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9(고산정-단천교-왕모산성휴게소)

시인마뇽 2023. 12. 10. 01:52

탐방구간: 고산정-단천교-왕모산성휴게소

탐방일자: 2023. 12. 5()

탐방코스: 고산정-맹개마을-백운지-단천교-칼선대-왕모산성휴게소-이육사문학관-퇴계이황선생묘소

탐방시간: 1042-1633(5시간51)

동행       : 나 홀로

 

 

 

  나이 들어 소심해지는 것은 몸이 잘 듣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산길을 걷다보면 몸의 균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바위 길이 아니더라도 바로 아래가 천인절벽의 낭떠러지 위를 걷는다면 방호용 로프가 쳐져 안전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때가 있습니다. 젊어 한 때 그 위험하다는 암벽도 등반했었는데,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방호용 밧줄이 쳐진 산길을 걷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냐고 말하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의 소산입니다. 분명 안전하다는 것은 두 눈으로 확인해 잘 알면서도 혹시라도 발을 잘 못 내딛어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며 가슴을 졸이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는 젊었을 때와는 달리 몸놀림이 둔해져 예기치 못한 위험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곧바로 대응할 수 있으리라는 제 몸에 대한 믿음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곳곳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도 혹시라도 제 몸이 균형을 잃는다면 저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안동시에서 안동 선비순례길이라 명명하고,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방호용 로프를 설치해 길을 안전하게 냈는데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안전(安全)이 바로 안심(安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전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인데 반해, 안심은 정서적 느낌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전도는 안전요소들의 물리적 특성을 측정해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지만, 안심도는 정서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리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안전도에도 느끼는 안심도가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제가 출렁다리를 건너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것도 출렁다리가 안전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남보다 더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가 백두대간과 9개 정맥을 거의 다 혼자서 종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종주길이 요즘 제가 강을 따라 걷는 길보다 덜 위험해서가 아닙니다. 강 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산길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제 나이가 50대중반에서 60대 초반으로 제 몸에 대한 저의 믿음이 견고해서 가능했습니다. 그간 세월이 흘러 7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제 몸에 대한 믿음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절대로 위험하지 않은 산길을 따라 걷기가 겁이나 4년 전부터 보다 안전한 강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강 길을 따라 걷다가 기암절벽을 만나면 길이 끊겨 빙 돌아가야 하는데, 더러는 절벽 위에 낸 길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방호용 로프가 설치되고 계단이 놓여있어 안전한데도 불안해하는 것은 제가 제 몸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이번에도 스틱을 사용해 몸의 균형을 잃지 않고 어려운 코스를 해냈습니다. 이렇게 위험하다 싶은 코스를 무난하게 통과하고 나면 제 몸에 대한 믿음이 배가되어 나이를 되돌려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스스로를 대견해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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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역에서 거금 52천원을 들여 택시를 타고 이번 탐방의 출발지인 고산정으로 이동한 것은 절벽 위의 위험하다 싶은 길을 시간에 쫓겨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중간에 서부리의 안동 선비순례길 종합안내소를 들렀으나 문이 닫혀 필요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데, 한 달 여 전에 들른 고산정이 다시 찾아온 저를 반겨 아쉬움이 풀렸습니다. 강 건너 단애의 암벽을 사진 찍은 후 아홉 번째 낙동강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1042분 고산정을 출발했습니다. 안동시도산면의 가송리에 자리한 고산정은 안동 선비순례길’ 5코스인 왕모산성길의 출발점입니다. 고산정에서 시작해 맹개마을 -백운지-칼선대를 차례로 지나 원천교에서 끝나는 이 길의 전장은 12Km, 중간에 몇 곳에서 낭떠러지 위에 낸 길을 통과해야 원천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산정을 출발해 낙동강 좌안 길을 따라 걸어, 아직도 걷어 들이지 않아 콩들이 그대로 방치된 콩밭을 지나 다다른 잠수교앞에서 마을을 거쳐 강변 정자에 이르렀습니다. 낙동강의 물 흐름이 그대로 포착되는 정자에 올라 낙동강의  감입곡류를  사진 찍고 좌안의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방호용 밧줄이 쳐진 길을 따라 절벽 위로 올라가면서 내려다 본 낙동강은 응달진 곳에 물이 얼어 있어 냉랭해 보였습니다. 곳곳에 걸려 있는 안동선비순례길리본이 안내해주는 대로 걸어 오르며 강 건너 풍경을 조망했습니다. 나무계단 길을 따라 올라 '장구목 0.6Km/맹개마을0.5Km'의 표지목이 서 있는 갈림길에 다다른 시각은 1235분이었습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른 후 맹개마을로 향하면서 지난번에 들렀던 농암종택을 사진 찍고자 했으나 나무들이 앞을 가려 여의치 못했습니다.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느라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했는데, 얼마 후 시멘트 길로 들어서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1246분 맹개마을 초입의 벽력암 위 전망대에 이르렀습니다.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가 벽력암 위 전망대에 이르자 앞이 탁 트여 강 건너 농암종택과 그 왼쪽의 분강서원 및 애일당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작 보이지 않은 것은 제가 걸어온 좌안 길 아래에 자리한 월명당과 발 아래 벽력암이었습니다. 넓은 길을 따라 내려가 만난 맹개마을은 다양한 형태의 팬션(?)들이 들어서 이름처럼 촌스럽지 않았습니다. 마을을 막 지나 펼쳐진 강변 좌안의 넓은 밭은 잔모래로 가득 채워져 채소를 재배하는 것 같지 않았고, 짐승들이 다닌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들어가 밭가로 나가 걸었습니다.  데크다리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햄버그를 꺼내 요기한 후 다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작은 바위의 위쪽에서 고드름이 열리고 아래쪽에서는 고드름이 자라는 드문 풍경을 사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힘든 길을 마다하고 탐방에 나선 덕분입니다. 강변 좌안의 절벽 위에 낸 가파른 길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인지 낙엽이 길을 덮어 조심해서 걸었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발아래 새파란 낙동강 강물과 강 건너 칙칙한 색상의 건지산을 보면서 느낀 것은 제가 여름 날의 푸르름을 먹어 삼킨 겨울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데크 다리를 지나 '단천교2.0Km/맹개마을1.6Km' 지점에 이르자 시멘트 길이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 단천교로 이어지는 낙동강 좌안의 백운로로 들어서자 감입곡로의 낙동강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제법 넓은 충적평야의 들판이 보였습니다.

 

  1429분 단천교를 건넜습니다. 낙동강 좌안의 백운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행해 버스종점인 백운지정류장을 지나자 단천배수문이 보였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처음 보는 배수문인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바짝 배수문에 다가가 안내문을 읽고 확인한 것은 이 지점의 낙동강은 지방하천이 아니고 국가하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낙동강의 국가하천은 경북안동의 도산면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환경부의 하천관리정보시스템에 공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방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백운로를 따라 걸어 다다른 단천교에서 원천교까지 곧바로 이어지는 왕모산성길을 따라 걷지 않고 다리를 건너 낙동강 우안의 단사길로 들어섰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빙 돌아 제방 길을 따라 걸으면서 강 건너 좌안에 줄지어 곧추선 기암절벽들을 바라보노라니 과연 절경이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여기 원천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육사 시인이  시 「절정」 의 시상을 다듬었다는  강 건너 칼선대(葛仙臺)를 사진 찍고 나서 낙동강에서 벗어나 이육사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15시10분 허름한 시골 가게 '왕모산성 휴게소' 앞에 이르렀습니다.  서쪽으로 원천교 길이, 동쪽으로 단천교 길이, 그리고 북쪽으로 이육사문학관 길이 갈리는  '왕모산성 휴게소' 앞 삼거리에서 강 건너 자리한 칼선대를 다시 한 번 조망하는 것으로써 9구간 탐방을 마쳤습니다.

 

  아직 걷기를 마치기에는 일러 이육사문학관을 들르고자 북쪽으로 이어지는 왕모산성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른쪽으로 단천교 길이 갈리는  뒷재 삼거리에 이르러 그대로 직진해 조금  내려가자 왼쪽으로 원천교와 넓은 들판이 펼쳐졌고, 그 너머로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보였습니다.

 

  공원으로 조성된 낙동강 우안의 너른 들을 바라보며 데크 길을 걸어 이육사문학관에 도착했습니다. 회색의 문학관 건물에서 오로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육사선생의 올곧은 삶이 느껴졌는데, 이는 아마도 문학관 건물의 외관이 보여주는 선이 부드러운 곡선이 아니고 똑바른 직선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며 서둘러 전시물을 일별한 후 선생의 시집 광야에서 부르리라와 학술발표문을 모은 이육사문학과 저항정신등 두 권을 사들고 문학관을 나왔습니다. 

 

   16시33분 퇴계이황선생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써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이육사문학관을 나와 고개 너머 퇴계이황선생 묘소로 향했습니다. 이내 도착한 '토계리-퇴계묘소' 정류장에서 오른 쪽 산으로 올라가 퇴계이황선생묘소를 참배했습니다. 선생의 묘소는 명성에 비해 너무 작아 초라해 보였습니다. 제 고향 파주의 율곡리에 자리한 이율곡 선생의 묘역은 규모도 크고 부모님들이 같이 안장되어 있었는데, 여기 이황선생의 묘역에는 선생의 묘와 며느리인 금씨부인 묘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정류장으로 내려가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를 사진 찍은 후 골짜기 골짜기를 물로 채운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어둠이 시골마을에 내려앉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1시간을 기다려 1746분에 도착한 급행버스 3번을 타고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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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 낳은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이자, 목가적이면서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한 시인(詩人)입니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제작한 안내전단에 따르면,여기 안동시도산면의 원천리에서 태어난 선생은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1920년 결혼한 후 1924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후 1926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아큐정전을 지은 중국의 문인 노신(魯迅)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27년 귀국해 장진홍의 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17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그때 수인번호가 264번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을 발표하고 이후 청포도, 광야절정등 총40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했으나, 그해 가을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선생은 1944116일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의 감옥에서 순국하시어 생을 마쳤습니다.

 

  문학관을 돌아보며 눈길이 간 것은 문학관 밖에 세워진 시비(詩碑)였습니다. 그 시비에는 잡지 문장19401월호에 발표된 선생의 시() 絶頂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絶頂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선생의 시「절정」은 교과서에 실렸던  광야청포도만큼 눈에 익은 시는 아닙니다. 집에 돌아와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후에야 어렴풋하게나마 선생이 이 시를 쓴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경복교수는 그의 논고 이육사 시의 사회주의 의식 연구에서 위 시 절정에 대한 여러 평론가들의 시평을 소개했습니다. 그중 제 눈을 끈 것은 오세영교수의 절정시 분석이었습니다.

 

  “오세영은 시 절정을 구조적으로 정치하게 분석하면서 이미지체계에 따라 1연 행동, 2연 정지, 3연 침몰, 4연 초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요약하고, 마지막 연의 해석을 두고 일상적 공간의 상실과 존재의 무화 과정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극한점에 다다를 때 어떻게 시인이 새로운 삶의 지평을 획득하는가를 역설적으로 그려 보여준다면서 시인의 역설적 자기 변신, 혹은 비극적 초월로 풀이하고 있다.”

 

  1연에서 3연으로 옮겨갈수록 난관이 더해진다는 것은 위 분석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마지막 4연이 해석하기에 난해했는데, 이는 무지개가 상징하는 바가 쉽게 잡히지 않아서였습니다. 1-3연에서 심화된 난관을 극복하는 장치가 4연에 있다면 무지개는 절정에 이른 희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난관의 절정인 겨울에 역설적으로 절정에 이른 희망을 볼 수 있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 같은 이 시를 읽고서 과연 이육사는 절망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 민족에 희망을 보여주고자 애쓴 민족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탐방사진>