 것은 마치 해안선이 밋밋한 동해를 따라 걷다가 들쭉날쭉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남해를 따라 걷는 것 같아 지치기 십상입니다.

 

  제가 이제껏 강줄기를 따라 걷느라 만난 인공호수는 섬진강의 옥정호, 영산강의 담양호, 금강의 용담호와 대청호입니다. 영산강의 담양호는 이 강의 거의 최상류에 자리해 크기가 작고 호반의 길이가 그다지 길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인공호수들은 담양호와 달라 규모가 크고 둘레의 길이가 원래 강줄기보다 몇 배 길어 강변을 따라 걷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만난 안동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동시에서 안동호의 호반을 따라 안동선비순례길을 낸 덕분에 몇 곳에서는 안동호의 호반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안동선비순례길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어 차도를 따라 빙 돌아가 낙동강 따라 걷기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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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터미널을 930분에 출발하는 510번 버스를 타고 40분 남짓 달려 주진교를 건넜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자 마자 요천정류장에서 하차해 낙동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스마트폰에 옮겨 담았습니다.

 

  오전 1014분 주진교를 출발해 933번 도로인 농암로를 따라 북진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선 삼산정류장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 걸어가자 안동전주류씨 삼산종택이 보였습니다. 이 고택은 조선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1703~1761)의 종택으로 집안에 연못이 있고, 안채가 자 형의 똬리집이라는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삼산종택을 지나 기사길을 따라 남진 하다가 오른 쪽 아래로 낙동강을 내려다보자 주진교와 요천선착장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진배나들 입구 정류장을 지나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따로 자리한 폐가를 사진 찍은 것은 그 폐가에 전기를 실어 나른 전신주는 아직도 멀쩡하게 남아있어서였습니다. 배나들 정류장을 지나 사당골삼거리에 이르자 비각 하나가 보였습니다. 안내문을 보고 이 비각이 여말선초에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알려진 고려의 좌사간 권정(權定, 1353~1411)의 유허비각(遺墟碑閣)임을 알았습니다. 비각이 들어선 이 마을의 이름을 지실어촌에서 기사리로 바꾼 것은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해 살던 곳임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127분 기사교회 앞 사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사당 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오른 쪽 도로를 따라 가다 길 옆 둔덕에서 햄버그를 꺼내 들며 잠시 쉬었습니다. 영상의 기온에 해가 나고 바람이 불지 않아 걷는 내내 추운 줄 몰랐습니다. 기사교회 앞에서 도목선착장으로 이어지는 오른쪽길로 들어섰습니다. 산허리에 낸 이 길에는 중앙분리선은 없었지만 510번 버스가 다니는 어엿한 차도로 노면 상태도 양호하고 깔끔했습니다. 산속의 자라골정류장을 지나 만난 민가의 한 노인분에 도목선착장에서 배가 운행되고 있는가 여쭸더니, 이분께서 구정이나 추석 등의 명절 때가 아니면 손님이 없어 배가 뜨지 않는 다고 답해 주셨습니다. 어쩌다 보이는 한두 채의 민가를 지나 도목정사 정류장에 도착해 길옆의 도목정사(道睦精舍)를 둘러보았습니다. 안동시 문화유산 제114호로 지정된 도목정사(道睦精舍)는 회벽의 색상이 새하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중수된 것 같습니다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도목정사를 소개하는 안내 글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도목리마을 안내문에 따르면 여기 도목리(道木里)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와 흥해 배씨(興海 裵氏)의 세거지였다고 합니다. 이곳 도목정사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곳으로 후손들이 그를 기려 8칸의 정사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라고 했다 합니다.

 

  1354분 도목선착장에서 안동호를 건너 자곡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버스정류장인 도목선착정 종점을 지나 정산택시 기사분에 선착장으로 와달라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몇 분을 더 걸어 도목선착장에 이르자 안동호의 승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랜만에 강물로 손을 씻는 것으로써 낙동강과 인사를 나눈 후 선착장의 안내판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배의 운항여부를 물었습니다. 기사분의 대답인즉 배는 정상적으로 운행되며 요천선착장에서 출발하므로 30분쯤 기다리라고 답해 고마웠습니다. 그새 도착한 정산택시는 요금 2만원을 지급해 돌려보내고 배가 도착하기까지 마음 편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안동호와 작은 섬인 임면대를 휴대폰에 옮겨 실었습니다. 30분이 채 안되어 도착한 배에 올라 도선신청서를 작성해 넘겨주는 사이에 배는 안동호를 건너 자곡선착장에 도착해 저를 내려놓고 요천선착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선착장에서 10m 떨어진 가류2리정류장을 들러 자곡-곡강-절강을 운행하는 514번 버스의 운행시간을 확인한 후 자곡로를 따라 북진했습니다. 이내 가류가류2리 경로당을 지나자 자곡로는 고갯길로 바뀌었고, 그 후로는 한동안 이 길을 지나가는 차나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산허리에 낸 이런 외진 길을 혼자서 걷고 있노라면 저의 실존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고 싶은 데는 어디고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 가는 것이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1533분 호반로/산야길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산허리로 이어지는 자곡길을 따라 걸어 큰오느골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모누골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자 저만치 아래로 안동호가 보였습니다. 가류2리정류장을 출발해 50분 가까이 지나가는 차나 사람들을 보지 못하다가 산야2리정류장에 이르러 사람을 보게되어 반가웠습니다. 더욱 반가운 것은 저 아래 안동호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호반로로 접어든 것입니다. 호반로가 보트골정류장을 지나  안동호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다가 산골정류장을 지나 다시 시계반대방향으로 굽이진 커브길로 바뀐 것은 안동호의 우안과 나란한 방향으로 길을 내서인 것 같습니다. 카카오맵으로 안동호의 들쑥날쑥한 호변을 보노라면 성난 용이 비늘을 세우고 비상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틈틈이 왼쪽 아래 낙동강의 안동호를 내려다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시간에 이 길을 걷는 제게 주어진 더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자 만사 제쳐 놓고 때맞추어 이렇게 나들이를 나설 수 있는 여유가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산야2리 정류장을 출발한지 40분이 채 안되어 도착한 호반로/산야길 삼거리에서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치고 안동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야길로 들어섰습니다.

 

  1621분 가구리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나들이를 마무리했습니다. 호반로/산야길 삼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야로를 따라 걸어 산야1리정류장을 거쳐 규모가 아주 작은 와룡사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산야교회가 보였습니다.

 

  와룡사를 지나 산야로를 따라 걷다가 왼쪽 야산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헛기침하며 반응을 보이자 마을로 내려오려던(?) 대여섯 마리의 멧돼지들이 방향을 바꾸어 천천히 산위로 올라갔습니다. 1대간9정맥을 혼자서 종주할 때 여러 번  조우했던 멧돼지를 실로 오랫만에 만나자  반가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서 사진을 찍으려다 바로 생각을 바꾼 것은 그런 제 행위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 받아 제가 공격을 받을까 싶어 걱정되어서였습니다. 얼떨결에 멧돼지를 만나 잠시 반가웠으나 자리를 뜨고 나자 뒤늦게 무서운 마음이 일어 눈앞에 보이는 작은 고개를 넘기가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작은 야산의 인근 마을로 내려오는 멧돼지라면 산에서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리다가 배가 고파 할 수 없이 내려오는 것이기에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포악해질 수도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더럭 겁이나 유튜브를 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저만치로 농암로가 보였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1630분에 정산을 출발하는 안동행 버스를 충분히 탈 수 있겠다 싶어 주변을 돌아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길옆의 능성구씨 백담종택 한유재 동강서당은 그리 오래된 고택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 선생은 퇴계 선생의 문하생으로 이조참판 자리에 올랐을 때 동서분당이 시작되자 불편부당한 자세로 중도의 길을 걸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구봉령 선생은 선조 때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문신들의 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기록화인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에 그려진 인물입니다. 이 기록화에 같이 그려진 독서당계회 회원은  윤근수(尹根壽) · 정유일(鄭惟一) · 정철(鄭澈) · 이이(李珥) · 이해수(李海壽) · 신응시(辛應時) · 홍성민(洪聖民) · 유성룡(柳成龍) 등 모두 9인으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대부들입니다.

 

 

  농암로에 다다라 길 건너 우송정(友松亭)을 돌아보며 과연 안동은 고택의 도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제가 들른 정자나 고택은 고산정, 농암종택, 성성재종택, 삼산종택, 도목정사, 백담종택 등인데 아직도 들르지 못한 고택이 훨씬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시끌벅적한 곳에 세워진 우송정은 우송정(友松亭) 지정(池淨, 1416-1453)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고택으로 2005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단종 원년인 1453년에 38세의 나이로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된 선생은 부임을 기다리다가 계유정난을 맞아 안평대군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유배 중 화를 당했는데, 정조15년인 1791년에 단종의 능인 장릉에 배향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선생의 뜻을 경모하고자 이곳에 우송정을 세운 것은 1933년의 일이고, 해체해 복원한 것은 2005년의 일입니다.

 

  우송정에서 와룡면행복센터 쪽으로 조금 떨어진 가구리(가메기)정류장으로 이동해 510번 버스를 타고 안동터미널로 향해 13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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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호가 생기기 전에 월산서원에서 가류2리의 자곡선착장까지를 낙동강의 강줄기를 따라 걸었다면 그 거리는 15km 남짓 되었을 것입니다. 안동호가 만들어지면서 골짜기들이 물로 가득 채워져 월천서당-선성문화촌-오천유적지-방잠삼거리-주진교-기산교회 길로 빙 돌아 도착한 도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안동호를 건너 자곡선착장에 다다르기 까지 30km를 넘게 걸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경북 안동의 시골길을 원 없이 걸었습니다. 반세기 전에 벽지의 시골길을 걸었다면 버스는 아예 다니지 않았고, 길도 포장이 안 되어 어쩌다 차 한 대라도 지나가면 풀풀 나는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썼을 것입니다. 요즘은 시골도 살만해져 집집마다 경운기나 승용차들을 갖고 있어 포장이 안 된 시골길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걸은 길 중에는 산허리에 낸 산길도 여러 곳에 있었는데 하나같이 포장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다지 불편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전기가 들어가 각종 가전제품을 도시에서와 다름없이 사용할 수 있고, 길이 다 포장되어 하루에 두 서너 번은 농촌버스가 들어오고 행복택시도 운행되고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문명생활이 가능해진 농촌이 활력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시골 길을 걸으며 현지의 주민들을 거의 만나지 못한 것은 꼭 겨울이어서 만은 아닙니다. 농사철에 만나는 대다수 사람들은 논밭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지 시골의 원주민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반가워할 만한 소식은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원주민과의 화합과 소통이 아닌가 합니다. 제 고향 파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여러 해 이장 일을 맡아 하신 형님께서 이주해오는 외지인과 원주민의 가교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다고 많은 지인들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작년 11월에 세상을 뜨기까지 고향마을을 끝까지 지키시고 귀농인들의 정착에 도움 되는 일을 많이 하신 분이 바로 제 형님이었다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